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지 못한 생각(장로교 교리를 공부하면서)

1. 위대한 작품

장로교의 교리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信仰告白)은 위대한 작품(作品)입니다. 1647년에 출판된 후 많은 신자들에게 바른 신앙의 길을 가르쳐준 길잡이 이기도 합니다. 많은 교회가 주일 예배 시에 이 신앙고백의 구절들을 낭독하며, 자녀들에게 시시로 암송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작(大作)에 대하여 감상하고, 찬양하고, 그리고 배울 따름입니다. 문학 평론가들이 작품을 읽고 비평을 합니다마는, 문학의 대작을 읽을 때는 비평보다는 그 글에서 인생의 뜻을 음미하고, 저자의 의도를 찬양하고, 얘기의 줄거리를 철학화(哲學化)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로교의 교리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경구절을 일일이 지적하면서 우리가 믿어야할 일과, 삶에서 지켜야 할 일을 잘 열거(列擧)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경이 있는데 신앙고백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하며 교회의 교리를 배척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말하자면, 아는 척 하는 사람이며, 오묘 막심(奧妙 莫甚)한 성경의 깊이를 아직도 체험치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창조 이전에 자기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역사(役事)하신다는 은혜의 복음을 믿을 때 세상사(世上事)가 다 하나님의 인간을 위한 구원계획의 일부임을 믿게됩니다. 더욱이나 올바른 신앙 간증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인 잃은 양을 찾는데 쓰신다는 확신이 올 때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중요한 책으로 믿게됩니다. 하나님께서 선진(先進)들에게 성경을 이해하는 지혜를 허락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그들이 남긴 기록을 우리가 지금 읽을 수 있게 보전한 문화문명에 대하여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가지 유의 할 것은 성경을 중심으로 쓴 작품을 대할 때는, 그 작품이 유명하고 찬사를 받는 처지라 할지라도, 그 글이 얼마나 충실하게 성경말씀을 상고하면서 씌어졌는가를 찾아내야 합니다.

모든 인간들의 작품은 시대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저자들의 제한된 사고와 경험을 기록으로 제시한 것 뿐입니다. 이 점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다른 점입니다. 성경이 시대를 배경으로 쓴 역사적인 사실이라 할지라도 모든 시대에 사는 인간들에게 주신 것이며, 지금 내가 읽을 때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전해주는 산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구절의 말씀 중에는 읽는 사람과, 그 때에 따라서 전파되는 진리가 따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인간에게 예민한 육감(肉感)과 지혜를 마음에 넘치도록 주신다고 할 지라도 유한(有限)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오늘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지적한 성경구절 중에서 몇 가지를 들어 공부하면서, 선진들이 미처 미치지 못한 생각들을 살펴보겠습니다.

a. 대작의 배경

작품이 대작 일 때는 반듯이 그 배경에 위대한 사건들이 그 작품의 터전이 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공회(Assembly) 1643 7월에 시작했지만, 그 공회의 배경은 마틴 루터가 95개 조항(條項)을 게시(揭示)한 종교개혁이 시작된 서기 1517년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부패한 로마 카톨릭교회에 대항하는 역사(役事)였지만, 그 근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이 성경을 중심으로 얼 - 1 -

마나 노력하였는가의 기록이 바로 신앙고백이라고 믿게됩니다.

웨스트민스터 공회가 시작한지 4년 만인 1647 8월에 신앙고백이 발간되었습니다. 쉽게 본다면, 4년이 걸쳐 신앙고백이 완성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영문으로 된 신앙고백이니 영국, 스코틀랜드(Scotland), 그리고 아일랜드(Ireland) 사람들의 신앙고백이라고 단정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존 칼빈(John Calvin)이며, 그를 중심으로 한 목숨을 아끼지 않은 개혁자(改革者)들의 백(百여)년이 넘어 된 결정(結晶)이라고 보아야 될 것입니다. 또한 중세(中世)의 정치 체제와, 카톨릭 교황(敎皇)의 정치적 권력을 이해하는 것도 이 신앙고백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신앙고백의 역사적인 배경을 읽을 때 우리는 심히 부끄럽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삶이 너무도 안이(安易)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안이해지면 더 이상 하나님의 참 진리를 찾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에 피를 흘려가며, 목숨을 걸고 반대세력(교황, 군주[君主]들과, []개혁주의 신앙)과 대항하던 신실한 신앙을 가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대로 다 살아지고 말았는지 구라파(歐羅巴)에는 그 흔적이 없습니다. 구라파 인들은 여러모로 부()하게 잘 사는 모양입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b. 영국 왕조(王朝)

신앙고백을 만들어 낸 웨스트민스터 공회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을 소개합니다.

