김홍석 교수님;

뜻깊은 부활절 직전에 편지를 드릴 수 있는 기쁨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그리스도께서 부활 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원히 주님과 같이 살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이 점에 있어 카톨릭 교리와 개신교교리의 차이가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카톨릭 교리가 개신교의 교리와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제가 성경으로 증명하는 것보다는 역대에 평생을 바쳐 그 차의 점을 발견하고 선포한 글들을 제시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신교 시점을 많은 사람들이 마틴 루터에다 둡니다마는, 그는 그 영광스러운 사역을 시작 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일 뿐, 그가 주장한 교리에는 여러 가지 흠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찬예식에 대한 것이며, 성찬예식에서 받아먹는 떡과 포도즙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된다는 미신입니다. 이 미신을 믿는 것은 카톨릭교와 동일합니다.

개혁의 정의는 카톨릭 교회가 믿는 어처구니없는 미신적인 교리를 배척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를 믿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진리가 지금에 와서 달라진 것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카톨릭 교회를 더 이상 지적하지 않고 성경말씀으로 교리를 지적합니다. 우선 저의 교회가 믿는 교리 중 다섯 가지 오류를 지적해 보겠습니다.

개혁주의 교단의 여러 가지 교리가 있으며, 그 중에 월등하게 진리를 선포한 교리중의하나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며, 역대 장로교단파 또 개혁 교단이 이 교리를 채택해 왔습니다. 제가 다섯 가지를 지적하는 것이 이 교리가 월등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고, 더 완벽하게 성경적으로 교리를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웨스트민스터의 교리를 제정한 후 개정한 흔적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교리조항 제 25장 6항에서 교황을 "The Anti Christ"로 정의한 것을 삭제한 것입니다.

20세기에 이르러 성경을 연구한 자료가 풍부하고, 히브리어, 희랍어를 모르는 신자들도 번역한 성경을 원문과 대조할 수 있게 성경사전(concordance)도 발간되었습니다.

가장 큰 오류는 제 24장 5절입니다.

"결혼 후 배우자가 음행 하는 경우 무죄한 배우자는 이혼을 청하여 이혼하고, 이혼 당한 음행 한 배우자가 죽고 없는 것 같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합법적이다".

이와 같은 교리의 기초가 마태복음 19장 9절을 잘못이해한대서 오는 것이나, 성경은 아주 명확하게 어떠한 경우도 이혼할 수 없음을 가르칩니다.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은 롬 7:2, 마 19:8절 등입니다.

둘째 번은 제 28장입니다. 여러 가지 개혁교리가 거의 예외 없이, 신도들이 물로 주는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신비주의적인 이해이며, 우리 육신이 하는 어떠한 일도 우리가 받는 구원의 원인이 될 수가 없음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셋째 번은 제 16장의 "of good work"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선을 행하느냐에 따라서 천국에서 받을 상이 다른 것 것처럼 인상을 주는 교리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선이 크고 작은 정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착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될 수 없고, 우리가 말 할 수 있는 것은 "무익한 종"임을 고백하는 것이 택하심을 입은 성도들의 바른 태도이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넷째 번은 믿지 않는 자가 죽는 순간 지옥에 간다는 제 32장의 가르침입니다. 이 교리는 부자와 나사로의 얘기, 누가복음 16장이 비유인 것을 미처 모르고, 불신자가 죽으면 곧바로 지옥에 갈 것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없는 연옥을 말하는 것 보다 좀 낳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성경이 가르치는 지옥은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말세에 세상에 오시어 심판을 받은 후 불신자가 갈 곳이며, 그때까지 믿지 않는 자들이 죽으면 적막한 곳에서(시 115:17) 마지막 심판날을 기다리게 됩니다.

다섯 째는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불렀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제정하신 새 안식일임을 지적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희랍어 원문, 마태복음 28장 1절, 마가복음 16:2, 누가복음 24:1, 요한복음 20:1절 등은 일요일이 새 안식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잘못된 번역을 고쳐야 합니다.

교수님께서 궁금한 점, "왜 우리가 아직도 그 교파에 속해 있어야 하는가?"하는 것인데 그 답은, 모든 교파의 교리를 비교해서 그래도 아직 본래의 개혁신앙을 가지고 있는 교파이기 때문입니다.

