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토론 천년왕국, 사실인가 상징인가"를 읽으면서

1.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생

인간은 자기본위로 살고 있다는 것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타냄을 우리는 들을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제 잘난 맛으로 산다"든가 "팔은 안으로 구부러지게 마련이다"라는 격언(格言)은 인간은 누구나 다 이기주의(利己主義)의 동물임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발달된 언어인 영어에 "나"를 말할 때는 반드시 대문자인 "I"를 쓰게 된 것도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는 같은 표현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보면,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경험하는 사건들도 인간의 이기주의를 잠재적으로 늘 노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유명해지기를 원하며, 그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고 있다. 흔한 예로서 한국의 어린 세대를 생각하면, "너 장래에 무엇이 될거냐?"는 질문에 서슴지 않고 "유명해지겠다"는 답변을 듣는다. 물론 부모에게서 배운 것을 제창(齊唱)하는 것 뿐이다. 자식이 집을 나가면 금의환향(錦衣還鄕)할 것을 학수고대 하는 것이 부모들이다.

"목사가 될 바에야 유명한 부흥사가 돼야지" 하는 말을 여러번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유명한 부흥사였던 박태선 장로가 억대의 돈을 벌기까지 성공을 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쉽게 할 수 있다.

1,000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 10,000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 10만명 앞에서 설교한 부흥사, 등등의 찬사(讚辭)들이 박태선 장로에게 주어지던, 같은 찬사가 아니라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성경의 세계, 참 복음이 전도되는 과정은 인간의 이기주의로 되지 않음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인류는 사람의 생각대로(제 잘난 맛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 임을 성경에서 거듭 읽을 수 있다[그들이 내말을 듣지(hearken) 아니하며(렘 6:19)]. 유명한 목사님을 보고 "당신의 설교는 사람의 생각입니다"라고 지적한다면 여러가지 그럴듯한 변명을 들을 수 있겠지만, 유명해지겠다는 잠재적인 이기주의를 부인하는 변명은 없을 것이다.

a. 금송아지

천년왕국의 교리가 서점에 범람해 있고, 많은 설교들에서 이 허무(虛無) 맹랑(孟浪)한 얘기를 들을 수 있다. 천년왕국이 기독교를 정의하고 있다. 마치 연옥이 가톨릭교를 정의함과 대등하다. 사람의 이기주의를 기탄없이 발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동안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아론까지도 포함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 우상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었다고 믿었다는 사실을(출 32:4) 역사의 이야기로만 들을 수는 없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나와 있었다고 해서 갑자기 무지각(無知覺)한 바보들이 된 것이 아니다. 가장 잘 했다고 생각하고 믿었던 것이 금송아지 였다. 이스라엘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애굽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이 금송아지 였다.

이 역사적인 사건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직전에 있는 기독교의 현상을 상징 하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말세에 기독교인이 듣고, 보고, 배운 것이 그럴듯한 천년왕국이다. 이렇게 잘못된 교리를 왜 쉽게 받아 들이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의 해답은 어렵지 않다. 사람들의 상상을 묘사한 소설이 잘 팔리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또 연옥(煉獄)의 얘기가 가톨릭교인을 위안(慰安)하는 것과 같이 천년왕국의 교리가 말세의 기독교인을 위안한다. 연옥의 교리는 "내가 천국에 갈 정도로 완전하지 않지만, 연옥에 갇힌 후 구원을 받을 기회가 있다"는 교리이며, 이와 대등(對等)하게 천녕왕국의 교리도 "천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에 구원을 획득(獲得)할 수 있다"는 신화(神話)와 같은 얘기들이다.

그동안 같이 복음사업을 해 온 어떤 분이 "지상토론 천녕왕국, 사실인가 상징인가"의 기

사가 실린 복음신문을 보내 주면서 그분의 답답한 심정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성경이 어

떻게 말씀하시는지 알아 보자는 암시였다.