영국 왕 Henry III세는 1534년에 자신이 영국 교회(Church of England)의 두목이라고 선언함으로 교황과 정치적인 대결을 하면서 개혁활동도 저지했으며, Edward VI(1547-53)때에 개혁활동이 본격적으로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위를 이은 여왕(女王) Mary(1553-58)는 카톨릭 교리와 교황의 권세를 영국에서 회복하도록 노력함으로 개혁활동을 철저하게 저지했으며, 200명 이상의 개혁 교역자들과 학자들을 화형(火刑)에 처했고, 남은 자들은 해외로 탈출하게 만들고, 결국 Mary는 많은 개혁자들의 원한을 받고 죽었습니다. 그의 후계자인 여왕 Elizabeth(1558-1603)는 국법으로 개혁주의자들의 활동을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후계자인 James(1603-25) Charles I(1625-49)는 왕의 권한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교회 위에 있다는 것을 주장함으로 내란(內亂)을 일으켰고, 결국 국민들의 손으로 교수(絞首)되었습니다.

인접 국가이던 스코틀랜드(Scotland)에서는 정부와 교회가 다 불안정(不安定)할 때에 John Knox (15505-72)를 중심으로 하여 개혁활동이 부단하게 계속되었으며, 1560년의 스카치(Scotch) 신앙고백의 초안(草案)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의 기록은 군주제도와 교황제도와의 대결(對決)과 투쟁의 역사이지만 개혁활동에는 보다 더 큰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화란(Holland)에서 시작된 Arminianism입니다. 우리가 사는 20세기 후반의 교회가 군주제도와, 교황제도와는 더 이상 투쟁할 필요가 없게 되었지만 Arminianism과는 그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고 단정됩니다. 시간을 내어서 Arminianism이 무엇인지 공부할 예정입니다.

역사적인 고찰을 마감하기 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서명(署名)한 공회 회원에 대하여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공회는 영국 의회가 인준(認准)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신앙고백을 편집한 공회(公會) 회원의 명단은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과 목회자들인 151명으로 되어 있으며, 공회 회원을 Divines(성직자)로 칭하고, 그 수가 121명입니다. 나머지 30명은 각 교단의 대표와 스코틀랜드에서 파견된 선거권이 없는 회원이었습니다. 121명 회원 중의 4명이 스코틀랜드 사람이었다는 것은 스코틀랜드가 영국과 동일(同一)하게 개혁활동을 - 2 -

했다는 증명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가지 더 첨가 하고싶은 역사적인 사실은, 마딘 루터가 개혁활동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사람이지만, 순수한 개혁활동에 상당한 지장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든다면 성찬식에서 먹는 떡과 포도즙이 예수님의 살과 피이며, 직접 우리의 살과 피가 된다는 주장이나, 교회의 예배형식이 성경이 금지하지 않는 한 카톨릭 교회의 예전(禮典)을 그대로 지키자는 고집 등입니다.

그 다음으로 신앙고백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2. 신앙 고백은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여 된 결정

신앙 고백은 33장으로 되어 있으며, 제 일장에서 성경에 대하여 제일 처음으로 다루고 있는 점이 다른 신앙고백과 다른 점입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공회가 심중을 기우려 자신들의 거사(擧事)를 살펴본 결과이며, 그들의 신앙고백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성경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임을 시인하고 분명히 하지 않고서는 자신들이 믿고 하는 일의 근거가 없다는 간증입니다. 성경을 믿지 않을 때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는 사람의 생각을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 능력도 동시에 주신다는 고백입니다.

그 다음의 4장은 하나님에 대한 성경말씀을 이해하는 고백이며, 여기에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며, 그의 본성과 계명과, 창조와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말한 다음, 인간의 타락을 제 6장에서 고백하였고, 계속하여 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중재자(仲裁者)이신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과정을 18장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19장과 20장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이해를 고백한 것이며, 21장에서 시작하여 제 31장까지(다음 11 )는 성경이 말씀하는 교회에서 일어나고 지켜야 할 모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고백의 마지막 두 장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공회가 작성한 신앙고백을 성경말씀으로 증명하도록 영국의회(議會: Parliament)가 요구하였기 때문에 신앙고백의 각 조항마다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설명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신앙고백을 영국의회에 1647 4월에 제출했지만 의회의 까다로운 간섭 때문에 1660 3월에 비로써 의회의 인준을 받고, 마침내 영국 교회(Church of England)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였습니다. 한편 스코틀랜드와 미국에서는 1658년에 이 신앙고백을 영국의 국교가 아닌 교파들의 교리로서 독립교회들이 채택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대() 신앙문답과 소() 신앙문답의 부록(附錄)이 편집되었고, 영국의회의 인준을 받았습니다.

