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天國)과 정금(精金)에 대한 이야기

우리는 미국 남가주(南加州:Southern California)에서 십여년 살면서 몇번 서해안(西海岸)을 관광하면서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특히 나성(羅城:Los Angeles)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상항(桑港:San Francisco)을 지나고 더 북쪽으로 가는 길은 좁은 길이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해안을 구경하며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가는 도중에 관망대(觀望臺)에 차를 멈추고 저물어 가는 햇빛을 받고 타 오르는 지평선을 넋을 잃고 멀리 바라보던 때를 회상합니다. 지평선이 하늘에 닿고 저녁 노을이 어두움에 잠긴 바다 끝을 막 넘어가려는 듯, 아름답고 웅장한 경치를 바라보고 감탄하던 때를 생각합니다.

이 아름다운 그림은 하나님의 한 조각의 피조물이며, 그 한 조각 피조물 속에 무진장한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잠겨 있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깊이 대할 때 아름다운 저녁 노을과, 잠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또 생각합니다.

바다의 지식이 없는 저같은 범인은 바다를 바라보고 그 크고, 웅장하고, 또 아름다운 경치만을 감상하겠지만, 만일 해양학자(海洋學者)가 바로 이 자리에 섰다면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만일 해군의 제독(提督)이, 어선의 선장이, 그리고 바다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 바다물 속을 아는 사람이 바다를 감상한다면 그들의 생각이 내 생각과는 내용이 다르겠지요.

성경은 태평양(太平洋)보다 더 큰 창조의 조각임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지상과 천상을 한 그림 속에 넣고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영상(映像)하는 파노라마입니다. 자신이 성경을 접할 때마다 "나같은 범인이 어떻게 그 깊이를 알까?"하는 겸손한 생각이 엄습(掩襲)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셔야 알지"하며 기도합니다.

오늘은 "천국과 정금에 대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제가 전에 쓴 글 "정금과 천국"에 대하여 다시 공부를 하고, 제가 발견한 몇 가지 놀라운 얘기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금이라는 단어는 얼핏 듣기에 사건의 좋은 질(質)을 말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황금시대(黃金時代), 금메달, 금언(金言), 금자탑(金子塔), 금잔디, 금혼식(金婚式) 등등 질을 말하는 여러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나 금이 세계 통화(通貨)의 기준이 되어 있는 것은 금으로 정확한 양(量)을 표시하는데 씌어짐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쓰신 성경에 나타나는 금에 대한 얘기도 이와 다름이 없습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의 의상(衣裳)을 금으로 장식을 했다거나, 요한계시록 21장에 정금으로 된 새 예루살렘 성(城)과 길 등은, 천국에 가는 우리의 구원이 아주 귀한 것을 말하겠지만, 예수님께서 여러번 사용하신 달란트의 비유는 우리가 받을 구원의 위대함을 양으로 표시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숫자에 관심을 두는 원인이 아마도 제가 공학도인 탓인 줄 압니다 마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창조가 숫자 없이 될 수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꽃잎을 볼 때도 꽃잎의 수(數)를 보고 꽃을 분간합니다. 사람의 손이 몹씨 곱고 아름답지만 손가락의 수가 넷이거나 여섯이 될 때 그 손이 아름답게 보이지를 못합니다. 이러한 예를 들자면 한이 없으며, 하나님의 창조는 여러가지 숫자를 써서 조화 있게 만드셨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더우기, 하나님의 창조와 또 그 이상의 것을 대표하는 성경도 숫자로 조화되고 그 숫자의 뜻을 알 때 무한량한 뜻을 좀 더 알게 되고,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숫자도 디모데후서 3장 16절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공부해야 됨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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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에 대한 성경의 기록

성경에 기록된 금(金)에 대한 얘기는 구약에서 히브리어 zahab로 366번이 씌어 졌고, 정금(精金) 또는 순금(純金)등 별도의 단어(dehab, paz, kethem, beter, charuts)로 약50번, 신약에서는 희랍어 chruseos로 31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금, 정금, 순금 등의 단어가 450번이나 씌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금"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敎訓)이 깊고 넓으리라고 믿게 됩니다. 450 구절을 다 찾아 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제가 그동안 즐겨 읽은 성경 구절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욥의 하나님