나야 신학을 공부한 일이 없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변증(辨證)이 성경말씀에 근거할 방법 밖에 없다. 이름 있는 두 성경학자의 글을 평신도인 내가 비평(批評)한다는 것이 좀 주제넘은 일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러한 사람에게 나는 성경의 본질을 먼저 의론하기를 원하며, 내가 쓰는 글이 "성경말씀을 성경말씀으로 해석"한 비평이 될 때 서슴지 않고 독자들 앞에 내어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2. 하늘과 땅의 차의

이사야 55장의 말씀이 생각난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0-11).

이 성경구절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대할 때, 그리고 전도할 때 틀림 없이 마음에 두어야 할 기준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생각(신학자들의 학설)은 하늘과 땅의 차이라는 것(9절)과, 성경 말씀만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인간의 구속(救贖)사업을 위하여 (10절) 절대로 필요하다는(11절) 말씀을 믿어야 된다. 이렇게 볼 때 "전천년설" 또는 "후천년설의 지지자"들은 땅에 속한 얘기를 지지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은 무한과 유한의 비교인데, 수학(數學)에서도 무한(無限)과 유한(有限)을 비교하는 일은 정의할 수가 없다. 성경말씀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라고 믿을 때 우리는 수동(受動)의 자세 밖에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權威)와 위엄(威嚴)을 생각한다면 성경말씀이 "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사이에 논쟁과 토론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말의 사실은 "내 말은 청종치 않고"라고 하신 하나님의 경종과 잘 대조가 된다. 지상토론을 읽으면서 "종말론 정립", "신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여", "뜨거운 논쟁의 요소로, 건전한 신학토론의 ", "계시록의 나중에 나타나고 있는 책의 성격",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우화적 해석방법" 등등의 표현은 모세가 없는 동안에 금송아지를 만드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성경은 논쟁을 위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떠한 학설이 어떠한 신학설보다 좀 더 우월하다는 표현을 성경은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니면 아니요, 옳으면 예! 라고 말할 의무 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토론할 것이 아니라 듣고 순종할 계명이다. 전능하시고 완벽(完璧)하신 하나님께서 논쟁을 해도 결론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애매하게 쓰실 수가 없다.

가령 계시록 20장 4절을 읽을 때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 하니"에서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의 문장(文章)의 문법(文法)을 생각할 수 있다. "목 베임을 받은 자"는 주어(主語)인 "영혼"의 수사(修辭)인 것은 국민학교에서 배우는 문법이 아니겠는가?

가령, "화분에 꽃이 피었다"고 할 때 화분이 피었다고 어떻게 오해를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주어와 수사를 바꾸어 놓았다고 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지상에서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 4절의 말씀을 요약하면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죽은 영혼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국에서) 천년동안 왕노릇 하니"라고 읽을 수 있다. 지상에서 살게 된 인간은 육신을 가진 피조물이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그의 영혼은 그리스도 앞으로 간다.

3. 비유로 되어 있는 성경 말씀

최갑종 목사님의 "예수님은 인류역사의 마지막 때에 오셨다"라는 기사는 성경적이며(행 2:17), 말세(Last days)와 마지막 날(Last day)은 성경에 잘 구분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장차 일어날 일이라기보다는 말세에 일어난, 그리고 일어날 사건이라고 믿는 것이 성경적이다. 구약성경이라 할지라도 그 주제가 말세에 대한 예언이거나, 말세에 대한 상징임을 배우게 된다. 말세는 주님의 재림 이전의 세대를 지적함으로, 논리적(論理的)으로 생각하더라도 천년왕국이 지상에 또 올 수가 없다.

