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3장, 짐승의 표 666(VII)

요한계시록 13장 8절: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생명책: 생명책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봅니다. "책"이라고 할 때 우리는 "종이에 색인 글"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마는 천국에서 종이로 엮은 책을 우리가 어떻게 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완전하시니 모든 기록을 종이에 아니하실지라도, 그보다도 더 정확하게 기록해 두실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는 창세후 자기의 백성이 구원 받을 때마다 잊지 않고 기억하심을 가르칩니다. 반면에 계시록 3장 5절이나 시편 69장 28절에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blot out:塗抹)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생명책에서 제거(除去)됨을 말하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으로 영원히 천국에 남아 있을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이 언제 제명을 받겠습니까? 그들이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백성임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이 구절에서 유의(留意)할 것은, 녹명되지 못한 자들은 이 땅에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순간 하늘의 백성이 되어 하늘에서 살게 됨을(엡 2:6) 잊을 수 없습니다. 생명책에 대하여는 다시 요한계시록 20장에 기록이 되어 있으며, 어떠한 입장으로 기록이 되었든간에 한 생명책을 말하며, 또 다른 책은 멸망을 받을 인간들의 모든 행위가 기록되어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생명책의 교훈은,

1.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기억하신다는 사실과,

2. 구원을 받지 못한 인간들의 모든 행위를 심판 때에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짐승에게 경배"는 짐승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을 말하며, 물론 인간은 모두가 다 사단을 섬기고 있음을 성경은 가르치며, 구원을 받는 순간 그 이상 사단에게 매어 있지 않음을 또한 가르칩니다.

9-10절: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에 있느니라"

귀 있는 자: "귀 있는 자"에 대하여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일곱 교회에게 경고하신 다음에 반드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신 것과 일치됩니다. "귀"는 영의 귀를 말씀하신 것이며,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야만 비로소 이 "귀"를 얻게 되는 것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인간은 다 육(肉)의 속성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남으로 영의 사람이 됩니다.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고 하셨고, 곧 이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고 하심으로써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결코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음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영의 귀가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지 분간하지는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내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인가를 점검할 수 있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어떤 다른 사람의 영의 귀를 분간하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경고는 결코 아니며, 내 귀가 열려서 말세에 있을 사단의 거짓말을 분간하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경고가 아니겠습니까? 말세에 있을 징조에 대한 한 구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私慾)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虛誕)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3-4)

이 구절이야말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신 말씀의 반복이며, 세상에 떠돌고 있는 "짐승의 표", "단일정부(單一政府) 새 세계질서(世界秩序)", "천년왕국" 등등을 지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기의 사욕을 쫓을"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육신을 중심으로 한 모든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민을 한결 같이 사랑하신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무시해버리는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10절의 말씀은 말세에 사단이 잠깐 무저갱(無底坑)에서 놓인 기간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기 백성에게 인내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기간에 두 증인(하나님의 백성)이 죽임을 당하고 거리에 내버려둠을 당한다고 하셨습니다(계 11:8). 이 때에 죽음은 우리의 육신이 죽는 것이 아니며, "회당에서 출회을 당함"(요 16:2)이며, 우리가 얻는 참 진리가 교회나 기독교인들간에 전혀 구실을 못하는 때입니다.

칼: 이 구절에서 말하는 "칼"은 로마서 13장 1-7절에서 말하는바 세상의 권력을 말하며, 4절에는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라고 함으로써 민간정부가 참 믿는 자들을 마음대로 핍박하고 다스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칼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잡히시던 밤, 제자들에게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고 하셨습니다(눅 22:36). 그것은 예언된대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기 위하여 내어줌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심으로, 세상의 권세가 잠깐동안 제자들을 주관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53절에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라고 하신 것은, 요한계시록 13장 10절에서 말하는 칼과 같이, 시기를 맞추어 일어나는 세상 권세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이 가르치는 것은 사단이 마지막으로 칼에 죽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성도의 인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며, 이것이 마지막 때에 가서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신앙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1절: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두 뿔: "또 다른 짐승"은 사람의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별다른 짐승이 아니며, 역대(歷代)로 등장하는 사단의 역사(役事)를 말합니다. "뿔"이 권력을 상징함을 성경에서 배웠고, 그 짐승의 뿔의 수가 10, 4, 3, 2로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사단의 뿔에 대하여는 다니엘서 7장과 8장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가 힘든다고 믿어집니다. 짐승의 뿔의 수가 역사상에 존재하던 실제적인 국가의 수로 이해하려 할 때, 그 결과를 성경 말씀으로 뒷받침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 한 뿔이 어느 나라임을 지적한 적도 있기는 합니다. 그 예는 다니엘서 8정 21절에 "헬라 왕(King of Grecia)이요"라고 하여 그 한 뿔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헬라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유대 왕"과 대조가 되는,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사단의 사역"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헬라"가 신약 성경에서 온 세상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2:10).

