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웹페이지로 돌아가기
Return Back To New Home

 

무엇이 참 복음인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복음이 무엇인가? 오늘날 세상이 당면한 문제 중에 이 질문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 이유는 참 복음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는데 대한 답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 복음을 분별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을 발견하기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참 복음을 구성하고 결정하는 권위가 무엇인가?

-- 참 복음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 참 복음의 지상명령이 무엇인가?

모든 복음은 그 자체가 가지는 권위에 의하여 구성되고 결정되어진다. 권위가 다를 때 그 복음도 달라진다.

우리는 거짓 복음이 급격히 늘어나는 때에 살고 있다. 어디를 가든지 서로 다른 복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상 내가 참 복음을 따르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설교를 듣는다. 그리고 여기 저기서 성경 구절을 읽는다. 일반적으로 복음에 대하여 많은 좋은 점을 듣는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듣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류의 복지를 위하여 주신 성경에 기록된 법을 알게 된다. 그러나 결국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소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복음에 딸려오는 세세한 것을 다 제쳐 버리고 복음의 핵심을 발견할 수 있을까?

참 복음을 구성하고 결정하는 권위

참 복음이 사실상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복음을 구성하고 결정하는 권위가 무엇인지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복음의 본질은 신령한 권위에 의하여 정의되고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모든 종교나 복음 그리고 사상이나 신앙은 그 자체가 인정하는 권위에 의하여 정의되고 설립된다.

예를 들면, 모슬렘교도는 훌륭한 모슬렘교도로 사는 방법을 알기를 원할 것이다. 그는 모슬렘교도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책으로 믿고 있는 코란(Koran)에서 주의 깊게 그 의견을 들을 것이다. 그러므로 코란은 모슬렘교의 복음을 구성하는 성문화한 권위이다.

정통 유대교는 또 다른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 유대교의 권위는 우리가 말하는 구약 성경은 교회의 선조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썼다고 믿는 글들로 구성된다. 그것이 바로 유대교의 본질과 특성을 구성하는 권위이다.

또 한편 몰몬교는 신령한 권위로서 성경과 하나님의 계시로 되었다고 믿는 몰몬경을 가지고 있다. 몰몬경은 성경보다 나중에 나왔으므로 성경보다 더 우월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몰몬경의 추종자들은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을 몰몬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내용에 비추어서 보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로마 카톨릭 교도들도 또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다. 그들 복음의 권위를 구성하고 결정하는 것은 성경으로 시작하며, 아포크리파(Apocrypha) 외경이 권위의 일부이며, 잔다르크(Joan of Arc)의 환상, 페티마(Fatima)의 환상, 그리고 소위 로마 교황의 전혀 오류가 없는(infallible) 교서가 권위의 일부가 된다. 이러한 모든 것을 신령한 것으로 인정하며, 로마 카톨릭 복음의 특성을 구성하는 권위로 삼는다.

같은 방법으로 성령의 카리스마적(charismatic)인 복음은 그들 자신들의 권위가 있다.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동시에 계시를 통한 환상, 음성, 방언 등이 성경을 능가하여 첨가되는 권위이다. 그러므로 성경도 권위가 되며 그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믿는 꿈과 환상과 방언이 그들의 권위가 된다. 카리스마적인 복음의 특성을 구성하고 결정하는 권위가 넓어진 것이다.

마음에 늘 두어야 할 사실은 언제든지 우리가 다른 권위를 가지고 있을 때 다른 복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참 복음을 설명하는 하나의 정의를 요한일서 4장 2절에서 읽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 4장 34절에 보면 귀신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어떤 특수한 정의가 단독으로 존재할 때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충분한 정의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복음의 특성과 본질을 구성하고 결정하는 신령한 권위를 찾아내어야 한다.