우리가 흔히 듣는 얘기가 "성경을 해석하기에 달렸다"고 하며 성경말씀을 이렇게도 해석하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 "기름"을 말할 때 그 상징의 뜻이 성령을 말할 때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도 있다. 예수님의 이름도 여러가지로 표현한다. "어린양", 어떤 때는 "문", 어떤 때는 "말씀" 이라고 성경에서 우리는 읽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시나리오가 두 가지로 해석될 수는 결코 없고, 그 시나리오를 잘못 알면, 자기가 탈 기차가 오는데도 타지 못하고 놓쳐 버리게 된다. 사람의 고집, 제 잘난 맛이 자신을 장님으로 만들어 영생을 보지 못하게 한다.

특히 유명해질 때 조심할 것은, 백두산 정상(頂上)에 올라간 줄 아는 명사(名士)가 아래를 내려다만 보면, 자기의 높이와 비교할 수 없이 높은 하늘을 바라보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로 무슨 박사의 어떤 설, 무슨 론, "교의신학의 면류관", "종말론의 다이아몬드" 등의 표현은 참 신앙인들에게는 거북한 어휘(語彙)들이다. 철통같이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다"(약 1:17)는 사실이며, 신학의 논쟁은 세상일에 대한 다툼이며, 그리스도의 신앙을 갈망하는 신앙인들에게는 백해무익(百害無益)하다. "성경말씀을 성경이 어떻게 정의하며, 또 어떻게 성경말씀이 다른 성경 구절의 주석(註釋)이 되는가"하는 공부에 우리는 전생(全生)을 바쳐야할 것이다.

성경말씀이 상징이냐? 문자적이냐? 하는 질문도 "누구누구가 그렇게 보니 나도 그렇게 믿는다"는 식의 변증은 신앙이 아니다. 성경자체가 경우에 따라서 상징인지 문자적인지를 말해 줌을 믿어야 한다. 가령 "천(千)"에 대하여 읽을 때 하나님께서 이 단어를 성경에 450번 가량 쓰시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든 구절을 읽어 보는 것은 성경학도들에게는 필수(必修)의 과정이다.

가령 창세기 24장 60절에 리브가를 축복하면서 "천만인(千萬人)의 어미가 될지어다"라고 한 것이나, 신명기 7장에 "천대(千代)"라고 읽을 수 있는 것과, 요한계시록 7장에 14만 4천(千)의 경우도 다 상징으로 씌어졌음을 알게 된다. 마가복음 4장 34절에 예수님께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고 기록된 것은 성경의 상당한 부분이 비유로 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비록 비유가 아닐지라도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들이 그리스도의 인간 구속(救贖)의 사역(使役)을 상징함을 배우게 된다.

4. 성령께서 주시는 우리의 비젼

최목사님이 요한계시록 20장 1-6절이 상징적이라는 이유를 "환상 자체가 지상적인 인간역사 세계에서 일어난 실제가 아니라 영적 세계에서 일어난 영적 실제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말세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모든 믿는 자들이 환상(Vision)을 볼 것이라고(행 2:17) 예언한 사실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이 우리에게 환상(幻像:Vision)으로 제시(提示)되기 때문이다. 지금 말하는 이 환상은 꿈에서 보는 화면이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 같은 현상(現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환상(Vision)은 앞으로 나타날 사건에 대한 이해와 또 그것을 믿는 일이다. 베드로가 환상을 본 기록을 보면(행 10:) 불결한 짐승을 본 환상이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게 된것처럼, 환상이 상징이라 할지라도 그 환상은 실제적인 사건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Vision을 환상으로 번역 해야 하는 한국 번역이 미약한 것을 느낀다. 성경이 주는 Vision은 실제적이며, 성령의 역사이다. 사도 요한이 받은 Vision도 우리가 받은 것과 다를 수가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요한은 성경 기록이 없을 때 성경을 기록하기 위하여 받았고, 우리의 환상은 성경 기록에서 받는 것이다.

비단 꿈(성경에서 읽는)은 환상의 일종이라 할지라도, 구약에서 읽을 수 있는 꿈의 경우(요셉의 꿈, 다니엘의 꿈 등)도 환상과 실제 사건을 일대일의 관계로 연결을 시킨다.