뿔의 수 10은 사단의 통치가 창세 후에 시작하여,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를 지적합니다.

짐승의 네(4) 뿔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사단의 권세입니다. 많은 무리들이 앞으로 올 단일정부의 질서(one world order)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창세후 지금까지 단일정부를 가지고 있으며, 말하자면 모든 실제적인 국가들이 사단의 녹을 먹고 정치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되겠지만 사람의 권모술책(權謀術策)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사단의 녹을 먹는 것이며, 권모술책이 지나칠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여 사단의 진로(進路)를 차단하심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숫자 3은 하나님의 뜻을 가리키며, 뿔 셋은 사단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따라 이루어짐을 지적합니다. 치열한 사단의 공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며, 구원 계획의 일부이며, 이 기회에 얻는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10절)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그리스도인의 명분(名分)이 될 것입니다.

사단의 두 뿔은 무엇이겠습니다. 이 두 뿔의 이해는 다니엘서 7-8장을 공부함으로써 분명해 질 것입니다. 그러나 숫자 2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사실만 가지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단이 영원히 지옥에 갈 직전에, 사람을 다스리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두 증인이 죽음을 당하게 하는 바로 그 사단의 뿔(권세)입니다. 이 뿔은 마지막 대환란을 지적합니다.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용이 반드시 잠깐 놓으리라"(계 20:3)고 한 말과 같습니다. 용이 무저갱에서 놓이게 되는 마지막 환난 기간입니다.

"새끼 양 같은 두 뿔"은 어린양 그리스도의 권능을 닮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이 사단의 권세가 새 시대의 통일정부가 아니며, 짐승의 표 666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범 종교단체를 만들기에 성공한 카톨릭 세력도 아닙니다. 이러한 세력들은 그리스도의 권력과 비슷한 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말세에 대한 성경 구절들이 증명합니다. 이 때의 사단의 활동을 다음 구절이 설명합니다.

"이 네 나라 마지막 때에 패역자(悖逆者)들이 가득할 즈음에 한 왕이 일어나리니 그 얼굴은 엄장하며 궤휼(詭譎)에 능하며 그 권세가 강할 것이나 자기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그가 장차 비상하게 파괴를 행하고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며 강한 자들과 거룩한 백성을 멸하리라"(단 8:23-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表蹟)과 기사(奇事)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deceive)하게 하리라"(마 24:24)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deceive)하지 말라 먼저 배도(背道)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不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對敵)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自尊)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 2:3-4)

패역자들: 위에는 세 구절만 적어 보았습니다마는 성경에는 말세의 현상이 무수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의 기록은 한 사람에 대한 얘기를 다른 세 각도로 쓴 것이며, 그 한 사람은 사단입니다. 그 사단의 행동은 반드시 인간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그 사단을 다니엘 8장에서 "왕"으로 불렀고, 데살로니가후서 2장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패역자들이 가득한 즈음",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 그리고 "배도하는 일"은 같은 뜻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고 말하는 것이며, "전무후무한 마지막 환난"이 "극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일임을 가르칩니다.

