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석 교수님,

E-mail을 잘 받았습니다. 전에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회답을 쓰겠다고 약속을 드렸기에 부득불 편지를 드립니다.

 

교수님이 근처에 사시면 제가하는 일에도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을 것을! 하는 생각을 합니다. 몇 주전, 3월28일에 미국 국회는 법령 H.R.1259를 발표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NIST에서 컴퓨터 및 컴퓨터 네트워크에 대한 새로운 표준을 연구 발표하고, 사용하도록 한 예산이 책정되고, 대학에도 연구비가 나가도록 책정이 된 모양입니다. 이 법령으로 현재 정부가 사용하고 있는 IPsec Protocol이 보다 더 분명한 Authenticated field, IKE Architecture 와 Cryptographic algorithms이 발전될 것을 기대합니다.

교수님이 네트워크 보안에 대한 예를 들면서 경험 없는 학생을 성경공부와 비교를 하셨는데, 저는 그 얘기를 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이해하는 것은, "인터넷보안을 공부하는 것과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저희들 Website 첫 페이지에 이 사실을 좀 설명한 줄 압니다. 이 사실을 믿기 때문에 저희들 복음회의 이름이 A Little maid Ministry이며, A Little maid는 열왕기하 5장 2절에 나오는 "어린 소녀 하나"가 아닙니까? 이 "어린 소녀"는 사마리아에 선지자(예언자) 엘리사가 문둥병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밖에 알고 있지 않았지요. 구약 성경에 나오는 문둥병은 모두가 죄로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인간을 상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이 어린 소녀가 없었던들 나만 장군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말 할 것도 없이 구원을 가르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성경학자도 아니고, 신학박사학위를 소유한 사람들도 아니고, 순수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인하여 되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지요. 교단의 교리가 완벽하다고 해서 그 교리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가 없습니다. 복음전도에 대한 하나님의 원리는 이사야 55장 11절에 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명령을 받고, 그 말씀을 전한 기록이 구약이며,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어 어떻게 우리를 구속하시는가 하는 사실을 그대로 전한 기록이 신약성경이 아닙니까?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당대에 가장 유명한 성경학자라고 합니다마는, 빌립보서 3장 6-8절에 그의 고백을 보면 "율법의 의"(구약의 지식)를 배설물(dung)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많은 구약의 지식을 다 버리고 다시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아 구약을 공부한 것이 히브리서이며, 또 그의 서신들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 지식이 많기 때문에 전도하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믿는 것은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고 본인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한마디라도 진리를 전하는 것이며, 세리와 어부들을 제자로 선택하신 그의 뜻을 우리는 헤아릴 수 있습니다. 저의들 복음회는 조직도 없고, 성경을 깊이 공부한 역사도 없습니다마는, 이사야 55장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참 진리를 말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하여 "잃은 양"을 찾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는 것은 복음전도는 일방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할 따름이지, 그 결과 거두시는 이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조직도 없고 성경연구의 기초도 없는 저희들 복음회가 어떻게 수천만의 교인을 가진 카톨릭 교회와 대항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발견한 진리를 보고 안타까워서 그것을 선포할 따름입니다. 만일 독자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그 진리를 깨닫고 성경말씀으로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 저희들 복음회를 크게 쓰시는 것이겠지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로 성경이 무슨 책이냐 하는 것을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이다"라고 했으며, 교수님도 그 사실에 대하여 강조하신 것을 편지를 읽으면서 알게됩니다. 저도 물론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대상에 대하여도 정의를 해야 됩니다. 로마서 9장 11-13절에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사랑을 정의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내가 나기 전부터냐,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난 후 이냐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의 일생도 보호하셨고, 아벨을 살인한 가인도 그 생명을 지켜주신 기록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인은 지옥에 갈 심판을 마지막 심판날에 받을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쫓겨난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야곱을 사랑하신 사랑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는 줄 압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모자(母子)간, 형제간, 그리고 이웃을 돕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종교 단체가 이러한 사랑으로 구제사업을 합니다마는 그러한 것들이 야곱에게 베푸신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가인에게도 베푸시고, 에서에게도 베푸시고, 이스마엘에게도 주신 사랑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주제는 "야곱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 당시 이 사랑을 잘 구분해서 쓰신 것을 발견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말씀하신 사랑도 야곱을 사랑하신 사랑을 말씀하시고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는 야곱을 사랑하신 사랑이 아니고 인간이 타고난 성품 중에 아직도 선한 성품을 소유하고 있음을 가르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을 베풀 줄 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 아는 것이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분명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저의 카톨릭 비평이 비평을 위한 비평이 아니고, "야곱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자는 것입니다. 가령 서울역에서 제가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 분명히 부산으로 갈 사람임을 알고 있는데, 만일 그 사람이 단양(제 고향)으로 가는 Platform 서 있다면, 그 사람을 바른 platform으로 안내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모든 것이 김교수님께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 편지는 Website에 보낼 것이며, 허락하시면 또 6월분 뉴스레터로 나갈 것입니다.

