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 뉴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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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시대의 끝장 II

"교회 시대의 끝장"이라는 제목을 눈앞에 두고 막상 성경을 펼쳐 놓고 보니 주어진 과제가 무척 광범함을 발견합니다. 알려지지 않은 성경의 진리가 발표될 때는 언제나 엄청나게 큰 파동이 그 뒤를 따르기 마련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광범위한 과제를 최소한도로 이해할 수 있는 준비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제 자신이 공학을 공부할 때 수학과 물리학이 여러 가지 공학 방정식의 기초가 되었음을 기억합니다. "교회 시대의 끝장"에 대하여도 기본적인 방정식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상 성경 말씀은 수학이나 공학의 방정식보다 더 정밀하고 분명한 점이 있습니다. 반면에 성경 공부의 경우 기초가 잘못될 때, 성경공부의 결과가 무의미한 공론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이러한 예는 역대의 신학 학설과, 교리를 기초로 한 성경 공부의 결과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사 55:8)라고 하신 말씀을 더욱 신중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성경 말씀을 접할 때마다, 인간의 육체가 영양을 취하고 그 영양이 육체의 일부가 되는 과정과 비교하게 됩니다. 커피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의학계에서 한동안은 커피가 인체에 해롭다고 하다가, 커피가 경우에 따라서는 인체에 좋다는 보고를 뉴스에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것은 의학이 인간 인체의 기능을 다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합니다.

생리학을 공부하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조금은 알게 되지만, 오묘한 인간 창조의 비밀을 생리학 공부로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는, 생리학자가 인간의 생리학을 연구하는 과정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것은 성경을 공부하는데 있어 하나님께서 그 기본 원리를 주셨다는 점입니다.

첫째 원리는 고린도전서 2장 13절을 말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많은 신자들이 위의 구절에서 말하는 "신령한 일"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방언도 하고, 기사와 이적이 아직도 하늘에서 온다고 믿는 자들이 정의하는 "신령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진리와는 상관이 없으며, 고려할 여지조차 없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생각은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는 사단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옳다고 여기는 개혁주의 신앙에도 우리가 신중을 기울여야 할 것은, 진실한 신자들이 무엇인가 마음에 느끼는 것을 "성령의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믿는 신비주의의 경향이 그들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예외 없이 종교개혁 당시에 작성된 개혁주의 교리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이 물로 주는 세례가 우리의 구원을 인봉한다(seal)는 개혁 교리의 간증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2장에서 말하는 "신령한 일"은, "성경이 정의하는 일"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사용된 모든 단어의 뜻은 성경 말씀으로 정의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0-21)고 함으로써 고린도전서 2장의 말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고 한 것은, 성경의 해석을 사람의 지혜로 된 신학적 학설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훌륭한 설교를 듣고,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다"는 가르침이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지적합니다. 사람의 감정을 성령의 감동으로 잘못 가르치는 것에 조심하여야 합니다.

성경 공부의 둘째 원리는,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리입니다. 성경에서 어떤 구절은 중요하고, 어떤 구절은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성경 구절 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마는, 그 말씀도 나에게 직접 하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그 구절들이 서로 잘 유대가 되어 있습니다. 마치 우리의 몸의 여러 기관이 서로 잘 연결되어, 필요에 따라 한 가지 기능을 작용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책입니다.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셨고, 범죄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하여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왕으로 군림하실 것이며, 그 때에 세상의 불의를 심판하시는 심판 주로 오실 일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 얘기 중에 세상의 종말과 심판에 대하여 설명하는 내용이 성경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비유를 일일이 읽어보면 이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숫자: 성경에 나타나는 숫자에 대해서는 충분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성경말씀에 나타나는 숫자를 이해하는 방법은, 성경에 나타나는 단어나 구절을 공부하는 방법과 동일합니다. 성경 구절을 서로 비교함으로써만 그 참뜻을 알게 됩니다.

셋째로 성경 말씀을 공부하는데 있어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성경 말씀이 비유로 씌어졌다는 것입니다(막 4:34).

예를 들어 마태복음 24장 20절에 "너희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은 비유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겨울: 여기에서 "겨울"은 얼음이 얼고 눈이 오는 겨울을 지적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우선 분명한 것은, 만일 그리스도의 재림이 미국이나 한국에서 겨울철에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여름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사용된 "겨울"이라는 단어를 모두 공부함으로써만 성경이 정의하는 겨울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공부한 결과 겨울에 대한 주석은 예레미야 20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이 구절과, 마태복음 24장 20절은, 이사야서 55장 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신 말씀과 그 뜻이 같습니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합니다.