4월 8일 주일에 보내주신 편지를 web site에 보내기 전에 제 의견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교수님께서 교회에 가는 이유를 "빵을 나눔에 참여하려 갑니다"라고 했는데 카톨릭이 성찬에 쓰는 빵이 지금은 Waffle이라고 들었는데 복숭아꽃임만 한 Waffle을 입에다 넣어주는 사진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성찬식의 빈도도 저희들 교회에서는 두 달에 한번정도로 하며, 실제로 돌아오는 빵과 포도즙을 내가 집어먹고, 또 들어서 마십니다. 성찬식은 본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을 대신하면서 명령하신 것이기 때문에 최소한 일년에 한번은 성찬식을 올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미사는 단지 은총의 샘입니다"라고 하셨는데 "은총"이 "은혜"와 그 뜻에 있어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요? 세상에는 은혜라는 단어를 남용하고 있는 줄 압니다. 성경에서 은혜: Grace는 구원의 동의어이며,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차원의 선물을 말하며, 인간의 감정이나 지식이 은혜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여러 착실한 카톨릭 신자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교수님의 글을 생각합니다. 교수님은 철두철미하게 카톨릭 교리를 지키는 분으로 이해가 갑니다.

그 다음으로 순교자에 대하여 상당한 정보를 주셨는데 제 의견을 들어보십시오. "위대한 순교자"라고 강조한 점이 철저하게 카톨릭 교리를 대표한다고 봅니다. 카톨릭에서는 순교자들의 계급이 있고 신자들도 구원을 받을만한가 아닌가의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주 착한 사람은 죽어서 바로 천국에 가고, 좀 덜 착한 사람은 연옥에 가서 고생을 해야 된다는 것이 카톨릭 교리 중에 하나가 아닙니까? 개혁교리는 "The Salvation is of the LORD"입니다.

제가 믿는 성경의 교리는 카톨릭의 순교에 대한 교리를 부정합니다. 얼마 전 저희들 교회의 교리를 비평하면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그 선함과 믿음에 차이를 따질 필요가 없이, 다 "무익한 종"들임을 지적했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천국의 비유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품꾼들이 포도 원에 들어온 시기에 관계없이 같은 품삯을 받은 것은, 구원받은 자들이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였고, 얼마나 큰 사역을 했는가에 대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세울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내가 하나님의 포도 원에 고용된 자인가를 확인하고, 그 포도 원의 일을 하고 있는가를 말씀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순교자를 높이 찬양하고 성자의 자격증을 수여하는 행사는, 하나님께만 돌려야할 영광을 전적으로 사람들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교인들이 보이지 않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정한 표준을 마음에 두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줄 알고 살게됩니다. 카톨릭 교회가 호화찬란하게 차려 놓은 성당의 기구와, 조각과, 또 그림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거룩하게 만든다는 생각은 하나님 말씀에 위반된 것이며, 카톨릭의 제도와 행사가 우상숭배임을 성경은 분명하게 명시합니다.

교수님은 제게 보낸 편지 중에 여러 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없이도 하나님을 알게된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 교리를 철저히 부정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하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로마서 10:17절의 진리는, 아담과 노아를 포함하여 역대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은 필수적인 절차임을 믿어야합니다. 말씀 없이 얻은 신앙은 하나님께서 보장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를 하나님의 지혜와 비교할 때, 그 크기를 "지구와 콩알"을 비교하는 것 같겠습니까? 아닙니다. 무한과 유한을 비교하는 것이지요. 교수님은 Engineer이시니 수학에서 무한과 유한을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사람이 행한 것으로 비교해 보겠다는 것이,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인정"하자는 카톨릭의 인본주의가 아닙니까? 이 점이 카톨릭교와 개신교의 다른 점이지요. 역사상 순교 당한 신자들의 수와 일화를 책으로 엮어 서로 읽습니다마는, 그것이 교회나 교파의 행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순교자들은 하나님 명령에 순종했을 따름입니다. 우리도 말씀에 순종할 때 육신이 죽임을 당하지 않을지라도 순교자가 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순교자에 대한 아름다운 얘기를 나누고 싶다면, 손양원 목사님의 책이 있습니다. 두 번씩 읽으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을 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분명히 기억해야할 중요한 성경의 진리는, 장래를 믿는 교리가 사람이 정한 교리이면, 그것은 사람의 걸이며,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말씀 없이 제정된 교리와 운명을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불안전하고 무서운 길입니까? 교회가 눈으로 보는 것만 알기 때문에, "그들이 딸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8:11)라고 하신 것은 특별히 말세에 인본주의 신앙이 번성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교수님은 "나는 평강이 있습니다"라고 거듭 신앙간증을 하신 줄 압니다마는, 그것이 인본주의 교리에서 오는 믿음이 아님을 증명해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이 속히 다가오고 있음을 성경이 예언하였으며, 모든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발견합니다.

교수님의 믿음은 무엇을 "보고" 믿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을 말씀을 읽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까? 카톨릭교회가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세우고, 그것을 선포하고, 교인들에게 알게 하는 것은, 그들 신앙에 무엇인가 "보고" 믿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하셨습니다. 카톨릭의 매주마다의 미사가 "재현"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보고" 믿어 보겠다는 것이 아닌지요?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하신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의 생각대로 정하고 시행하는 의식들이 다 쓸데없는 인본주의의 행동임을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까?