성경 자체 그리고 성경 전체로써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립하는 권위가 되는 것을 성경은 지적한다. 요한계시록 22장 18-19절에 기록된 말씀이 이 사실을 가장 잘 설명한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례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참 복음의 특성을 확립하시는데 표준으로 쓰신다. 성경만을 가지고 참 복음의 한계를 정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령한 참 권위이다. 이 성경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립하는 완성된 권위이다. 이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신령한 권위이기 때문에 우리 생활에 있어서 완전한 권위가 된다. 우리는 열성을 가지고 읽어야 하며, 또한 열성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연구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 생활에서나 교리를 따르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되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하나님 말씀에 더 충실하고자 하는 진지한 욕망이 있어 그 생활과 교리를 바꾸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 자체 그리고 성경 전체를 권위로 믿지 않고 그 보다도 좁거나 넓은 권위를 따르는 것은 성경의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니다. 굉장히 거룩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그러한 복음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참 복음의 중심적인 메시지

무엇이 참 복음의 중심적인 메시지인가? 복음은 인류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라고도 할 수 있으며 이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고 풍성한 삶을 얻게 되며 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배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여러 구절을 생각하면서 복음의 근본적인 개성을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상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우리는 복음의 핵심적이고 총괄된 뜻을 발견한다. 이 구절은 모든 상세한 부과적인 복음의 뜻을 제쳐놓고 아주 기본적인 메시지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우리는 읽는다.

대개의 경우 신학자들은 이 구절이 시작하는 어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 시선을 집중한다. 이 어구는 영광스러우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마련되어 있다고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그의 사랑과 구원은 다음에 읽는 "멸망"에 대한 뜻을 알기 전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설교에서 이 어구 "멸망치 않고"에 대하여 듣는 일이 드물지만, 이 "멸망치 않고"는 복음의 절대적으로 알아야 할 필요한 부분이다.

성경을 살펴 볼 때에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있는 "멸망"이라는 말은 아주 없어지는 것(annihilation)을 뜻하지 않는다. 영어로 말할 때 "내가 멸망할 것이다"라고 하면 우리는 죽어 없어져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성경에 죄 값은 사망이라고 하셨다(롬 6:23).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죽음은 영원히 지옥에 존재함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류의 궁극의 상태이다. 이것이 멸망의 뜻이다.

인류의 가공할 문제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로마서 3장 10-11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고 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악함을 예레미야 17장 9절에서 말씀하신다.

우리가 죄인(비록 적은 죄 한 가지만 범하였다 하더라도)이기 때문에 멸망을 당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삶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마지막 날을 우리가 심판을 받는 날로 정해 두셨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죄인이므로 복음 없이는 우리 모두가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마어마한 진리를, 장래를 바라볼 수 없게 창조된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다.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사실이 사실의 전부가 아니다. 사실상 육안으로 보는 것은 피상적이며 전체적인 사실의 극히 적은 부분이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한 친구가 있어 그가 죽었다고 하자. 그는 살아 있는 동안 동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다고 하자. 후에 그가 죽었고 장례식에서 그를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추도하였다. 그 후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평상과 같이 삶으로써 그 친구에 대한 것을 다 잊어 버렸다고 하자. 그런데 그 친구는 복음이 없이 구원을 받지 못한 채 죽었으므로, 그 자신이 다음으로 발견할 것은 하나님 보좌 앞에 서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심판에서 그가 지은 죄에 대하여 답변을 해야 하며 그 죄과는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 중의 한 가지 죄 만으로도 그를 영원한 멸망으로 징벌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심판에서 그는 피할 수 없으며 집행유예도 없고 가출옥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온 세상에 걸쳐 매일 약 200,000명의 인간이 죽는다. 그들의 대부분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죽으며 그 다음에 발견할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 보좌 심판대 앞에 서서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영원한 멸망을 받을 것이며, 이 무섭고 어마어마한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가끔 50,000명이 죽은 지진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는다. 전쟁으로 700,000명 혹은 800,000명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무자비한가에 대한 이야기도 듣는다. 흉년으로 수십만의 인구가 아사한 이야기도 듣는다. 이상의 실례나 어떠한 비극적인 사건도 인류가 당면할 비극적이고 가공할 사실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참혹한 살인이나 무서운 기근이나 전쟁이나 또 어떤 무서운 사건의 결과로 인하여 육신이 죽는다 할지라도 육신이 죽는 사실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그 무서운 이야기는 죽은 후 심판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죄 값으로 인한 우리의 영원한 멸망을 요구한다.