금을 생각할 때 저는 우선 욥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제가 경험한 일생이 욥의 경험과 비교할 점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 육신의 경험이 욥처럼 부자였던 일은 없었지만, 제 영혼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기뻐하던 때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은 욥과 같이 흡족한 부자의 경험(영혼의)을 하는가 하면,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깊은 함정에 빠지는 어려움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 답답한 경험을 욥은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습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辨白)할 말을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욥 23:3-5),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이와같은 욥의 간증이야말로 구절양장(九折羊腸)같은 60평생을 걸어 온 제 삶의 경험담을 듣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 구절은 연약한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애절(哀絶)한 모습이며, 또 스스로의 제한됨을 발견한 인간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아름다운 모습이라고도 보여집니다. 이 구절들이야말로 하나님을 발견했다고 자부하는 학자들의 간증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런데 제가 즐겨 읽기를 좋아하고 아주 사랑하는 성경 말씀이 바로 다음 절, 욥기 23장 10절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이 구절에서 욥의 생각을 짐작해 본다면 "오! 내가 당하고 걸어온 길이 얽히고 얽히어 내 자신이 이해할 수 없지만 나의 인생을 책임지신 나의 하나님께서 나를 정금으로 만드시는 과정이니 나는 그 분을 철통같이 믿고 의지합니다"라는 고백을 듣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고백이야말로 하나님의 택한 모든 백성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인 이 구절에서 인생에 대한 여러가지 교훈을 배웁니다. 첫째는 인생은 무상(無常)하며 정처 없는 나그네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인생을 하나님께서 손대지 아니하시면 쓸모 없는 한 줌의 흙으로 남을 것이나, 하나님께서 연단하실 때 정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더 나아가서 우리의 인생(믿음)이 이 정금보다도 귀하다고 했습니다. 금은 용광로(鎔鑛爐)에 들어가도 녹아 없어지지 않는 것이 특징인데 베드로가 "없어질 금보다"라고 한 뜻은 금도 아무 소용이 없이 다 멸망하고 없어질 말세를 가리키며, 세상의 끝이 다가옴을 경고하는 구절임이 틀림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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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금이라는 단어를 써서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설명했습니다. 욥이 처음 재난을 당한 후 "자기의 생일(生日)을 저주(詛呪)했습니다"(욥 3:1) 그러나 그 저주가 "모태(母胎)에서 임신된 일이 없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하는 기대가 아니고 "모태 안에 임신된 후 죽어버리거나, 난 후에 갖난 아이로서 죽고 없었더라면"하는 기대입니다(욥 3:1-12) 이와 같은 간증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욥을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시고, 본인은 모태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간증입니다. 13-16절이 이것을 잘 설명합니다.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修築)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목백(牧伯)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욥 3:13-16)

"그렇지 아니하였던들"은 자기가 당하는 삶의 고초를 세상에서 당하지 않고도 인생의 궁극 목적지인 지옥이나, 천국에 갈 것이라는 신앙의 간증입니다. "거친 터를 수축한"은 "무너질(ruin) 터를 수축한"이 원문(原文)에 더 가까운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은 사단의 통치 아래 있는 무리들이며, 사람이 모태에서 죽거나 갖난 아이로 죽을지라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면 지옥을 면할 수 없음을 가르칩니다. 또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옥에도 보낼 수 있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絶對主權:sovereignty)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모래 위에 세운 집의 비유를 생가나게 합니다. "혹시"는 간절한 기대를 말하며, "목백들"은 왕자들(Princes)을 말하며 택하심을 받은 백성을 말합니다. 유의(留意)할 것은 이 백목들이 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가 하면, 욥의 고초가 다 지나가고 하나님의 축복을 다시 받을 때에 을 가지고 있는 사항을 설명합니다.

