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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교리와 알미니안 교리(계속), 인간의 자유의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성령으로라야 분변(分辨)함이니라"(고전 2:14)

1. 신앙의 정의(定意)의 또 한가지, "()의 사람"

위의 구절은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분변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고 하신 말씀과 연결을 시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을 듣거나, 읽을 때 그 뜻을 깨닫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신다고 믿게 됩니다. 반면에 "육에 속한 사람"은 성경말씀을 듣고 읽어도 말씀의 뜻을 분변하지 못 할 것을 가르칩니다.

신앙에 대한 교리는 우리가 살고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한 교리는 두 사람의 상반되는 의견이 다 틀릴 수는 있지만 둘이 다 바를 수는 결코 없습니다. 내가 "영의 사람"이냐 "육의 사람"이냐 하는 것도 내가 "누구와 비슷하게 얘기한다"는 이유로 영의 사람이나 육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성경말씀을 성경말씀으로 비교하여 말 할 수 있을 때 내가 "영의 사람"임을 믿음으로 알게됩니다.

""은 하나님이신 성령을 말하며, "영의 사람"이란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 아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성경에 분명하게 씌어져 있지만, 소위 기독교인들이 허다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정의(定意)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정의가 여러 가지 교리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알미니안의 5개 교리는 하나님을 정의하는 교리이며, 이것이 사람의 생각이냐?, 아니면 성경에서 온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55:8)라고 하신 이유는 인간의 생각이 그럴 뜻하더라도 버리고 내 말만을 들으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살길이라고 하셨습니다( 55:2-3).

2.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알미니안 교리

(1). 조건이 붙은 하나님의 예정: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변치 않는 섭리로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하나님의 예정은 믿음을 가질 사람을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를 선택하셨다.

이 교리를 믿는 이유로 서경말씀, 요한복음 3 36절을 인용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그 위에 머물러있느니라"

(2). 온 세계적인 속죄: 세상의 구주로 오신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셨고, 그의 은혜는 모든 인간들에게 베풀어졌다.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만 인류를 구원하시기에 충분하며 성부(聖父) 하나님께서는 만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사람은 구원을 거절하는 사람이며 그리스도를 받아드리는 믿음만이 구원을 받게된다.

이 교리를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은 요한복음 3 16절과 요한일서 2 2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거듭나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 인간은 완전히 타락했기 때문에 선을 이룰 수 없고 구원에 이를 수 없으나, 믿고 거듭남으로서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구원에 이른다.

인용한 성경말씀은 요한복음 15 5절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4). 사람이 거절할 수 있는 은혜: 은혜라는 것은 영적인 생활의 시작과, 계속하는 것과, 또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죄를 범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러나 이 은혜는 사람이 거절하여 받지 않을 수 있다.

인용한 성경구절은 사도행전 7장 전체를 들고 있습니다. 7 51절은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割禮)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5). 한번 받은 구원을 상실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지켜 고난과 시험을 이겨 나가기에 충분하고 흡족하지만, 이 은혜를 상실하지 못한다는 성경구절을 찾을 수가 없다.

이에 대한 인용(引用) 성경구절이 없음.

3. 하나밖에 없는 진리

이상의 교리는 성경구절을 인용하였고, 그 성경구절들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구원에 이르도록 노력하라고 하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 나가면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이 서로 상반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가령 "부모를 공경하라"( 6:1)고 하였고, "부모를 버리라"( 10:29)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 하였고, "믿음을 얻어라"고 하였습니다. 구하면 주시겠다고 하셨고 구하여도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가지의 진리를 성경에 기록해 두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중 한가지 기록이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어느 한가지의 말씀을 없는 것처럼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말씀이 숨겨져 있다고 하셨고,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보화가 숨겨진 밭을 산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13:44). 다 팔아서 사는 과정이 사람의 가르침과 생각을 다 져버리고 성경말씀만을 의지하는 일입니다. 성경말씀 만을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권위(絶對權威)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반되는 성경구절을 발견할 때 양() 구절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하나님께서 왜 두 구절을 다 성경구절로 두셨는가를 찾아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알미니안교리가 인용한 성경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4. "아들을 믿는 자"

요한복음 3 36절에서 "아들을 믿는 자"가 누구냐에 대하여 잘못 깨닫는 것이 문제점이며, 알미니안은 "내가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합니다. 성경은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하여 수없이 많은 구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3:11-12)