천년왕국이라는 시나리오가 단순히 요한계시록 20장 1-6절로만 되었다는 이광복목사님의 간증을 인정하며, 앞으로 부조리(不條理)한 이 시나리오를 성경말씀과 비교할 것이다. 이목사님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론"인 천년왕국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가지고 도우시는가를 볼 것이다. 이목사님이 인용(引用)한, 요한계시록에 반드시 속히 (1:1), 장차 (1:19), 마땅히 (4:1), 결코 속히 (22:6)이 무엇을 뜻하는지 공부하려고 한다.

아마도 세대주의자들의 가장 큰 오류(誤謬)가 "책의 성격"을 정의하는 잘못에서 온다고 본다. 나는 디모데후서 3장 16절의 성경에 대한 정의가 요한계시록에도 적용이 됨을 믿으며, 다음은 요한계시록 20장 1-6절이 독립적으로 기록될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 특히 성경에서 "말세와 마지막날"은 성경전체를 가장 가깝게 설명하고 정의하는 제목이라고 배우게 될 때, 요한계시록 20장 1-6절의 내용은 성경 여러 곳에서 되풀이된다는 것을 믿게 되며, 또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이 장래에 있을 일만을 기록했다는 가정은 성경이 용납치 않는다. 가령 요한계시록 12장 1-6절에 나오는 여인의 얘기는 장래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부터 시작하여 신약시대 전체를 설명한다.

이목사님의 "실제적 성취"라는 표현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말씀이 상징적이라고 할지라도 그 말씀은 우리의 "실제적인 구원의 성취"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5. 지상토론의 큰 제목

"천년왕국 상징화는 말씀을 훼손시킨다"는 큰 제목을 "천년왕국을 제창(提唱)함은 말씀을 훼손시킨다"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네번에 있을 지상토론을 읽고 성경말씀과 비교를 하겠지만 천년왕국의 교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소설이다. 가톨릭교회의 교리가 신화(神話)를 근거로 한것처럼, 천년왕국의 교리는 성경적이 아닌 종교에 현혹(眩惑)된 사람의 마음을 그려낸 교리이다.

놀라운 것은 카리스마틱 교파가 다 이것을 믿고, 몰몬교, 칠일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구원파 교회, 형제교회, 그리고 군소 교파들이 천녕왕국을 믿는다. 내가 속해 있던 경건파 교회는 교인들 집에 텔레비젼도 없고, 잡지도 없고, 성경만 보는 사람들인데, 이상하게도 교역자들이 천년왕국을 말한다. 성경말씀으로만 신앙생활을 한다고 주장하지만 잘못된 비 성경적인 것을 받아 들이는데는 텔레비젼도, 잡지도 필요 없고, 남의 설교를 듣지 않고도 배우게 된다. 독립교회를 차리고 어떤 교파에도 속하지 않은 아주 건실한 모임을 알게되었다. 그 집회에도 천녕왕국의 교리는 전염병처럼 번져 들어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천년왕국이 비성경적이라고 말하면 그 답변을 다음과 같이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격려하고 말씀으로 교제하는 것이 참 교회이지, 교제하는 다른 형제가 천녕왕국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라고 한다. 우리가 남의 구원을 말할 때는, 하나님께서 집행하시는 구원계획에 건방지게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언제 구원을 받고 나는 몇년, 언제 구원을 받았다"는 간증을 들을 때 몹씨 거북해진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는 진리를 갈망하며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는 것이며, 내가 믿고 있는 사실이 잘못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과 씨름을 하는 본질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한다. 이것은 마치 야곱이 밤새껏, 동이 틀 때까지, 축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과 씨름하던 사건과 같다.

앞으로 네번 더 있을 지상토론에서 천년왕국에 대하여 여러가지 낭설(浪說)을 듣을 기회가 여러분에게 올 것이며, 이 기회에 하나님의 말씀과 씨름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구원의 비밀을 좀 더 찾아 내기를 바라고 있다.

이대우, 3/2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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