욥기 28장은 "지혜"를 찾으면서 이 지혜를 금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그 값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 찾을 수 없구나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리니"(욥 28:12-15)

"깊은 물"은 "깊음"이 원문에 가까운 번역이며, 원어에는 "물"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이 깊음은 바다와 대조(對照)가 되는 땅의 깊이를 말하며, 그 깊음은 보화(寶貨)를 찾는 과정이며, 인간의 삶을 알려고 노력하는 세상의 학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다"는 세상을 말합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결론적으로 금을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을 가르칩니다.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災殃)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慰勞)하고 각각 한 조각과 고리 하나씩 주었더라"(욥 42:11)

이 구절도 "슬퍼하며"는 잘못된 번역이며, "위문하며(consoled)"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은 것입니다. 이 구절이야 말로 요한계시록 7장 17절에서 읽는 바와 같이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라는 장면(場面)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은 좀 이해하기가 어렵게 생각되지만, "금(money) 한 조각"은 마태복음 17장 27절에서 읽는 "돈 한 세겔"을 말하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옥의 형벌로부터 값을 치르고 사신 것을 상징합니다. "금고리 하나씩"은 창세기 24장에서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만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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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읽으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우물 가에서 리브가에게 금 고리(귀고리)와 금 손목고리를 주었습니다.

이것은 택한 백성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상징입니다. 이러한 기록은, 이스라엘 여인들이 광야에서 자기들의 금 고리를 거두어 금 송아지의 우상을 만든 것과 잘 대조(對照)가 됩니다. 이 모든 욥의 얘기가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게 됩니다.

욥과 정금에 대한 얘기를 떠나기 전에, 욥기 28장 12절에서 읽는 "지혜"에 대하여 욥기는 누차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지혜는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배우는 과정(過程)은 우리가 정금이 되는 과정입니다.

혹 독자 여러분 중에, "욥기 해설이 지나치게 영적이다"라고 하실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저는 최근에 자신을 얻은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4장 34절에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의 가르치심만을 지적함이 아니요,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의 말씀임을 알게 될 때 성경 전체가 비유임을 믿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가르치며, 구원은 우리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므로, 모든 말씀을 영적으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본래에 계획하신 뜻을 알기 어렵게 됩니다. 완벽(完璧)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성경 구절은 우리의 구원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쓰셨다는 깨달음은, 성경 말씀의 영적인 뜻을 찾도록 인도합니다.

 

에덴 동산의 정금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정금을 두셨던 기록(창 2:12)이 있습니다. 금은 우리 인간에게 삶의 보람을 주는 귀한 물질임을 성경은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의 표현이 그렇고, 또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금을 어떻게 쓰도록 명령하신 기록을 보면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금으로 상징하신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모세와 성전

그런데, 구약 시대에 금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씌어졌나 하는 기록을 읽을 때 또 다른 교훈을 듣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올 때 출애굽기 12장 35-36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했으며, 노예였던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출 3: 22)대로 하루 아침에 부자(富者)가 되었습니다.

계속하여 출애굽기의 기록을 보면 금이 여자들의 귀걸이와 같은 장식품으로 씌어지다가, 이스라엘이 금을 예물로 드려 성전의 지성소(至聖所)와 성소를 장식하고, 성전 그릇을 만드는데 썼고(출 25장), 제사장들의 옷을 장식하는데 썼습니다(출 28장). 예물로 드리지 않고 남아 있던 금은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드는데 쓰이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20절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읽습니다.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

모세 때에 이스라엘의 금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씌어졌나 하는 역사적인 기록에서 우리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여러가지 도덕적인 교훈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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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경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복음을 가르친다는 원리를 두고 다른 성경 구절과 비교하며 공부할 때 더 아름다운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예수님의 달란트의 비유가 모세 때의 금을 잘 설명해 줍니다.