"얼굴은 엄장하며 궤휼에 능하며"는 그 속임수가 보통 인간의 술수(術手)를 능가함을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憑藉)하여 그러한 술수를 행한다면 신학자(神學者)들 외에 누가 또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신학자들을 "불법의 사람"이라고 한 것은 그들의 가르침이 성경말씀으로 뒷받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불법의 사람들을 교황, 박태선, 문선명 등 성경의 가르침과는 먼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며, 이러한 이단의 지도자들이 "엄장하며 궤휼에 능한 권세"가 나타난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들에게는 수백만의 추종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로 미혹케 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이러한 유명하고 권력 있는 이단자들을 제외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엄장하고 궤휼에 능한 자"는 '성경말씀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주장하고 가르치는 무리 중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용처럼 말하는 신학(神學): 그러나 여러분께서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가 무슨 뜻이냐 라고 질문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의 이해는 "하나님과 숭배함을 받는 자(그리스도) 위에 뛰어나 자존(自尊)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알아 보는 일입니다. 이 자들은 사도의 명분을 갖추지 못하고 신학(神學)으로 회중(會衆)을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사도의 명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일입니다. 말세의 선지자들을 가리켜 "내가 보내지 않은 자"(렘 29:9), "네 은(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사 1:22)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자존하는 자"들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서 '내가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는 자존하는 것이며, 하나님 성전에 앉아 하나님인양 하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성전은 예배당을 지적함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배도하는 일이 극도로 승(昇)해서, 하나님의 성전인 그리스도인들을 회중에서 쫓아내는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용처럼 말하더라"는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권능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따릅니다마는, 결국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12절: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먼저 나온 짐승"은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며, 철장으로 세상을 다스릴 "여인의 아이"로부터 머리가 상하게 된(창 3:15) 사단입니다. 주목을 끄는 것은, 이 사단이 "땅에 거하는 자" 뿐 아니라 "땅"도 그에게 경배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땅도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창 3:17)는 것입니다. "상처"에 대하여는 3절에서 공부하였습니다. "상처가 나은 자""잠시동안 놓인 자"이며, 그러나 다시 영원한 지옥으로 갈 자입니다.

13절: "큰 이적(異蹟)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큰 이적"은 사실상 거짓 선지자의 무리들이 방언을 말하고 병을 고치는 것이 큰 하나님의 이적이라고 합니다마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인간은 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라고 하신 것은, 병을 고치고 방언을 말하는 기사를 말씀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권능은 세상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는 구원의 기적을 전하는 권능입니다.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옴: 사단이 행하는 기적 중에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불"은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화제(火祭)로 속죄제(贖罪祭)를 드리도록 명령하신 것이 무엇의 상징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속죄제를 송아지나 수양으로 드리되, (1)"피를 취하여--- 단의 네 귀퉁이 뿔에 발라 단을 깨끗하게 하고"(레 8:15) (2)"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을 취하여 단에서 불사르고"(레 8:16), (3)가죽과 고기와 똥은 진 밖에서 불사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1)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대속하셨으며, (2)그리스도의 희생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사였으며, (3)우리의 죄를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사하신다는 상징이 아니겠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의 설교를 들으면 이러한 세 가지 제사의 원칙적인 교리를 가르치기는 합니다.

말하자면 지금의 거짓선지자들이, 구약 아합왕 시절에 선지자 엘리야가 왕후(王后) 이세벨과 대결(對決)한 것(왕상 18:)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기세(氣勢)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의 거짓 선지자 850명은 하늘에서 불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엘리야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열왕기상 18장이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칩니까?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구원을 받는 참 신앙을, 하나님의 보내신 참 선지자만이 받고 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또 다른 이적으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합이 죽은 후 아하시야 왕이 사자들 50인을 보내어 엘리야를 잡으려 할 때(왕하 1:),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50명을 죽인 일이 두번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세번째 50명은 죽지 않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열왕기하 1장은, 인류 중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⅓로 상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은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을 가르칩니다. 놀랍게도 누가복음 9장 51절-56절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이 이 일을 잘 알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기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3-54)

뒤로 넘어지는 일: 이 기록은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않는 모든 인간이 불의 멸망을 받을 것을 가르칩니다. 때가 되기 이전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신 기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참으로 하늘에서 불을 내리셔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과 입을 맞춤으로 군대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을 넘겨 줄 때, 창조주이시며, 세상을 홀로 다스리시는 예수님께서 불을 하늘에서 내리어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다 멸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셔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예수님께서 "내로라"(I am:하나님의 칭호)고 하셨을 때, 잡으러 온 자들이 뒤로 넘어진 기록이 있습니다(요 18:6). 그러므로 뒤로 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상징이며, 불이 하늘에서 내리는 상징입니다.