이상과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겪어온 역경(逆境)을 되살펴 본다면, 군주정권 하에서 생명을 걸고 여러 해 동안을 계속하여 노력해 온 결정(結晶)이기 때문에 흠이 없는 올바른 신앙의 고백이며, 또 당대에 살아있던 모든 이름 있는 성경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공동으로 만들어 낸 작품이라고 알게될 때 더 이상 흠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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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떠한 인간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게 되는 것은 첫째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며, 또한 필요한 때가 돼야만 이해를 주시는 것을 성경을 공부함으로써 알게됩니다. 인간의 작품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중에서 성경말씀을 잘못 이해한 몇 구절을 공부해 보겠습니다.

3. 천국에서 받을 상

제일 처음으로 생각해 보는 곳이 제 16 "선한 일:of Good Work"입니다. 16장은 일곱 절로 나누어서 기록되었으며, 제 일절은 선한 일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지 사람의 생각으로 맹목적으로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2절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살아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의 증거이며, 3-4절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에 계시여 일하시며 그 경험 이야말로 인간생활에서 가장 큰 소망을 갖게 하는 것임을 말하였습니다. 5절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우리의 선한 일 때문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고, 6절에는 선행(善行)에 대한 상금을 말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한 목사님을 맛난 적이 있습니다. 약 반년동안을 그 교회에 다녔습니다.

이 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예배 순서에서 빼지 않고 교독하며 주일학교의 교재(敎材)로도 이 신앙고백을 사용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저를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목자 노릇을 하는 교역자들은 천국에 가서 평신도 보다 더 큰 상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사람의 생각대로 한다면 당연한 얘기가 되겠습니다. 어떤 회사의 사원으로 일하면서 큰 일을 잘 할 때 다른 사람보다 월급도 많이 받게되고, 상급을 또 받게되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상은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뜻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일반 교회에서도 유명한 목사가 되면 하나님의 큰상을 받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속해있는 교회의 목사님에게 "당신은 어떠한 상을 받을 것입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누가복음 17 10절을 읽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 뿐이라 할지니라"

이 구절은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더욱이나 제자들이 나무를 바다에 옮겨 심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양을 치는 전도사역을 하다가 돌아 왔을 때 아무도 그들을 영접할 사람들이 없을 것을 미리 예언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a. 달란트의 비유

믿는 자들이 특별하고, 더 큰 상을 받기 원하고 기대하는 것은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에 대한 비유를 충분히 음미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저자들이 마태복음 25장을 이해치 못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상을 생각하는 - 4 -

독자들의 오해라고 하겠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본문을 읽기 전에 몇 가지 밝혀야될 일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달란트를 말 할 때는 대개의 경우 금화(金貨)를 말하며, 그 액수가 엄청나게 큽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2000년 전에 사용하던 통화 1달란트는 지금의 불화 $5,760,000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달란트를 "하나님께서 주신 재주"라던가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등의 해석은 부당(不當)하며, 가장 적합한 해석은 우리가 받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복음은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값지고 위대합니다. 이것을 장사하는 사람은 이 복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며, 장사의 판로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는 사람들은 사람의 생각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며, 인간의 상식과 이치로서 그럴 뜻 하지만 결국은 땅으로 돌아가는 일들입니다. 그 다음으로 곱이 남도록 장사한 사람이 고을을 다스리는 임무를 받는 일 입니다( 19:11-19). 이러한 임무는 결코 상급이 아니며 감당 하여야할 직무입니다. 마치 한 나라 정부에 여러 가지 부서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정부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그 능력을 사람의 지혜와 경험을 가지고 판정을 합니다 마는, 천국에 가서 고을을 다스리는 능력은 사람이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받을 이러한 상은 구원받는 사람들이 누구나 다 받게될 생명의 면류관을 이해할 때 더욱 분명해 집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인간이 지옥에서 영원히 받을 불의 형벌을 면하고 은혜로 되는 상입니다. 이 상은 너무도 커서, 비단 고을을 다스리는 것이 상이라고 치더라도, 그 상의 비교는 바다 물과 한 동이에 담긴 물을 비교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선을 행하십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시며 고난을 받으십니까? 그것에 대한 상을 여러분은 지금 받고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슴속에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을 주시기로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역대에 살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화형(火刑)을 받으면서도 기뻐하며 죽었습니다. 그들 눈앞에는 생명의 면류관이 분명하게 보였든 때문이었습니다.