역사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역사상에 나타나는 인물들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라볼 분은 노아도 아니고, 아브라함도 아니고, 베드로도 아니고, 바울도 아니고, 순교자도 아니고, 성모 마리아도 아닙니다. 믿는 자들의 눈이 인간을 향할 때 하나님은 질투하시는(출 20:5) 하나님이십니다. 교수님이 성경에만 그 신앙을 둔다면 , 103명의 순교자가 그렇게 큰 자랑거리가 못됩니다. 진정한 참 기독교는 역사에 관심이 없어야 합니다. 또 교수님은 자랑처럼 "그들에게(카톨릭 순교자) 성서는 한 페이지도 읽어보지도 못했고 구경도 못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실을 말한 것이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담이 창조된 후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을 듣고"(롬 10:17)서만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철칙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유명지사인 이벽, 이승훈 등등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신부의 말만 듣고 순교를 받았다면, 그 신부가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겠습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인쇄기가 발명될 때까지는 신도들이 교역자들의 설교만을 의존했음을 이해하며, 성경책이 출판된 후 에도 카톨릭교회는 신도들이 성경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해 오지 않았습니까? 물론 성경의 값이 엄청나게 비싸기는 했습니다마는, 1950년대, 제 대학시절만 생각하더라도 카톨릭 교도들에게는 교회가 발간하는 문답집, 기도집 밖에 소유한 일이 없었지요. 교수님은 20세기 후반에 태어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겠지요. 지금은 내가 지니고 있는 신앙을 교회에다 탓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 활짝 공개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공부를 하면서 거듭거듭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유일한 말씀, 성경을 쓰신 이유가 "21세기에 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나 같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편집하셨구나"하며 감탄합니다. 완벽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역사와, 문화와, 문명을 또한 완벽하게 계획하시고 운영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인류가 21세기를 즐기고 있는 전자시대가 우연히 사람의 공력(功力)으로 이루어진 것이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완벽하신 섭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Internet을 통하여 복음이 전해지며, 또 그 사역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섭리 속에 있다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신 기적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특히 교회 역사(歷史)가 교회와 믿는 자들에게 중요한 유일한 이유는, 역사를 보고 잘못한 것을 하나님께 뉘우치게 하는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고집해온 교회의 교리를 옹호하고, 그 잘못을 변명만 하는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입니다. 우리는 우리 선조 들의 역사를 자랑하고 순교자를 찬양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파수꾼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하므로 그 중에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바 되려니와 그 죄를 내가 파수군의 손에서 찾으리라"(겔 33:6)고 하신 말씀을 한시도 잊어버릴 수 없는 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수님의 넘치는 젊음과 주님께 향한 정열을 진실한 파수꾼으로 하나님께서 쓰실 때가 올 것을 기도합니다.

이대우 드림. 4월 14일 2001년

부활절 아침

김홍석 교수로부터,

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일요일 미사참레에 가기전에 다시 한번 이메일 확인 했습니다. 교회에 입회하시면서 5섯가지 교리를 고쳐야 한다고 하셨는데, 정말 호기심 갑니다. 어떤 교리일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왜 형제님은 어째서 5가지의 다른 교리를 감안하면서도 그 교회에 입회하셔야

했는지도 궁금하군요. 제게 보내시는 편지를 게제 하시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럼 저의 편지도 함께 게제 하실 계획이십니까? 아니면 형제님께서 제게 쓰신 편지만 게제하실 계획이십니까?