이대우 가족 드림, 4/19/2001

김홍석 교수로 부터:

찬미예수,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보면 여러 종류의 학생들을 대하게됩니다.

예를 들어서 TCP/IP 네트워크 보안에 대해서 강의를 한다고 합시다. 유닉스 체계의 서버상에서 구현되는 여러 가지 보안관련에 대한 강의를 할 때, 주요 TCP포트를 통한 침투방법과 그 대안책에 대해서도 강의를 하고 UDP포트의 취약점에 대해서도 기초부터 상황 설명을 하겠죠. 또한 많은 네트워크 침투방법과 교란방법, 방화벽 구축및 시스템 상에서의 보안방법에 대한 주의점에 대해서 하나하나 실험을 하고 이론으로 뒷받침을 시켜주지요.

그와 같은 이론을 설명할 때의 내용은 기초적인 화일관리부터 운영자의 권한, 시스템의 한 계등 여러 가지 다른 이론들이 부가되어야 하겠지요.

보통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이나 회사에서 컴퓨터로 작업하는 사람은 그와 같은 깊은 지식을 몰라도 충분히 컴퓨터를 활용할 수있지요. 90세넘은 할머니도도 무리없이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고 초등학교도 가지 않은 6살짜리 꼬마도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사용합니다. 물론 깊은 지식이 없지만요. 동네 아저씨가 인터넷으로 주식을 사고팔아도 안전합니까?하고 물으시면, 저는 간단히 네 또는 아니오라고 대답을 해야지 여러가지 장황한 설명과 이론과 배경과 실례와 검증자료를 동원해서 몇주간 앉혀놓고 설명을 다드리고 알아서 생각하세요 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는 이와 같은 과목을 가르키는 교수이기 때문에 수십년동안 연구를 하고 실무경험을 쌓고 이론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제 수업에 임할 당시에는 당연히 겉으로만 듣고 왔기 때문에 수업을 끝까지 인내하고 듣기까지는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요. 어떤 학생은 겨우 기초 수업 몇시간을 듣고나서 제 수업을 듣지 않은 학생에게 설명할 때보면 상당히 그럴싸 하게 합니다.

많은 부분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곁들여서 말하면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이 그것을 들었을 때는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을 하지요. 왜냐면 그와 같은 이론을 말하는 학생이나 그와 같은 지식이 없는 학생이 말하는 내용을 듣는 사람이나 겉큪기 식의 대화일 뿐이니까요.

그런 학생이 제게 와서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하거나 실습을 통해 보여달라고 하기전까지는 저는 그냥 그런 학생들의 대화를 듣고 웃곤 합니다.

성서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때도 그와 같은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성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까지 공부한 분들께서 성서를 이제 곧 읽기 시작한 사람에게 많은 설명을 할 수는 없겠지요. 어차피 성서학 박사가 설명하는 내용은 보통 성서를 읽는 사람에게는 이해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와 같은 깊은 지식을 꼭 알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글씨를 이해하고 글자의 뜻을 이해만 한다면 누구든지 하느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인식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분명히 성서연구에 관해서는 그 흐름이 있습니다.

성서연구에 있어서 전체적인 근본적인 흐름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학자들은 교파를 초월하는 모습을 자주봅니다. 개신교에 속한 성서학자이건 가톨릭에 속한 성서학자이건 성서연구의 모습에서는 자신의 교파를 주장하거나 자신이 속한 교리만을 고집하는 모습은 찾아보지 못합니다. 그만큼 성서학에 대해서는 통달한 사람들이고 일생을 바쳐서 성서연구에만 몰두하였고 그 근본적인 흐름과 메시지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서가 어떻게 쓰여졌으며 당시 시대 상황과 문학적 관념과 정치적요건등 엄청나게 많은 요소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비평을 2천년간 해온 연구의 결과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그와 같은 성서의 깊은 연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메시지에대한 이해는 성서학 연구학자가 아니더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서의 목록이 오늘날과 같이 정해진 4세기부터 오늘날 까지 성서에 대한 연구는 어떤 학문에 대한 연구보다도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그 연구 방법또한 교파를 초월하여 가지고 있는 전문적인 비평 방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원전비평, 즉, 성서로 받아들여진 문서가 쓰여진 당시의 원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추적해 내어 원본을 재구성하는 연구입니다. 물론 신약의 경우에는 그 연구가 그래도 수월하지만, 구약에 경우에는 훨씬 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이유는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종이도 없었고 글의 보존 방법이라든지 전승방법에 있어서도 너무나 취약했기 때문이죠. 또한 1세기도 안된 당시에 이미 원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손으로 베껴서 기록을 남긴 사본들만이 존재하였고 그와 같은 사본들도 다른 내용이 이미 첨가된 상태여서 그 옛날 조차 원 저자가 썼으리라 믿어지는 내용을 알아낸다는 것은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이 세상 어느누구도 4세기 당시 성서로 받아들여진 내용의 원본에 대해서 찾고자 한다고 해도 원본이란 없습니다. 아니, 그당시조차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학자들의 일생을 건 연구와 노력에 의해 당시 많은 연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평가했을 때 하느님의 말씀으로 간주되는 내용이 성서로서 재 집필되었고 또한 그 결과가 되는 수기된 사본들이 또 전승된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 수기되어 전승된 사본들 또한 세월을 거듭하며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또한 변화를 가지고 오늘날 그당시 재 집필된 사본들을 비교해 볼 때에도 내용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도 당시 구약성서의 히브리어로 재 집필되어 수기로 기록된 많은 사본 내용중에 대표적인 것들은 들자면, 레닌그라드 사본이 있고 그리이스어 사본은 아퀼라역, 카이게역, 루치안역, 칠십인역, 임마테우스역, 테오도시오역이 있으며 사해문서,콥트어, 에티오피아역본, 시리아 육공관역, 타르쿰역, 불가타역, 사마리아 오경등이 오늘날 구약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쓰이는 구약 성서들입니다.