이 구절은 성경 기록에도 의인(義人)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많은 의인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가령 노아는 의인으로( 6:9, 7:1)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지 않는가?"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성경을 공부할 때 그 의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값없이 안겨주신 것을( 6:8) 알게되며, ""는 바로 구원임을(벧후 2:5) 알게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의인"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고 값없이 주신 것임을 알게됩니다. "믿는 자" "의인"과 동의어(同意語)이며, "구원을 받은 자"의 동의어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저 안겨 주신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하신 말씀으로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영혼이 죽어 있음을( 33:19) 가르치며, 믿는 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영이 새로 나는 것입니다. 나지도 않은 영이 어떻게 진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영이 죽어있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 과정의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신 후에 그의 믿음을 우리에게 안겨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인간이 거듭나게 된다"는 교리는 거짓의 아버지인 사단의 교리이며 구원을 부인하는 교리입니다. 사단의 교리는 인본주의(人本主義)의 교리이며, 하나님을 믿는 다기보다는 자신을 믿는 교리입니다. 사단을 가리켜 이사야 14 13절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믿음은 내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살리시고 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는 "내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으니 구원을 주시요"라고 하는 것과 다른 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한을 인간도 나누어 가져보겠다는 주장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교리는 신본주의(神本主義)의 교리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있음을 믿는 교리입니다.

5.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

다음 성경구절은 아주 널리 알려진 요한복음 3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하신 말씀이 만 인류를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만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알미니안은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두 가지 논리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오류(誤謬)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代贖) 하셨으니 세상에는 지옥에 갈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말한다는 것이며,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극소수(極少數)의 백성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지옥에 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죗값으로 모든 인간이 그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2:17). 이러한 오류 때문에 또 다른 사단의 교리가 나옵니다. 그 교리는 곧 "만 인류의 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 사()하셨지만 믿지 않는 죄 때문에 지옥에 간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 없는 죄까지 합하여 모든 죄를 사 하셨음을 가르칩니다( 6:7, 요일 1:9, 2:13)

다음 구절에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 마다"에서 누구든지에 대한 성경 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택하신 백성은 누구나 다"라는 뜻이며,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3 36절에서 공부한 바가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믿는 자)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외에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께서 솔직하게 '내가 택한 백성은 누구나 다'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하는 반문을 할 것입니다. 그것의 해답은 두 가지 사실로서 설명이 됩니다. 첫째로는 하나님께서 세상(피조물)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며, 그 사랑은 본래 천지창조를 마치셨을 때 말씀 하셨습니다( 1:21,31). 그러나 완전히 멸망 받아야 할 피조물 중에서 조금 남겨서 하나님 창조의 상속자로 삼으신다는( 3:13)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 구절에서는 구원을 가리키며, 사단의 가르침은 인간이 노력하여 하나님을 믿을 때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 다음 성경구절, 요한일서 2 2절에도 "우리만 위할 뿐 안이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이해도 위에서 공부한 것과 동일하며,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시절의 신자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온 세상"은 역사상 하나님께서 흩어 놓으신 모든 믿는 자들을 말합니다.

6. 포도나무의 가지

다음으로 세 번째 자유의지의 교리가 인용한 성경구절은 요한복음 15 5절입니다. 이 포도나무의 비유는 자유의지의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저가 내 안에 있으면" 하신 말씀을 "내가 노력하면" 혹은 "신자가 선한 행실을 계속하면"으로 이해 합니다마는 그럴 수 가 없습니다. 포도나무의 비유는 그 비유 자체가 그리스도와 거듭난 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의 비유이며,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라고 상호관계를 말씀하신 것은, "내가(그리스도) 그 관계를 만들었다"는 선언이며, "네가 잘 해야만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는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포도나무의 가지가 어떻게 잘 해서 과일을 맺겠습니까?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하신 말씀이 이것을 잘 설명합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잘라 불에 던진다"고 하신 말씀이 마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하신 것처럼 들립니다마는 그럴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의 바른 이해는 열매에 대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한 씨, 그리스도께 속하여 성장한 복음의 열매를 말합니다. 무지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가지고 나오는 선지자들에게 "거짓 예언을 하도다"( 14:14)라고 하셨으며, 거짓선지자들에게서 복음의 열매가 맺어질 수 없음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복음의 열매를 자유의지에서 기대하십니까?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복음은 열매가 없을 때 불에 던지움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유의지 교리가 인용한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이 순교를 당할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외친 설교의 내용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지 않은 자"들로 지적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아니하며,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다"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는지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의 구원은 유일한 경우가 아닙니다. 거듭나기 전에 우리도 사람의 생각 되로 다 살고 있었음을 상징합니다. 택하신 그릇(구원받은 자)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거듭나게 된 사람입니다. 여러분께서 아직도 인간에게 믿음을 선택할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이 잘못임을 깨닫고, 바울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구원해 주실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 권위냐 인간의 자유의지냐?를 두고 알미니안의 5개 조항과 칼빈주의의 5개 조항이 맞서고 있습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의 대결입니다.