저는 지금 성당에 미사참례를 하기 위해 갑니다. 신부님이 좋아서도 아니고, 성당의 교인과의 친목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빵을 나눔에 참여하러 갑니다. 초대교회에서 매주일마다 빵을 나눔을 하였고 예수님께서 친히 빵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기 위해서 참례합니다. 빵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우리를 위해 독생 성자를 보내시어 수난당하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 그리고 부활하심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다시금 일깨우려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빵나눔이 오늘 날과 같은 형식은 분명히 아니었음을 압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 간절한 마음과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과 수난을 내 마음 속 깊히 깊히 되세기고 부활의 기쁨을 내 뼈속 깊히 세겨서 다시오실 주님의 영광스런 재림을 기다리는 그 소박한 마음으로 인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식의 미사로 발전하였지만, 그 의미나 기념하는 내용과 그 형식을 통해 되세기는 주님 사랑의 마음은 더욱 뜨거워졌으며 초대교회의 교부들께서 가지신 열정과 기쁜소식의 나눔은 오늘날 매일 재현되는 모든 교회의 형식안에서 잘 승화되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면, 미사를 참례하지 않고 성찬의 빵을 나누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합니까?라고 물을 사람도 있을텐데, 저는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사는 단지 은총의 샘입니다. 미사는 물론 가톨릭의 모든 예식과 형식은 은총의 샘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구원의 결정적인 필수도건은 아니라고 봅니다. 미사를 포함한 예식들은 모두 하느님의 터무니없이 쏟아부어주시는 은총을 나누고 마음속 깊히 되세길 수있는 중요한 의식들이며 그 형식을 통하여 주님의 은총을 더욱 가슴 깊히 되세기는 아주 은혜로운 기회라는 것입니다. 즉, 미사와 같은 예식은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되세기고 모든 복음의 진리를 매일 매일 내 뼈속 깊히 내 두개골 속 깊히 갑옷처럼 세겨서 입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유혹과 시련과 고난과 고통과 번뇌를 겪을 때마다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주님을 뵙게 될 그 순간까지 내 신앙을 철저히 지켜나갈 수있게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주님을 증거하다 순교한 위대한 순교자들이 많이 있었지요. 한국에서만도 수만명의 선지자들이 땅바닥에 십자가를 그어놓고 밟으라는 관졸들의 명령을 듣지 않아 목을 내 놓았습니다. 그 당시 신부도 선교사도 없었습니다. 미사는 물론 고백성사등 각종 예식에 대해서도 몰랐습니다. 물론 오늘날과 같은 성서 조차 없었습니다. 이벽선생께서 마태오 리치라는 신부가 한문으로 쓴 천주실의를 읽고 하느님에 대해서 알게됐고 당대의 유학 사상가들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들을 수만명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서는

구경도 못했지만, 하느님에 대해서 깨닳았습니다.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는 어땠는 줄 아십니까? 망나니들은 목을 칠때 한번에 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한번 살짝쳐서 피를 흘리게하고 죄인이 고통중에 신음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죄인의 가족이나 관리에게 돈을 더

줘야 목을 친다고 흥정을 6시간 이상씩 했습니다.

그래도 순교성인은 얼굴에 고통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피를 줄줄 흘리면서 자신이 하느님께로 가는 그 기뿐 마음에 설레여 그 굳은 믿음으로 6시간 이상씩 참았습니다. 그들에게 성서는 한 페이지도 읽어 보지도 못했고 구경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오늘날 우리가 편하게 성서를 읽고 논쟁을 하는 우리의 편한 신앙과 비교하면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식사때 성호를 그으며 감사의 기도를 드려도, 하느님이라는 말을 밖에서 해도 아무도 잡아가지 않습니다. 바오로 성인 베드로 성인 그리고 위대한 수많은 성인 성녀들이 하느님을 증거하며 피를 흘렸을 때와 같이 우리나라에서도 수 많은 선지자들이 그렇게 피를 흘리면서 주님을 증거하며 죽었습니다. 우리나라 전국각지에 그들이 흘린 피는 단 한방울도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들이 흘린 피는 오늘날 우리의 마음을 적셔줍니다.

수많은 순교자들 중 교황청에서는 자료가 확실한 단 103명의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이벽선생, 이승훈, 정약종, 정하상, 정약용, 정약전등 많은 당대 내놓으라는 선지자들 중 귀향가거나 순교하여 성인 품에 오른 사람은 정하상 성인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세계 위대한 선생들을 나열한 사전에 이벽선생을 나열합니다. 우리나라에서조차 그렇게 하지 않는데 프랑스에서는 이벽 선생을 예수님이나 부처와 같이 Mentor라고 표현합니다. 즉, 대문자 M은 유명한 선생에게만 주는 칭호입니다. 그 이유는 1800년대 당시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들이 한국에 밀입국하여 미사를 집전하고 세례를 주면서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하였기 때문입니다. 황서영의 백서와 같은 당시 핍박받던 신앙인들의 많은 자료가 현제는 프랑스 박물관에 보관되어있습니다. 많은 프랑스 신부들이 우리나라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순교 당합니다. 그래서 조선이라는 나라에 더욱 관심을 가졌고 조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프랑스 박물관에 오늘날 보존 되어있습니다. 로마 교황청에서 우리나라 성인을 인정할 때 프랑스에 보관된 자료에 많이 치중을 두었기 때문에 오직 103명의 성인뿐이 인정을 못하였습니다. 그런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내게 중요한 것은 당시 수만명의 선지자들이 조선 팔도에 흘린 피. 즉, 하느님을 증거하기 위해 흘린 피는 단 한 방울도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피 한방울로 나는 오늘 미사 참례에 가기위한 기운을 복돋아 줍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과 그 위대한 힘에

감탄합니다.

어서가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빵을 나누고 잔을 마시며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의 의미를 마음속 깊히 깊히 되세기고 사랑의 갑옷으로 갈아입어야 하겠습니다.

그럼. 미사에 늣기전에 가야겠습니다.

김홍석 바오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