달란트는 중량의 단위이지만 돈을 말할 때는 금화를 말하며 한 달란트는 약 576만불($5,760,000)로 계산이 되어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주인의 그 큰 돈을 땅 속에 묻어 두었었다는 것을 이해할만도 합니다. 이 종은 자기가 하는 일에 골몰했었고 주인의 명령인 복음(달란트)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봅니다. 이것은 마치 많은 신학자나 성경학자들이 사람들 귀에 솔깃한 논설을 전개하는데는 일생을 바치지만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가를 찾고 가르치는데는 관심이 없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한편 이스라엘의 경우를 보더라도, 금을 성전을 짓는데 쓰일 예물로 드리지 않고, 귀걸이 등의 사욕(私慾)을 채우는 장식품으로 가지고 있다가 참 지도자(모세)가 없는 동안 자기들 생각대로 신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받지 못한 모든,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다른 한편, 구원을 받은 자들은 그들 일생이 성전을 짓는 순금이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는 복음 전도에 전적으로 씌어진다는 사실의 비유라고 믿습니다.

대제사장인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는 불에 탄 후 가루가 되었고, 이스라엘이 그 가루를 마신 후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한편 성전을 위하여 바친 금이 성전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는 역사적인 사건은,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들이 주인이 올 때 (말세에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주인을 기쁨으로 영접(迎接)한다는 비유와 대등(對等)한 점이 있습니다.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

성경을 공부하면서 구원이 기적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짐을 배웁니다. 기적은 인간의 힘으로는 될 수 없는 것을 말하며, 초자연적인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을 마태복음 19장 24절에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심으로 잘 설명을 하셨습니다. 이 구절이 설교에서 많이 인용되고, 많은 사람들이 암송(暗誦)하는 구절이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 뜻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첫째, 성경의 모든 비유가 두개의 왕국(王國), 사단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약대의 비유만 하더라도 26절에 예수님께서 비유의 뜻을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다 부자임을 말씀하시며, 구원을 받을 때 내것은 전허 없는 가난한 자가 됨을 말합니다. 설교의 내용이 지식과, 상식과, 윤리와, 종교적으로 잘 조직이 되어 있어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가르치는 복음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사모하는 가난한자의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의 용서에 대한 비유도 같은 방법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예수님께서는 이 베드로의 질문을 23-35절에 비유로써 답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도 같은 사건의 기록이 있으며 이 기록은 일흔번씩 일곱번(490번)이 하루에 있을 수 있는 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설명을 보면,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 - 5 -

에 일만(10,000)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100) 데나리온 빚진 동관(同官)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마 18:23-30)

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비유를 바로 깨닫기 힘든 이유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이 비유가 구원 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지적한 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구원 받은 사람이다"라는 잠재의식(潛在意識) 때문에 도무지 남의 얘기로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백(100) 데나리온"을 "보잘 것 없는 빚"으로 간주(看做)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확한 이해를 우리에게 주기 위하여 다음장, 마태복음 20장 2절에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싻임을 정의(定義)했습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그 죄를 아내 하와에게 미루고, 하와는 자기의 죄를 사단에게 미루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복종하고 범죄한 순간 잘못된 것을 남에게 미루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강단에서 설교하는 양심 있는 목사라 할지라도, 또 모든 삶을 바처 복음을 위하여 봉사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이 속성을 죽는 날까지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절대로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백 데나리온을 "보잘 것 없는 빚"으로 보는 이유도 "나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잠재의식이 말씀의 뜻을 알아 보려는 노력에 앞서 있기 때문입니다.