4. 새 안식일

그 다음 생각을 멈추게 하는 것은 제 21장의 "예배와 안식일"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다른 신앙고백과 다름없이 "일요일" "주일(主日)"이라고 불렀으며, 일요일이 새 인식일 이라는 고백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성경에 예수님께서 일요일 아침에 승천하신 사실과, 제자들이 일요일마다 모여서 예배를 보며 떡을 땐 기록만 가지고도 예배일을 일요일로 정한 것이 의심할 바 없이 기독교의 예배일이 됨을 누구나 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욕심 같아서는 성경학자들이나 기독교의 교역자들이 "일요일" "새 안식일"로 칭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희랍어의 안식일은 히브리어에 그 어원(語原)이 있으며, 안식일을 "안식일 후 첫날"이라든가 "()의 첫날(The first day of week)"이라고 번역한 이유를 알 도리가 없습니다. 희랍어 성경의 각 절의 단어의 뜻을 직역(直譯) Interlinear Bible에서는 마태복음 28 1절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새 안식일들의 첫 번째 안식일 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 The sabbath having ended, at the dawning of the first of the Sabbaths, Mary Magdalene and ---" - 5 -

구절을 바로 이해한다면,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시던 토요일이 옛 안식일의 마지막 안식일 날 이며, 앞으로 계속하여 있을 새 안식일의 첫 번째 안식일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에게---"로 됩니다. 새 안식일(일요일) "안식일 첫날" 혹은 "()의 첫날" 등으로 잘못 번역된 곳은 마태복음 28 1, 마가복음 16 2, 누가복음 24 1, 요한복음 20 1, 19, 사도행전 20 7, 그리고 고린도전서 16 2절 등입니다.

5.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믿는 자들, 미치지 못한 생각 (이혼)

24장의 결혼과 이혼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저자들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믿는 자들"의 입장을 잊어버리고 쓴 신앙고백입니다. 배우자가 행음한 일이 있을 때 이혼할 수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엄청나게 잘못된 신앙고백이며, 이 신앙고백은 마태복음 19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성경은 영의 책이며, 모든 말씀이 비유로 씌어졌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13:34) 미쳐 생각지 못한 결과라고도 믿어집니다. 성경의 어느 구절이 역사(歷史)의 기록이라 할지라도 역사로 기록된 사건이 어떠한 영적인 비유인가를 찾는 것이 성경을 배우는데 필수적인 방법입니다. 가령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아와서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든 역사적인 기록을 단순한 역사로 읽고 만다면 성경이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지키던 유월절이 유대인들의 행사로만 이해한다면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겠습니까?

특히 여인에 대한 기록을 성경에서 읽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택하심을 받은 믿는 자들의 관계를 배우게 됩니다. 가령 여리고에 살던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준 일로 여리고가 망할 때 구원을 받은 역사적인 얘기는 우리가 구원받는 과정을 설명하는 놀라운 비유입니다. 라합이 기생 이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이며,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로 볼 때 인간은 하나님 앞에 행음 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3:1, 9:1). 또한 그 뜻은 본래는 인간이 하나님의 동반자 였으나, 불순종함으로 그 특권을 상실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한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셨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을 성경은 누차에 걸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내로 지적하였고, 이 아내 된 이스라엘의 행음에 대하여 수 없이 기록하셨습니다. 이 행음 하는 아내를 이혼 할 수 있는 법을 이스라엘 민법(民法)으로 제정하시고 시행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이 이스라엘 법의 깊은 영적인 뜻은 이방인이던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게된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설명합니다.

a. 이혼한 아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민(選民)으로 택하여야 하였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그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또 다른 이유는 전혀 살 소망 없는 멸망 받을 인간 중에서 몇 사람을 택하셨다는 분명한 언약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너무나 잘 알려진 얘기들입니다. 광야에서 40년 사는 동안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평만 하다가 갈랩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는 다 광야에서 멸망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던 1,400년간의 이스라엘은 밤낮없이 행음 한 기록입니다. 마침내는 인간의 유일한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게 한 것이 이스라엘이 아닙니까? 이 이스라엘을 버리고(이혼하고) 새 아내를 맞아들인 그때가 바로 그리 - 6 -

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가 아닙니까?