성경에는 사람이 뒤로 넘어진 기록이 몇번 있습니다. 사무엘상 4장에 하나님의 보호와 언약을 상징하는 궤(櫃)를 불레셋 사람에게 빼앗긴 소식을 들었을 때 대제사장 엘리가 되로 넘어져 죽은 기록이 있으며, 이사야서 28장 11-13절에, 말세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거짓선지자들이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시리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부흥사가 사람들에게 손을 댈 때 뒤로 넘어지는 얘기를 들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4절: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deceive)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偶像)을 만들라 하더라"

 

제목을 "가장 현저한 말세의 징조, 기사와 이적"으로 한 편지를 약 4년 전에 보내 드린 적이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고, 안수하여 병을 고치고, 꿈을 따라 계시를 받고, 환상을 보고, 집회에서 사람들이 뒤로 넘어지는 현상은 바로 14절에서 예언하신 것입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4년전 편지를 다시 정리하여 보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꼭 기억하여야 할 것은 이러한 기사와 이적이 사단의 속임수임을 이 14절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마 12:39)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표적을 구하지 않을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사와 이적을 보이신 것은 자기가 창조주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며, 제자들이 잠시동안 기사와 이적을 행한 것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마감되면서, 성경 말씀 외에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을 것을 요한계시록 마지막(계 21:18-19)에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혼돈하지 않고 말씀에만 의존하게 된 것을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도 바울은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고 함으로써 말세에 번창하는 기사와 이적을 부정했습니다.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의하여 말씀으로 사형언도를 받은 사단, 즉 무저갱에 갇혔던 사단입니다. 가석방(假釋放)을 받았습니다마는 머지 않아 영원한 지옥 불에 갈 것을 사단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우상을 만들라"는 "섬기고 경배하라"는 뜻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우상숭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부처를 섬겨 왔고, 서낭당에서 산신령(山神靈)에게 기도했고, 또 조상의 영들을 섬겨 왔습니다. 이러한 것은 예외 없이 인간의 욕심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러한 우상숭배가 거의 없어져 갑니다마는, 그보다도 더 큰 우상들이 생겼습니다. "돈"이라는 우상입니다. 사실상 구약성경에서 배우는 우상, "금송아지"를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던 재물, "금"을 모아서 만든 것이 우상 금송아지가 아닙니까? 지금도 똑 같은 일이 생기고 있습니다. 아마도 친구들과의 대화거리가 10중 8,9는 돈 얘기가 될 것입니다. 특히 직장에서 동료간의 얘기는, 퇴직 계획이라던가, 자녀 교육의 구상등, 돈에 대한 대화입니다. 부녀자들의 차림과 그들의 생활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돈을 사랑하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일에 대하여 서로 얘기할 기회가 더 있기를 바랍니다.

 

15절: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권세"는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는 권세이며,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권세입니다. 핍박은 종교개혁 당시와 같은 핍박은 아닙니다. 거짓복음을 들고 나옴으로, 참 복음의 근거지(根據地)를 없게 하자는 핍박입니다. 종교개혁 당시와 같이 실제로 죽임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회교도들에게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회중 속에 남아 있을 수 없이 출회(黜會)를 당하는 일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박태선장로가 어떠한 경로로 무서운 거짓 선지자가 되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관중을 속이는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미혹하는 힘이 세상 지식에서 온 것이 아니고, 성경의 어려운 문장들을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특히 큰 청중을 모으는 설교자들의 권세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자세히 알아보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16절: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貧窮)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이마의 표: "표"가 실제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 해답은 다음달에 공부하게될 요한계시록 14장 1절에 있습니다. 144,000의 성도들이 시온산에 서 있는 광경입니다. 그들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144,000은 구원을 받은 모든 믿는 자를 상징하는 숫자이며, 여러분과 저도 그 수에 들어 있으며, 구원을 받는 순간 우리가 시온산에 살게 된다고 하였으니, 그 이름을 지금 우리 이마에서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문제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이 숫하게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은 여호와이며, 그리스도이며, 아버지이시며, 만왕의 왕이며, 주(主)이며, 임마누엘 등 많이 있으니, 우리 좁은 이마에 어떻게 이 모든 이름을 쓸 수 있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상징으로 우리를 가르치시는 구절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은, 인간이 사단의 통치하에 있을 것이 보장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또한 사단의 소유권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마치 목장에서 소등에 표를 새겨서 임자의 표시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표가 이마 뿐 아니라 오른손에도 있습니다. 이 오른손은 인간의 의지를 말합니다.