불행하게도 이 부분의 복음은 설교를 통하여 듣기 힘들게 되어 있다. 이러한 복음은 견책 적이며 민망하고 심각하다. 이 사실은 너무도 무섭기 때문에 잊어버리길 원한다. 차라리 도덕적인 생활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바란다. 차라리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를 할지라도 이 복음의 중요한 부분은 이야기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놀랍게도, 지옥이 인류를 기다리고 있다는 진리가 이야기의 전체가 아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성경에 우리가 지옥에 갈 것이라는 이야기만을 쓰셨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에 대하여 감사할 것이다. 이러한 지옥에 갈 것을 깨닫는 지식이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이유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여하간 지옥에 간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메시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천에 금실로 누벼져 있는 것 같고 또 금실이 성경 전체를 누비고 있는 것 같은 소망의 소식이다. 이 소식은 우리가 우리의 구세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의 다른 측면이며 복음을 제시하는 중심 부분이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 3:16).

어떤 이유로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써 지옥을 면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셨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이라고 하였으며 이사야 53장 6절에는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담당시키셨도다"(누구든지 그들의 온 생명을 그리스도께 의존하는 것임)라고 하셨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중심이 되는 메시지이다. 세상의 어떤 소식도 이 복음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이 소식은 인간은 죄가 많고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무서운 진리에서 시작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그에게 자비를 간청하며 생명을 걸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것을 알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지시고,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섰을 때 그는 하나님 보좌 심판대 앞에 섰던 것이다. 그는 우리의 죄를 인하여 유죄 판결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저주를 내리셨다. 그 저주의 비중은 그리스도를 믿는 각자들이 영원히 지옥에서 지낼 것과 같은 큰 형벌이었다. 이렇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셨다. 우리의 죄 값으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그리스도께서 충족하셨다. 우리의 죄 값이 이미 지불되었기 때문에 지옥이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하지 않는다. 우리를 지옥으로 보내는 율법의 지배를 더 이상 받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 하나님의 이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사단의 지배 아래(구원을 받기 전에 우리는 사단의 지배 아래 있었다) 있지 않으며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왕국의 시민이 된 것이다.

슬픈 사실은, 어떤 면으로 보아 오늘날의 교회가 이러한 소식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아서 사실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특히 오늘날 교회에서 이것은 사실이다. 물론 예외가 있다. 그 예외에 대하여 하나님께 찬양하자! 현대 교회는 어떤 면에서 볼 때 복음의 중심이 되는 특성에 대하여는 무감각해졌다. 너무나 많은 수의 목사님들이 지옥에 대하여 설교를 하지 않는다. 아주 유명한 신학교 출신의 신학자가 지옥을 공공연하게 설명하기를, 어떤 사람이 돌고, 돌고 또 도는 비행기 속에 있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하였다. 단지 그는 지옥을 가지고 농담을 한 것이다. 그는 신명기 28장을 읽어야 한다. 그는 요한계시록 14장 11절에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라고 한 말씀을 읽어야 한다. 그는 마태복음 13장, 마가복음 9장, 그리고 마태복음 25장,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13:42), "벌레가 죽지 않는"(막 9:44,KKJV), 그리고 영원한 멸망을 말하는(마 25:46) 구절들을 읽어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구절을 자주 읽어보지 않는 이유는 겁이 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면 차라리 두려워해야 할 것이며 그 이유는 지옥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복음으로부터 인류는 무엇을 원하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싫어서 성경이 제시하는 중심적인 메시지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 복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 불행하게도 신학자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그들은 복음을 정치적이나 경제적 복음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그들은 말하기를 "기독교란 정치적인 압박에서 해방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경제적인 안정을 가지기 위하여 충분한 식량을 저축하라는 경제적 복음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또 말하기를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지상에서 누리기 위하여 육신적인 복지를 가르치는 복음도 있다.

