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1, 새 하늘과 새 땅(III)

요한계시록 21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천국에 가지 못할 자들:

요한계시록 21장 전체가 천국에 대한 영광스럽고, 찬란한 자세한 얘기들인데, 왜 특별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에 대하여 한 구절을 끼워 두셨는가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사실상 요한계시록 13장과 20장을 공부하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에 대한 공부를 상당히 했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왜 다시 말씀하십니까? 이 일을 강조하시거나, 새로운 가르치심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신 인류: 이 구절에 나타나는 여덟 가지 종류의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을 찾아보기 전에 하나님께서 왜 인류를 포기하시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성경 몇 구절을 찾아봅니다.

요한계시록 21 8절은, 로마서 1 18-32절의 말씀을 한 절에다 요약한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로마서 1장에는 불의한 자들의 20가지 이상의 속성을 설명하면서,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gave them up)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1:24)라고 하심으로 인간을 하나님께서 포기 하셨음을 가르칩니다. "내어 버려두사"의 더 정확한 번역은 "포기하시어(gave them up)"라는 동사의 과거형입니다. 여기서 인간을 포기하신 이유를 "마음의 정욕"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인간은 정욕의 동물이며, 이 정욕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를 알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인간들 중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욕이 없는 의인이 있다는 가정(假定)을 성경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역사상에 알려진 선한 사람들이나, 성경에서 읽을 수 있는 의인들도 다 정욕의 동물입니다. 아브라함 같은 의인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내버려두지 않으셨기" 때문에 의인입니다. 여러분도 아브라함의 경우와 다른 점이 없습니다.

골로새서 3 5-10절이 이 사실을 잘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毁謗)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인간은 정욕의 동물: 이 구절에서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라고 하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이 불의한 과거 생활에서 떠났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내가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고, 노력함으로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반문 할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하여 9절이 설명합니다. 우리가 선하게 되는 것은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흔히 "배우지 못한 놈" "무식한 놈"들의 표현으로, 인간을 교육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이 말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화와 문명이 인간의 정욕을 제거하지 못함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각 개인의 정욕은 집단의 정욕으로 발전하고, 집단의 정욕은 국가들의 정욕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국가마다 병력을 과시하는 것이 바로 이 정욕의 발산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정욕을 보시고 그대로 내어 버려두신(포기하신)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몇몇 사람들을 창세 전에 선택하시고, 그 택하신 백성이 거듭나서, 육신의 정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의 생활은 나날이 성장하며, 죽는 날 까지, 혹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될 것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내어 버려둔다"는 뜻이 포기하다 보다는 "관심이 없다"는 표현 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대한 무관심을 표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시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의지로써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것이 인간들의 상태입니다( 3:10-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포기하셨다는 뜻은, 인간을 지옥으로 행하는 자멸의 길에 내어 버려두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포기하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기하신 기록을 사도행전 7장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설교이며, 이 설교로 인하여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합니다. 스데반을 돌로 치기까지 이스라엘을 격동시킨 이유는, 그들의 죄를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모세가 없는 동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죄를 지적했습니다. 41-4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gave them up)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위의 구절에서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진리 몇 가지를 발견합니다. 첫 번째 사실은 이스라엘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금으로 송아지를 만든 이유가 진리를 찾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기들의 만족을 찾은 것이 이스라엘의 행동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사실은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gave them up)"라고 하신 점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그를 기뻐할 만한 충분한 경험과, 또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고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하늘의 군대, 사단을 섬기도록 포기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로 43절에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고 하심으로 천국에 들어갈 소망이 없어진 것을 지적하십니다.

이 얘기가 이스라엘에게만 적용이 되던 말씀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살고 있는 20세기 기독교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신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을 통하여 풍요하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고로만 삼고, 인간의 손으로 만든 신학과, 교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교역자와 교인들에게 해당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대제사장,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면서도, 그 잘못을 알지 못하던 것 같이, 많은 신자들이 자기의 잘못된 교리를 알지 못하고 열심을 내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기하신 또 다른 기록을 찾아 보겠습니다.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버려 두어(gave them up)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 81:11-12)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인류: 위의 구절에서 발견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기하신 이유가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가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겠습니까?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역사적으로나, 현 세상을 살펴보면 인간은 인간이 성취한 업적을 찬양하는 것으로 일삼고 있습니다. 종교서적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마는, 모두가 자기 만족을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드는 얘기들입니다.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포기하신 세 가지 이유를 요약하면, 인간은 자기 마음을 믿으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가르침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포기하신 이 인간들 중에 속해 있지 않음을 어떻게 증명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포기하신 이유 세 가지가 나에게 해당하는지를 일일이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내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장래를 바라봅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거듭나고 하나님께서 내 생활을 주관하심을 믿고 살고 있습니까? 내가 성취한 경제적, 사회적인 입장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소망을 지상에다 두고 사는 사람 중에 속해 있지나 않습니까? 여러분께서 듣기 원하는 설교가 유명지사의 강연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영혼에 경종을 울리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성경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이러한 질문을 하며, 내가 그리스도의 영접을 받아, 영원한 천국에 들어 갈 것이라는 분명한 약속을 확신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날이 눈앞에 다가 왔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의 여덟 가지 본질:

다음으로 요한계시록 21 8절에 기록된 여덟 가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의 본질을 살펴보겠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않는 자들은 세상에 살 동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믿는 자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즉 아직도 구원이 가능한 때에,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6 12-17절은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15-1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自主者)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음이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이 광경은 심판 날에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임을 비로소 알게 되는 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가장 영광스럽고 기쁜 날이 하나님의 심판 날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 요한복음 3 18절은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믿는다는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인격으로는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늘에서 주신 신앙,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갑니다. 우리 육신에 속한 아무것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간이 행하는 선행이 신앙이 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가증스런 자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것"을 다니엘서 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이 "가증한 것"을 어떠한 특정한 인물을 지적해서 말합니다마는, 성경은 "가증한 자"가 거짓 선지자임을 가르칩니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것은 거짓 복음을 가르침을 말하며, 말세에 가서는 거짓 선지자들의 세력이 절대로 우세할 것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살인자들: 성경에는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믿는 자들을 미워하는 때가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말세의 한 가지 현상입니다. 세상이 살인자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음행하는 자들(whoremongers): 불륜(不倫)한 생활을 하는 자들입니다. 특히 말세의 윤리는 땅에 떨어져있습니다. 젊은 세대와 대화를 해 보면,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결혼생활도, 이혼을 몇 번하고 또 재혼도 몇 번 한 사람들이 정상적인 사람들로 알고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의 생활이 정상적이라고 사회가 인정을 하게 된 때입니다.

또한 성경은 이 음행하는 자들에 대하여 다른 면을 가르칩니다. 인간의 생활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이 되지 못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음행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술 하는 자들: 옛이나 지금이나, 세상은 기사와 이적 보기를 원합니다. 마리아의 동상이 눈물을 흘린다거나, 병을 고치는 목사의 집회가 있다거나 하면 군중들이 모여드는 때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사와 이적은 모두가 사단의 역사임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기적은 불가능한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시는 일 뿐입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들: 그리스도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을 다 우상숭배자로 성경은 가르칩니다. 인간은 누구 나가 다 무엇인가를 숭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숭배합니다. 자기의 경제적, 사회적, 혹은 인격적인 성취를 믿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사회 도덕을 믿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구의 위대함을 찬양하며, 이 지구를 보전하겠다는 "새 시대 활동:New Age Movement"에 참가하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결국은 모든 인간들에게 각각 다른 우상이 있어 그 우상을 섬기는 일로 바빠져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길 여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거짓말하는 자들: 사단은 거짓의 아버지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그 사단에게 속한 인간들이 거짓의 자식들입니다. 세상에 진리는 그리스도뿐입니다. 세상이 어떠한 진리를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 원천이 그리스도가 아닐 때는 거짓말입니다. 수학, 과학, 공학에 나타나는 방정식을 진리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법칙의 일부이며, 창세 후 13,000(성경의 역사적인 기록에 의해) 동안 변동이 없는 창조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과학과 공학이 사람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쟁이 들입니다. 사실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속고 있기 때문에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상 여덟 가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의 본질"을 요약하면, 그들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지 않을 때, 모두가 유황불이 타는 지옥에 들어간다는 가르침입니다. 내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내 인격과 지성을 완전히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믿음을 간구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유황이 타는 불 연못이 무엇이겠습니까? 상징적인 용어를 사용하신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서, "유황이 타는 불못"만이 실제적인 표현이라고 믿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의 죽음을 유황불로 기록한 것으로 시작하여 "유황불이 타는 것", 인간의 지식과 상식으로 그려볼 수 있게 하는, 무서운 형벌임을 상징합니다. 인간이 죽음을 무서워하고 슬퍼합니다마는, 그것이 어떻게 영원한 형벌인 둘째 사망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우리도 이 형벌을 받아야 하지만, 그 형벌을 내 대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받으셨기 때문에, 나는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을 감사하며,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화려한 혼인 잔치: 위의 구절, 9절과 10절은 결혼식의 장면입니다. 여러분께서 가장 화려했던 결혼식 광경을 회상해 보십시오. 영국의 왕자 찰스와 다이아나의 결혼식을 텔레비전에서 본 생각을 합니다. 그때 다이아나가 아주 매력적인 신부였음을 기억합니다. 그 결혼식의 화려함은 평민들의 결혼식과 비교가 안되겠습니다마는, 영국 왕실의 결혼식이 만 왕의 왕이신 어린양의 결혼식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어린양 결혼식에, 저와 여러분이 신부가 된다고요? 어떻게 이것을 다 이해할 수 있고, 또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구절이 우리로 하여금 놀라게 하는 것은,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고 하신 다음에 요한에게 보여주신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며, 여러분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이 사실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고, 모든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거듭나는 순간 그 마음속에 성령께서 들어와 사시며, 이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결혼식에 참석하는 날을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오는"이라고 하신 말씀에 유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린양의 신부가 되는 것이 완전히 하나님의 계획과 또 그분의 사역으로 이루어짐을 가르칩니다. 우리의 구원이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신 말씀( 2:14)을 정확하게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행함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 정의하신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6 2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행함이 있는 믿음: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행함이 있는 믿음"을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보라 내가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니 나는 예수를 믿는 자다"등 표적을 보면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계속하여 이 행함이 있는 믿음에 대하여 설명 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셨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6:31-33)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하늘에서 주시는 떡을 먹을 때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이 구절에서 배우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은, "내가 구주를 영접하는 신앙"은 하늘에서 오는 떡을 먹는 것이 절대로 못된다는 사실이며, 우리가 인간의 상식과, 지성과 감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신앙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행함이 있는 신앙은 생명의 떡,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는 일이며, 이 일은 내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주셔야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우리의 구주)의 결혼식은, 그 신부가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하늘에서 내리는 떡을 먹고 살아온 믿는 자들)입니다. 이상 모든 설명이 비유이며, 상징입니다.