이상과 같은 이혼법의 배경을 염두에 둘 때 마태복음 19장의 말씀을 바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19:3-5)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지금 믿는 사람들간에 갑자기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질문입니다. 신앙고백을 출간하던 때에는 믿는 자들이 이혼한다는 일은 꿈에도 생각 못하던 때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이혼을 해도 손가락질을 받던 때 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혼하고 사는 세상이 되었으니 세상이 가는 길로 간다면 이혼 할 수 있는 이유가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질문을 예수님께 하는 경우 우리가 받을 답변은 바리새인들에게 주시든 동일(同一)한 답변이며, 그 답변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직후 만들어 두신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2:24).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고 하신 것은 결혼은 한번 하면 그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죽는 날 까지 이혼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계명임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의 대화가 다음과 같이 전개됩니다.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19:7)

지금도 이와 같은 질문을 예수님께 하는 사람이 허다 할 것입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있을 법도 한 질문이겠지만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받는 것을 믿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질문입니다. 구약시대의 법으로는, 부정한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주어 이혼을 했으며, "부정한 아내"는 월경을 하는 아내이며, 때로는 병으로 신음하는 아내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22:10, 15:14, 18:19).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의 법을 악용하여 이혼하는 구실을 삼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답변에 대하여 각별한 유의가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 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19:8-9)

예수님께서 이혼의 법이 "마음이 완악함을 인하여"라고 한 것은 완악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음을 가리키며,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하신 것은 모세를 통하여 준 법을 분(忿)히 여기신 것이며, 본래의 법을 우리는 지켜야 함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준 법은 이방인이던 우리에게 크고 놀라운 은혜가 된 - 7 -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내로 맞았든 이스라엘을 내어버리고( 50:1, 24:1-4), 이방인인 우리를 영원히 함께 살 신부로 영접하신 것입니다. 만일 모세를 통하여 준 이혼의 법이 아직도 우리에게 적용이 된다면 우리처럼 가련한 사람들이 없을 것입니다. 비단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매일같이 행음 하는(범죄 하는) 우리를 끝까지 참으시고 신부의 자격을 갖추도록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신부로 맞으시는 언약은 영원한 것이며, 세상의 어떠한 일도 이 계약을 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면서 혼인 잔치를 기다릴 뿐입니다.

사회의 이혼율이 점점 늘어가는 것에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이혼을 허락하는 일이 생긴 것은 한탄할 일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믿어온 교회가 한탄하며 회개하여야 할 일입니다.

6. 사람이 죽는 날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얘기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 32장에 "사람이 죽은 후의 상태"라는 제목의 신앙 간증입니다.

이 장의 간증은 누가복음 16장의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말한 신앙간증입니다. 이 장에서 "악한 자들은 죽을 때 지옥에 던지움을 받고"라고 간증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 이전에, 믿는 자들이 험한 세상에 산다 할지라도 인간의 삶이 그들에게는 천국이며,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지옥임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이러한 지옥과 천국은 인간의 영혼이 경험하는 상태를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사람이 죽어서 그 영혼이 즉시로 천국의 그리스도 곁으로 가는 것은 분명합니다마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죽으면 그들의 영혼은 심판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기다리는 곳을 "적막한데"( 115:17)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지옥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마지막 심판이 끝난 다음에 가는 곳입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는 상징입니다.

부자와 거지는 실제적인 부자와 거지가 될 수도 있겠으니, 영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5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바로 거지입니다. 나사로는 믿는 자들의 상징이며, 부자는 모든 소망이 땅에만 있는 믿지 않는 자들을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상징하였고, 음부는 장래에 있을 지옥입니다. 이 비유를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으로 실제화 할 수 없는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세상을 심판하실 날을 기준으로 성경은 너무도 명백히 명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공부를 마감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또 있습니다. 이 훌륭한 신앙고백을 모든 장로교회가 다 액면 그대로 받아 드린 것은 아닙니다. 여러 교파들이 이 신앙고백을 수정하여 인간의 생각으로 편리하게 내용을 편집한 기록이 허다합니다. 그런가하면 이 훌륭한 신앙고백을 교리로 삼으면서도 엉뚱한 것을 믿고 가르치는 장로교회도 있습니다. 오늘은 이만 드리고 다음 편지에는 감리교의 교리와 Arminianism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이대우 드림, 1997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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