세 가지의 열망이 있다. 정치적인 자유, 경제적인 안정 그리고 좋은 건강은 모든 인간들이 원하는 바다. 이러한 종류의 목표를 가지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사실상 이러한 열망들은 참 복음이며 영적인 복음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누가복음 16장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비유를 주셨다. 이미 이 비유를 전에 인용하였지만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내용과 질문에 대하여 적절하고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성경을 보면 부자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가 돈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자유도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에게는 가장 훌륭한 의사가 있고 영양사가 있어 건강관리를 잘 하여 최대한의 건강을 즐겼을 것이다. 의심할 것 없이 그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즐겼을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복음의 메시지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그 부자와 같다. 모든 것이 그를 위하여 잘 돌아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나사로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나사로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거지였다. 그는 경제적인 안정도 없었다. 그는 의사가 필요했지만 의사를 방문할 경제적인 능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거리에서 밤을 새웠을 것이며 먹을 것이 없었으며 그는 원하지 않는 음식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여하간에 몸에 종기가 났다고 했으며 신체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상 거지로서 길거리에서 살았다면 정치적인 보장은 생각할 여지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의 쓰레기처럼 존재하였고 사람들 눈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지상에서 잘 살기 위한 복음이 필요하다면 바로 나사로는 그 복음이 필요한 인간이었다. 이야기는 계속되어, 나사로와 부자가 다 죽었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 두 사람을 가리고 있던 포장을 다 벗겨 버리고 영원히 살 사람으로서의 실상을 보여 주신 것이다. 우리가 발견한 것이 무엇인가? 인간이 갈망하는 기본적인 것을 가져 본 적이 없던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영원히 안식하고 있다. 그는 말하자면 가장 좋은 것을 소유했고 가장 큰 축복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믿는 자들이 구원을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상징이다.

그런가 하면,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던 부자는 어디에 가 있는 것을 우리가 보는가? 이 비유에서 그는 지옥에 가 있으며 가엽게도 아브라함에게 간청하여 말하기를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 16:24)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부자가 영원히 지내야 할 무시무시한 지옥에 대한 본질을 말한다. 이 두 사람 중 누구에게 복음이 필요하였던가? 두 사람 중에 누가 도움을 받았어야 했던가?

만일 당신이 나사로에게 정치적, 사회적 복음을 가지고 그에게 약을 주고 경제적인 안전의 보장을 시도하였다면 나사로가 천국에 갔을 때 그의 입장이 달라졌겠는가? 달라질 수가 없다. 참 복음과 영원한 복음을 생각할 때 나사로는 그 외의 복음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사로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먹을 것이 있으면 되었고, 또한 그는 사람들의 최소한의 인정을 받음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온 인류가 필요로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다면, 그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복음의 메시지를 정치, 경제, 문화적인 열망과 관련을 시켜 나타냈을 때 기독교의 복음은 많은 국가 지도자들에게 비난거리가 되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복음을 인류가 원하는 대로 변경한다면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정치적인 통치자들을 협박하는 행동이 되고 만다. 과거에 선교사들이(현재도 이런 일이 생기고 있지만) 중국이나 다른 많은 나라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 서양 풍습을 복음에 섞어서 전하였다. 그들이 가지고 왔던 복음의 메시지는 육신의 번영과 정치적인 자유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니다. 이러한 선교사들은 불행하게도 잘못 된 신호를 주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체류하고 있는 국가의 내정을 간섭하는 것이며 참 복음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사실상 그 국가의 통치자는 참 복음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사람들이 지배를 받고 있는 어떠한 정치 체제도 참 복음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통치자를 세우시고 또 폐하신다. 또 성경은 어느 국가의 시민들이 그들을 다스리는 통치자에게 순종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정부의 종류에 따라 순종하는 정도가 다르다는 암시도 없다. 성경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경제적인 실태를 고려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내어 보내시며 전도 사역을 하실 당시에도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을 학대한 사실이 있었던가? 사실상 그러한 일이 있었으며, 노예들이 불쌍하게도 매를 맞고 학대를 당하였다. 경제적인 불안정이 있었던가? 사실상 있었으며, 그 때는 *자비선(Mercy ships)이 아직 없을 때였다. 확실히 사람들이 굶어서 죽어가던 시대였다. 그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처절하여 치료를 받았어야 할 상태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던 때였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 사역의 사명이 병을 고치는 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좋은 건강을 약속하는 복음을 가지고 오시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기 위하여 병을 고치는 기적을 베푸시고 복음의 영적인 조화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역사적인 비유로 병을 고치셨다.