7. 하나님의 절대 권한과 인간의 자유의지

소위 기독교인들의 간증을 들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자연의 법칙을 세우셨으며, 또 천지만물을 주관하시고 운영하심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찾아야할 하나님은 그 이상의 뜻이 있으며, 그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입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115:3)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 하셨도다"( 135:6)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居民)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4:35)

성경의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시고 자기를 기쁘게 하시는 일을 지금까지 인간의 도움 없이 하셨고, 또 앞으로 자기가 계획하신 일을 자기가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대로 인간의 도움 없이 시행하실 것을 이상의 성경구절에서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과 상식을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묵상과 명상으로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생각은 결과적으로 인간을 감정의 노예로 만들게 되며, 인간철학으로 하나님을 정의하려는 노력은 지성(知性)이라는 거짓말쟁이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며(딤후 3:16), 한마디의 성경 구절도 우리는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운영하시는 절대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음성을 듣는 순간입니다. 왕국에서 신하들이 대왕(大王) 앞에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지 못하는 장면을 가끔 영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엄(威嚴)은 역사상 어떠한 왕 보다 큽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9장에 토기장의 비유로서 하나님의 절대적 권한을 가르칩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詰問)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

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9:19-21)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과정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듣는 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권한을 부정하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사람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을 말씀을 가지고 증명해 보려고 합니다. 사람들 귀에 긍정이 가는 얘기라 할지라도 성경이 이것을 뒷받침 하지 못할 때 진리가 아니며, 진리가 아닐 때 그 가르침은 인간을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성경을 해석하기에 달렸다"는 구실로 성경말씀을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이것을 부정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인도하시리라"( 3:5-6)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시기를 기뻐 하셨도다"(고전 1:20-21)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믿음은 사람의 "명철을 의지하는"것이며 "세상의 지혜"를 믿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인간이 육감으로 배울 수 있는 당연한 사실이며, 상식입니다 마는, 그것이 성경이 지적하는 지혜가 아니며, 하나님은 그것을 "미련한 것"으로 정의하십니다. 동시에 위의 구절들은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인간의 상식과 세상의 학문과 구별하여야 함을 가르칩니다.

"세상을 사단이 지배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내용을 다니엘서 4장을 공부하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단이라고 말할 때 세상의 악을 생각합니다 마는, 악의 요소인 사단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할 때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럴듯한 선한 일들을 어떻게 사단이 다스려서 되는 일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가령 장마와 기근으로 고생하는 국민들을 살리기 위하여 인력과 물자를 보내는 것이 사단이 하는 것이겠는가? 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인간의 선한 마음을 볼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아름다운 부분을 아직도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마는, 그러한 인간의 선이 하나님을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인도주의가 쉽게 인간을 인본주의로 만들게 합니다. 세상은 바야흐로 하나님 없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찬란한 21세기에 큰 기대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세상 기독교인의 90% 이상이 알미니안주의의 신앙을 가졌다고 할 때 그 신앙이 바로 인본주의의 신앙임을 알게됩니다. 이 인본주의는 바로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한국 고유의 종교와 일치된 신앙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믿는 것을 끝까지 믿고 구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신앙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을 인간의 욕심을 만족하기 위하여 잘못 이해하는 신앙입니다. 역대에 이름 있는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금식기도 한 끝에 무엇 무엇을 얻었다"는 경험담이 수다하게 설교와 서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도록 가르치신 것은 "생선"이며 ""이 아닌 것을 마태복음 7 7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생선은 구원을 상징하며 뱀은 멸망을 상징합니다.

이번 글의 제목을 지난번 편지의 것으로 계속했습니다. 감리교인이 다 알미니안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 왜슬레와 함께 일하던 와이트휠드(Whitefield)는 알미니안교리를 부인하였고, 지금도 각처의 와이트휠드와 같은 감리교의 교역자를 보게됩니다. 다음 편지에는 알미니안주의의 영향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대우 드림, 1997 8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