천사가 요한을 데리고 간 것이 "높은 산"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곳"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121:1-2)고 하신 말씀에서 산은 도움이 오는 곳입니다. 도움이 무엇입니까? 말세에 영원한 멸망을 면하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가르칩니다. 이 모든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일일이 기록하신 책이 성경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만이 높은 산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말씀이 택하신 백성을 통하여 실제화 되어,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이 자기의 백성이며, 그들과 만날 곳이 또한 높은 산입니다.

이 결혼 예식에 대하여 다시 생각을 합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결혼으로 비교하셨겠습니까? 구원 받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다른 것으로 설명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이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5:31)라고 하신 것을 생각할 때, 어린양과의 결혼을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한 육체가 되는" 순간입니다.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같고 벽옥(碧玉)과 수정같이 맑더라"

"그 성의 빛"은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발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빛입니다. 그리고, 보석 같다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지극히 보배로움을 말하며, 수정 같다고 하심은 그들의 신앙이 순결함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순결하고 보배로움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 3절에서 "벽옥(jasper)"을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지적하신 것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이 모두 그리스도를 닮은 것을 지적합니다. 출애굽기 28장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대제사장 아론이 입을 옷을 12가지 보석으로 장식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중 마지막으로 지적하신 보석이 벽옥이며( 28:20, 39:13), 그리스도께서 "알파와 오매가"이심을 기억하게 합니다.

12: "크고 높은 성곽(wall)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열 두 문"이 실제적인 성곽이나 문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열 두 성곽과 문"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하나님의 백성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인류역사상 아담에서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직전에 구원을 받는 자까지의, 모든 믿는 자들을 열 두 성곽과 문으로 상징하셨습니다. 숫자 "열 둘"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신 자들로 완결되었음을 지적합니다.

"열 두 천사"가 누구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가지고 온 사자(使者)들입니다. 이 천사들도 하나님의 백성의 특성을 설명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구원은 복음을 들음에서 시작된다는 하나님의 말씀( 10:17)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문들 위에 이름"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이라고 하신 말씀이 상징임을 알게됩니다.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은 열 세 지파가 있음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요한계시록 7장에서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14 4천으로 상징하신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12절에서 말씀하신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은, 역대에 구원을 받는 모든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택하심을 받은 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었음을 가르치며, 이것도 어린양과 신부사이에 이루어진 밀접한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성곽과 문"은 예루살렘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자료들이며, 그리스도자신이 ""이라고 하신 점을 기억나게 합니다.

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3 29절에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라고 하신 말씀을, 바로 요한계시록 13절에서 설명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국가와 인종의 차별 없이 복음을 전하도록 마련하셨고, 자기의 잃은 양을 모든 국가와 인종들 가운데서 찾으심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기초석"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는 큰 홍수가 나도 능히 요동치 않는 것이라는 비유를 누가복음 6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초석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신앙을 지켜온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 기초석의 수가 완결된 수, 열 둘이며, 여러분을 가리키는 기초석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숫자 ""은 하나님의 뜻을 상징합니다.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은 모든 택하심을 받은 자들 전체를 가리키며, 특히 성경에 사도의 수가 사도바울을 포함하면 13명 이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특히 우리에게 강조하시는 사실은, 이 혼인 예식이 완전히 그리스도의 계획과, 또 그리스도께서 홀로 하신 사역으로 이루어짐을 요한게시록 21장의 문맥들이 가르칩니다. 고린도전서 3 10-13절의 말씀을 다시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역(功力)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역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기초석도 그리스도 위에 세운, 불에 타지 않는 기초석이기를 바랍니다.

이대우 가족 드림, 12/1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