* 자비선: 적십자 병원선 같이 위급한 사람들을 구출할 수 있는 배

그것들은 천국의 뜻을 가진 지상의 이야기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사도들이 죽은 후에는 육신의 병을 고치는 일에 대하여 성경에 언급이 없다. 복음은 영적인 치료를 말하며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으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벧전 2:24-25)라고 하였다. 복음은 우리의 죄로 인하여 병든 영혼을 고치는 일이다. 복음의 메시지는 인류가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지만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세상의 모든 믿지 않는 사람들을 다스리는 사단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전환되는 것이다.

우리는 거듭난 신자들로 구성된(그들의 정치적 이념이나 문화가 각각 다를지라도) 영적인 국가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전환된다.

많은 신학자들이 복음의 개성을 염두에 두고 크리스천의 통일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오히려 성경의 진리를 분열시킨다. 에베소서 4장 4-5절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가르친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 이요"

하나님께서 어떤 통일을 마음에 두고 계시는가? 신학자들이 이 통일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할 때 의도는 좋지만 잘못 깨달아 복음과는 관계가 없는 개념을 소개하게 된다. 그들은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의 뜻이 정치적인 자유가 같고 다 같이 경제적으로 번영할 때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참 복음은 정치적 활동이나 경제적 욕구나 건강을 갈망하는 것보다는 훨씬 고차원의 사실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참 복음을 가질 때는, 러시아나 중국이나 독일이나 미국이나 또 어떤 나라에 살지라도 "주는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라고 할 수 있다. 즉 영적인 통일성을 말한다. 우리의 죄가 씻음 받은 것을 이해하는 신앙이다. 영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옥에 가는 선고를 받지 않고 영생을 얻은 것을 아는 것이다. 비록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서로 관계가 없을지라도 영적으로 우리는 한 몸이 된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빠지는 함정이나 올무에 걸려서는 안 된다. 구약 성경에서 솔로몬의 그 많은 금과 은의 기록을 읽으며, 아브라함의 부귀에 대하여 읽으며, 그 외의 여러 가지 실제적인 번영에 대한 기록을 읽는다. 그들을 "보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생기는 일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그와 같은 실제적인 번영을 기대한다"라고 결론을 짓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구약 성경의 이스라엘은 한 가지 지상의 이야기의 일부이며 신약 교회가 당면할 영적인 뜻을 지적하는 역사적인 그림자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을 제시한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실질적 번영은 한 지상에서의 이야기로서 그리스도 안에 믿는 자들이 영적으로 번영하는 천국의 뜻을 가리킨다. 이 영적인 번영은 예수님 자신인 생명의 떡을 영혼이 만족하게 먹는다는 뜻이다. 구약 성경에 포도주의 그릇이 차고 넘친다는 말씀은 지상의 표현으로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완전히 지불하시기 위하여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넘쳐흐름을 극적으로 나타낸다. 역사적으로 고대 이스라엘에게 자유가 주어졌다는 기록은 우리가 죄와 사단의 속박에서 자유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문제점은 죄 안에서 살아 온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역사적으로 이전에 일어났던(하나님께서는 상징적으로만 사용하심) 사건을 보고 그것을 복음의 근본으로 삼아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자연적인 감각에 만족을 준다. 사람이 원하는 만족은 정치적 자유, 경제적 안정 그리고 좋은 건강이다.