100 데나리온은 100일간의 품싻입니다. 일년 365일에서 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10일의 공휴일을 빼면 일년에 우리가 일하는 날이 약 250일이 됩니다. 100일간의 품싹은 20주, 약 5개월의 임금(賃金)이 됩니다. 한달에 임금 3,000불을 받는다면, 100 데나리온은 $15,000이 됩니다. 이 액수가 우리 같은 범인들에게는 "보잘 것 없는 빚"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57,600,000,000과 $15,000을 비교하면 약 3,840,000대 1이 되며 $15,000이 보잘것 없는 빚이 되겠지만, 이러한 비율을 계산함으로써 우리의 구원(빚의 탕감)이 얼마나 귀한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비유에 쓰인 숫자가 10,000 과 100인 것은 우리가 받을 완전한 구원과, 지상에서 인간이 격는 모든 일을 대표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의 비유를 이해하는 비결은, 내가 아직도 사단의 왕국에 속해 있어 구원 받지 못한 것을 가정하고 천국을 갈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가 약대며, 내가 100 데나리온을 용서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때 성경의 해석이 분명해집니다. 사실상 내가 거듭났다 할지라도 내 생각대로 사는 때가 더 많고, 적은 일로 남을 용서 못하는 경우가 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빚" 비유에서 배우는 것은,

1.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는 그 값이 크고 귀한 것이며,

2. 사람의 생각이 진리를 가리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며, 3. 세상의 모든 일을 극복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비결은 나의 구원이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풍족한 천국

마지막으로 성경의 기록 중에 에 대한 이야기가 "풍족한 천국"으로 묘사된 구절을 찾아 보겠습니다.

지난번에 말씀 드린 것과 같이 1만 달란트(576억불)의 빚을 탕감(蕩減) 받고 은혜로 얻을 우리의 천국은 1만 달란트보다도 풍족한 곳임을 짐작합니다. 이 아름다운 천국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 21장에 잘 설명하셨지만 우리가 다 - 6 -

그것을 짐작하고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15절에는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새 예루살렘의 가장 중요한 건축 재료가 바로 택하심을 받은 믿는 자들임을 이 구절들이 말해 줍니다. 이 예루살렘 성읍은 정금(욥과 같은)으로 성을 쌓고(18절), 정금(베드로와 같은) 으로 거리를 만들었다(21절)고 읽습니다. 마지막 환난을 겪는 저도 이 새 예루살렘의 한 조각 건축 재료가 되기를 원니다.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다윗왕이 얼마나 노력을 하였는지는 역대상 22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14절에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금 십만(100,000) 달란트와 은 일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중수(重數)를 셀 수 없을만큼 심히 많이 예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예비하였으나 너는 더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숫자를 써서 우리에게 천국이 장엄한 것의진리를 가르치시는 내용이라고 봅니다. 다윗이 왕위에 있었던 40년 동안 환난 중에도 성전을 건축할 준비를 해 온 것이 분명합니다. 아주 놀라운 것은 성전을 위하여 준비한 자료(資料)의 양(量)입니다. 10만 달란트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장에 우리의 죄값을 비유로 하신 1만 달란트의 10배가 되는 점입니다. 우리의 죄값을 576억불로 비유하셨고 이 금액은 평민(平民)인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액수라는 점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576억불의 10배가 되는 10만 달란트(340만 kg:5,760억불 = 5760 X 800 억원)는 성전을 짓기 위하여 준비한 귀한 정금입니다.

이 공부(숫자)를 통하여 저에게 교훈하시는 내용은:

1. 다윗으로 상징된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자기의 성전을 짓기 위하여 철두철미(徹頭徹尾)하고 완전하게 정금(환난을 겪는 그의 택한 백성)을 예비하시고 계신다는 점과,

2. 예수님께서 지으실 성전이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화려하고 장엄하다는 것이며,

3. 40년(우리를 시험하시는 기간)의 다윗의 왕국이 끝났고 마지막으로 완전한 성전을 지으실 때가 가까왔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라고

하신 말씀을 좀 더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연단하여도 없어질 보다 더 귀한 믿음"(벧전 1:7)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Thomas Nelson Publishers에서 발간한 A Regency Bible에 첨부된 성경 사전에서 인용한 숫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량으로 금의 현 시가를 계산한 것이 아님.)

1 달란트 (금화) = $ 5,760,000 (576 만불)

= 75 파운드 = 34.02 kg.

1만 달란트 = $ 57,600,000,000 = 576 억불

= 750,000 파운드 = 340,194 kg.

10만 달란트 = 5,760 억불 = 340 만 kg.

이대우 드림, 12/2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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