신약성서의 원전에 가깝다고 보여지는 사본들은 2세기에 쓰여진 (이 당시에도 종이가 없었음) 체스터 비티 파피루스, 보드머 파피루스역등 그 사본들의 수를 세도 약 2135개나 됩니다. 물론 각 사본들마다 내용에또한 차이점이 있지요. 이 많은 사본들은 연구하고 재 집필하고 (1440년경 출판기술이 나오기까지 모두 수기로 기록되어 전승되었음) 성서의 각 줄은 물론 단어의 비평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노력과 수많은 학자들의 피와 땀이 들어서 오늘날의 성서를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어느누구도 그 원전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할 수는 당연히 없습니다.

구체적인 원전 비평연구에 대한 예를 들자면, 한 장르의 몇번때 줄이 다른 사본에는 다른 단어로 또는 빠져있어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다른 사본들을 참조하고 그 내용을 가장 잘 이해하는 글로 재정립하되 당시 교부들의 신앙적인 교리에 의거하여 다시 수기로 쓰여진 흔적들을 연구하다보면, 얼마나 엄청난 "다시쓰기"가 행하여져서 오늘날의 성서가 나오게 되었는지를 알 수있습니다. 저는 지금 원전비평에관해서만 약간 말씀드렸는데, 이것은 아주 기초적인 성서의 연구방법입니다. 더욱더 성서를 체계적으로 원본에 가깝게 해석하자고 하는 노력은 더욱 엄청난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즉, 출전비평, 양식비평, 전승비평, 편집적비평, 종교사적비평, 사회학적비평, 구조주의적비평, 수사학적비평, 해석학적비평, 언어학적비평등 성서연구의 장르는 몇장의 종이에 다쓸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위에 나열한 비평방법에 사용되는 많은 사본은 세계 각 주요 박물관에 보관되어있으며 그중 가장 많은 부분의 사본은 체계적으로 바티칸 교황청에 보관되어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성서를 참으로 쉽게 읽고있습니다. 어떤이들은 그 내용에 대한 해석도 맘대로 합니다. 마치 자신은 하느님으로 부터 성서를 직접 건네 받았다는 듯이 자신의 성서에 대한 이해는 올바르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분들은 참 복되신 분들인것 같습니다. 수천년동안 엄청난 숫자의 성서학자들이 수많은 사본을 연구하여 재정립한 내용을 통해서도 찾을 수 없는 내용을 겨우 몇 년 성서를 읽었다고 해석도 참 잘하고 소위 진리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참 잘 찾아냅니다.

다시 앞에서 말씀드린 네트워크보안에 대한 비유입니다. 누가 컴퓨터 공부좀 했다고 세계적인 연구단체에서의 비판평과 검증을 통해서 또한 연구와 검증을 토대로 갖춘 이론을 술술 잘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부러움을 느낍니다. 들어보면 그럴싸합니다. 아주 짜맞추기도 잘 합니다. 꼭 모든 해답과 진리를 가진 듯 합니다.

그런 말이있지요. 아는만큼 더 알아야 할 것이 많다고.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토론을 하려고 할 때 상대방의 준비상태가 밤과 낮과 같은 차이를 가진다면, 대화가 불가능하겠지요. 상대방이 어느정도 준비가 되어있고, 기초적인 지식이라도 있으면 그런 대화가 어느정도 갈 수있겠는데, 밤과 낮과 같은 차이가 있다면 둘다 시간낭비가 되겠지요. 그럴 땐, 아는 사람은 겸손의 미덕을 보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상대방이 어느정도 준비가 될 때까지말입니다. 섣불리 어떤 내용을 이야기했다가 상처만 주게될테니까요. 또한, 그와 같은 대화가 서로에게 절대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가게 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못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도 아니라고 봅니다. 다시한번,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심중을 헤아려 봅니다.

그동안 형제님, 가톨릭 비판에 대해 여러 글을 보내주셨는데, 뭐라고 드릴 말씀이 차마 없군요. 죄송스럽습니다.

한가지 희망사항이있다면, 형제님, Q가 뭔지 한번 알아보시겠습니까? 그럼 그때 다시 대화 나누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성자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형제님과 형제님 가족 모두와 함께 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김홍석 바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