만일 우리가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실제적인 특성에 맞도록 복음을 만든다면 우리는 또한 구약 시대의 신자들이 드린 희생의 제물을 드려야 할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신 사실을 실제로 부정하는 것이다. 신약성경 어느 곳에도 정치적인 자유, 경제적인 안정, 그리고 좋은 건강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는다. 복음의 전체적 근본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자유를 얻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정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사단의 지배로부터 옮겨져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법이 우리를 지옥으로 보내지 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다. 우리는 영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본질이다. 이 사실만이 우리가 선포할 메시지이다.

복음의 지상명령이 무엇인가?

우리는 세 번째 질문을 살펴 볼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구성하고 결정하는 권위에 대하여, 그리고 복음이 가져오는 메시지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다음으로 복음의 지상명령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조사해 보자.

온 세계에 복음의 메시지를 전파하도록 우리가 명령을 받은 가장 명료한 성경말씀을 읽는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이것은 예수님께서 내리신 명령이며 취사선택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명령은 우리가 편리할 때만 할 수 있고, 기분이 날 때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성경 말씀의 절박한 명령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신(Ambassadors)으로서 죄로 인하여 병든 세상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우리가 대신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눅 19:10)고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중국 사람들 중에 구원을 받을 잃어버린 자를 찾으려 오신 것이다. 그는 독일 사람, 러시아 사람, 그리고 세상의 모든 국가 중에 구원을 받을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것이다. 우리는 누가 그 잃어버린 양인지 알지 못하지만 성경은 그들의 이름이 만세 전부터 어린양의 생명록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을 구원하실 책임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참된 사신은 거듭난 신자로서 복음의 참 본질을 이해하는 자이다. 그들은 지옥의 현실을 직면하며, 성경만을 절대적으로 믿게 된다. 그들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이 놀라운 사명(명령이지만 굉장하게 멋진 사명이다)을 받았다. 변명할 여지가 없다. 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을 다하여 이 사명을 실천하여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복음을 전파하며 이 복음이 미국의 복음도 아니고 멕시코의 복음도 아니고 구라파의 복음도 아니고, 어떤 다른 변태된 복음도 아님을 분명히 해 두자. 우리가 근본적인 본성에 초점을 둔다면 참 복음은 모든 국가에서 절대적으로 공통된다. 우리가 어떤 국가에 살고 있는가 에는 차이가 없다. 우리 모두가 정확하게 같은 영적 궁핍에 처해 있으며, 또한 우리 모두가 정확하게 같은 영적 교정이 필요하다. 일단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지옥의 고난을 당하셨음을 알고 죄에서 해방되었을 때 비록 일생을 강제 수용소에서 살거나, 매를 맞으며 기아상태에서 살더라도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가 거지 나사로처럼 개가 와서 부스럼을 핥은 것 같이 보잘것없이 이 세상에서 존재하거나, 궁궐에서 살면서 세상의 모든 축복을 받았다 할지라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성경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을 가르친다(눅 20:7).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뜻이 무엇인가? 요한복음 13장 34절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구절은 남을 사랑하는데 대한 개념을 설립한다. 우리는 우리의 동료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여야 한다.

당신과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성이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정치적인 자유, 경제적인 안정, 그리고 좋은 건강을 위하여 오셨는가?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것을 나사로에게 주신 일이 있는가?(눅 16:참조).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절대적으로 "아니다"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그의 생명을 내어 놓으셨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셨고, 그 진노는 우리가 지옥에서 영원히 지내야 할 벌에 해당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고 영생을 갖게 하기 위하여 그 큰 진노를 당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권고하신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나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원 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참으셨으며, 그의 원하심이 바로 그의 사랑의 초점이었다면, 그 원하심이 또한 내가 남을 사랑하는 사랑의 초점이 되어야만 한다.