오른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른손으로 붙들고 구원하신다(시 17:7, 18:35, 139:10)고 하셨습니다. 내 구원이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의지로 되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사단은 자유의지를 가르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16절에서 말하는 이마의 표는, 인간의 지성(知性)과 이성(理性)이 인간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오른손이 붙들지 않으신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붙들지 않을 때는 인간은 다 사단의 오른손이 붙들고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인류의 절대 다수가 사단에게 속해 있음을 가르칩니다.

17절: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賣買)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數)라"

 

팔고 사는 일: "매매(賣買)"를 생각하면 또한 경제(經濟)를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매매를 컴퓨터가 읽을 수 있는 바 코드(bar code)와 연결시켜, 컴퓨터는 짐승이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상가에서 모든 상품이 바 코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얘기를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러 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은 영적인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 매매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오셨을 때,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막 11:15)라고 한 기록에서 공부를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막 11:17)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현상이야말로 지금 모든 기독교 교단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강도의 소굴"에 대하여는 예레미야서에,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依賴)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焚香)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可憎)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라"(렘 7:8-10)

"매매"하는 것은 "강도의 소굴"이라고 예수님께서 정의하셨고, 강도의 소굴에 대하여는 위의 구절, 예레미야서 7장 8-10절이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불법을 행하며, 바알신의 전(殿)을 찾아가 바알에게 경배하면서도, 하나님 전에 다시 나와 "나는 이러한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도록 인도 받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라고 할 때, 그들을 "도적"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절에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켜 "문(그리스도)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환난 때의 도적들은 거짓 선지자들로서, 사람의 생각을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다 그들을 따르게 됨을 요한계시록 13장 17절은 가르칩니다.

18절: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짐승의 표 666: "그 수는 사람의 수니"를 KJV는 "그것은 한 사람의 숫자이니"로 번역했습니다. KJV의 번역이 잘못되었음을 다시 지적하며, 이것은 "표"가 구원 받지 못한 전 인류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666"에 대해서 지난번 편지에 몇 번 얘기한 바가 있습니다마는, 이 숫자가 상징적 숫자임을 우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영의 책이며, "666"의 영적인 뜻을 찾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3절에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666"의 해석은 반드시 성경 말씀에서 얻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답이 스가랴서 13장에 있습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⅔)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⅓)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지 일(⅓)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鍊鍛)하며 금같이 시험(試驗)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8-9)

위의 말씀은 마지막 환난 때와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 계획을 예언하신 구절입니다. 숫자 666이 에서 나온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외 라고 하시지 않고 666이라고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반역한 이스라엘에게,

"---내 맹세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 내 그물을 그 위에 베풀며 내 올무에 걸리게 하여 끌고 바벨론으로 가서 나를 반역한 그 반역을 거기서 국문할지며"(겔 17:19-20)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올무"에 걸리게 됨을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잘못 가르치는 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 "666"을 컴퓨터 등으로 생각하는 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올무에 걸린 자들입니다. 에 대하여 성경 말씀을 더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저희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삼하 8:2)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열왕기하 1장에 엘리야를 잡으러온 50인의 얘기가 있고, 요한계시록에도 을 지적하여 구원 받은 자와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을 구분하여 가르치는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의 중요한 결론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말씀에 끝까지 충실할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 13장의 예언은 장래에 올 일의 예언이 아니며, 지금, 마지막 환난 때에 있을 일의 예언입니다. 종말에 대한 예언은 각 성경책마다 있으며, 요한계시록은 그 예언들의 반복이며, 더 깊이 공부하도록 더 많은 비유를 사용하신 것 뿐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대우 드림, 10/4/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