세상을 살펴 볼 때에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으려 하는 무서운 악령이 있으며, 지옥은 세상의 믿지 않는 자들을 피할 길 없이 단단히 붙잡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루에 약 200,000명 꼴로 죽는 사람들이 거의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죽으며 지옥으로 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아야 할 진리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보셨던 진리이다. 우리의 동료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경고하기를 원할 것이다. "당신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갈 것이며 이 지옥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지옥을 피할 길이 있다. 당신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가? 당신을 위한 최대의 사랑이다. 돈을 써서 당신을 도와 줄 수 있고, 당신의 생명을 항생제를 써서 연장해 줄지라도 만일 당신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죽는다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당신은 결국 죽을 것이며 죽은 후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래도 보지 못하는가?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가 된다면 당신에게는 육신의 형편이나, 정치적인 상태나, 건강상의 상태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된다. 당신은 나사로와 같이 된다. 당신은 가장 좋은 것을 얻을 것이다. 당신 역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남의 구원을 원하고 바라는 것이 참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보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무엇이 내가 원하는 가장 좋은 것인가? 내가 육신의 번영을 바라는 것인가? 내 육신을 위한 것이 가장 좋은 것인가? 그럴 수가 없다. 오히려 이러한 것들은 내가 간구하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서 멀어지게 하기 쉽다. 그렇다면 유명해지는 것인가? 무엇인가 세상일에 갈망하는 것인가? 세상의 아무 것도 가장 좋은 것이 될 수 없다.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은 남을 위하여도 내가 원하는 바와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한 가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일은 내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죽을 때에 지옥에 가지 않게 되며 내 죄 값이 다 지불되었음을 분명히 하는 일이다.

세상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이던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세상은 약 13,000년의 역사가 있으며 에녹과 엘리야의 예를 제외하고는 모든 세상에 살던 인간은 죽었으며 또 죽을 것이다.

아무도 이 죽음에서 피하지 못한다. 이것은 성경에 의한 법으로서 인간은 일단 죽도록 정하여졌고 죽은 후에는 심판을 받는다(히 9:27). 내가 죽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내가 죽기 전에 오시지 않는 한 내가 당면할 사실이다. 내가 진심으로 나 자신을 사랑한다면 세상의 좋은 것을 갈망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더 좋은 것을 가질 욕망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세상의 것을 갈망함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가장 좋은 길에서 멀리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다. 그렇게 되고 보면 다른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옷이 몇 벌이 있는가, 무슨 차를 몰고 있는가, 차를 소유하지 못했다던가, 혹은 내가 살고 있는 형편 같은 것이 내 구원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잠시 있을 것들이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로마서 12장 1절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들이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입의 십분의 일인 십일조를 바치도록 명령하셨다. 이렇게 하여 제사장들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요구하신다. 구약 시대의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요구하신다는 뜻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의 전부를 요구하며, 네가 가진 모든 것, 네가 가진 모든 돈, 네 모든 정력을 내가 맡긴 그리스도의 사신(Ambassadors)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하여 요구한다". 이 임무는 지옥으로 향하고 있는 세상에게 귀중한 구원의 복음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진리를 우리는 더 명백하게 보기 시작하는가?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누비고 있는 금실은 구원의 메시지이다. 어느 때든지 그 금실을 보지 못할 때, 혹은 초점을 잃을 때, 우리는 성경의 복음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사람의 마음을 염두에 두고 만든 복음을 가지고 어떤 국가에 가서 그 복음을 전파하려고 할 때 문제가 될 것이다. 그 복음이 경제 혹은 정치를 논할 때 저항을 받을 것이다.

특별히 정부 당국이 정치적이나 경제적인 복음에 의하여 협박을 받는다고 느낄 것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참 복음도 역시 저항을 받는다. 참 복음은 인간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인간들은 지옥에 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한다. 누구나 다 싫어한다. 자연인의 마음은 자신을 구원할 아무런 도리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비난하게 된다. 그러한 저항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그들은 "오!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 시옵소서!"라고 하나님께 호소할 것이다. 그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 약 2,000년 전에 세상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할 것이다. 이것은 내 자아가 완전히 파괴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내 자존심이 완전히 파괴된다는 뜻이다.

그것만이 참 복음이 비난을 받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어떤 국가의 문화나 정치에 대하여 설교를 하기 때문에 그 국가의 정부 당국으로부터 저항을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복음은 성경의 복음이 아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다. 우리가 남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들을 위하여 가장 좋은 것을 갈망하여야 할 것이다. 그 가장 좋은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성실하게 전하라고 명령하신 메시지이다.

우리가 믿는 자로서 사는 동안 복음을 세상에 전하도록 하신 명령에 충실히 복종한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겸손해질 것을 강조한다. 우리의 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대항하여 욕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무엇이든지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인내를 가지고 대할 준비가 되어 있고 복음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으로 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왕국의 시민이 된 사람은 겸손히 처신할 것이다.

우리는 왜 겸손히 처신하여야 하는가? 첫 번째 이유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온유하고 겸손하셨다. 그는 천국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죄 많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의 모양을 가지고 오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죄를 지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왕국을 설립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온 세상에서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그의 왕국 안에 있고 그는 우리의 왕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다스리시며 또 우리가 정직하고 겸손하게 처신하도록 명령하신다. 우리는 또한 고난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겸손하게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겸손해야 할 이유는 우리 구원에 대한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실 하나님께서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보다는 착한 것을 미리 아시고 나를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다"라고 말할 수 없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에베소서 2장 1-3절에는 우리가 죄 안에서 죽어 있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나머지 인류가 그렇듯이 육신의 욕망을 가지고 사단을 따라가던 사람들이었다.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크리스천의 생활을 가져야 한다. "어떻게 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생을 얻을 수 있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는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내가 죽는 순간 천국에 들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것이며 모든 것이 내게는 형통할 것이다. 내 생활이 오로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로 살기를 원할 뿐이다. 내 생활은 봉사하기를 원하며, 희생의 제단 위에 놓이기를 원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듣고 풍성한 은혜로 마련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받기를 원하는 정열로 마음이 불타고 있다."

얼마나 놀라운 구주를 우리는 모시고 있는가? 참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보니 이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나타내시는 그의 큰 영광 앞에 서서 놀라고만 있다. 복음의 메시지를 우리는 늘 생각하며 우리 가슴 속 깊이 늘 간직할 것을 분명히 하자. 어느 때든지 만일 우리가 전도한 복음이 참 복음과 다른 것을 발견했을 때 하나님께 탄원하자. "오! 하나님, 내가 참 복음을 전도하려고 하였을 때, 내 육신의 생각에 맞추어 보려고 하던 일을 용서하시기 원합니다." 참 복음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구원을 받았으며, 이 세상에 나 자신을 위하여는 필요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때를 알기 위하여 몇 가지 기본적인 연구를 더 해야 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시간표는 창조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발견하여야 한다.

요약

참 복음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영원히 있어야 할 남녀노소를 구원할 수 있다. 참 복음은 성경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 그리고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르는 성경 전체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복음이 가진 권위의 근본이 복음의 개성을 결정한다. 만일 어떤 복음이 성경 말씀에서 감하였거나 성경 말씀 이외에 다른 근원에 의하여 구성되고 결정이 되었을 때 이것은 거짓 복음이다. 참 복음의 중심이 되는 메시지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이 구절은 양면으로 날이 선 칼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거나, 믿지 않아 우리가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누릴 것을 가르치신다. 우리가 온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도록 참 복음은 우리에게 명령하며 복음이 경제나 정치나 혹은 건강을 다루는 문제와 혼돈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