사계절: 지상에는 4계절이 있지는, 성경은 사계절을 말하지 않습니다. 한글 개역성경에 "봄비"라고 번역된 구절이 스가랴 10장 1절에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 성경에서는 봄이라는 단어를 전혀 쓰지 않으셨습니다. "가을"에 대해서도 개역성경에는 네 번 나오지만, 모두가 오역이며, 원문은 가을이라는 단어를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추수"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계절이 둘만 있으며, "여름"은 추수하시는 때라고 하셨고, 잃은 양을 찾으시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이 지나면 겨울이 옵니다. 이 겨울은 말할 것도 없이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는 때를 말합니다. 우리가 "겨울"에 대한 뜻을 성경에서 찾기 위하여 "여름"이라는 단어를 공부해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안식일에 도망: 이와 같은 방법으로 공부하면, "도망하는 일이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의 뜻도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에 우주를 창조하시고, 제 7일에 쉬셨습니다. 그 날을 안식일이라고 하며, 그 날의 주인이 그리스도임을(마 12:8) 우리는 배우며, 우리가 구원받는 것을 "안식에 들어감"(히 3:11)이라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세상에 종말이 오기 전에 도망할 것을 가르칩니다.

또 다른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날에는 아이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마 24:19)

이 구절에서 "그 날"은 세상의 종말을 말하며, 이 세상 종말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 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받을 사람들과,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가지 종류를 "양과 염소"(마 25:33)로 구별하셨습니다. 말하자면 멸망을 받을 염소에 대한 경고가, "아이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하시는 경고입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는데 있어, 하나님께서 양을 선택하신 것이 창세 이전이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젖먹이는 자"나 "아이밴 자들"이, 말세에 가서 무엇인가 잘못을 행하고 있는 자들을 말한다고 생각하기 전에, 성경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어떻게 정의하는가를 찾아야 합니다. 따라서 "젖먹이지 못한 자", "아이를 배지 못한 자"에 대한 성경 말씀은 이 뜻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올바른 주석이 될 것입니다.

이 마태복음 24장 19절의 주석은, 로마서 9장에 "약속의 자녀"에 대한 기록이 됩니다. 약속의 자녀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갈 3:7). 로마서 9장과 갈라디아서 3장이 "아이밴 자와" "젖먹이는 자"의 뜻을 이해하는데 기본이 되는 내용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아브라함의 공부는 창세기 11장에서 시작해야 하며, 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공부함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 하는 기본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창세기 11장에서 아브라함을 소개할 때, 동시에 그의 아내 사라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창 11:30). 여기에서 "잉태하지 못함"이 한 단어 Barren(agar: 히브리어)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유의할 점은 사래를 잉태하지 못하는 여인으로 소개했다는 점입니다. 사래는 하나님께서 "열국의 어미"로(창 17:16) 선언하심으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자들이 사라(사래)에게서 태어났음을 선언하셨습니다. 또 놀라운 사실을, 이 "잉태하지 못하는 여인"을 3대에 걸쳐 성경에다 명시함으로써, 택하심을 입은 백성들은 이 잉태하지 못한 여인들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3대는 사라와, 사라의 자부이며 이삭의 아내인 리브가가 또한 "잉태하지 못한 여인"으로 기록되었고(창 25:21), 야곱이 가장 사랑하던 아내였고 요셉의 어머니였던 레헬이 또한 잉태하지 못한 여인이었습니다(창 29:31). 그러므로 "잉태하지 못한 자"를 성경은 Barren"이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녀를 설명하는 한가지 방법"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 세 사람이 우리 믿음의 조상이며, 우리의 믿음이 그들의 아내인 사라, 리브가 그리고 라헬(요셉의 어머니)을 통하여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반면에 사라의 여종이며, 이스마엘의 어미 하갈은 이스마엘을 잉태한 후에 바로 자기의 주인인 사라를 멸시한 기록이 있습니다(창 16:4).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24장 19절에 아이밴 자와 젖먹이는 자에 대한 주석입니다. 하갈은 세상에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대표합니다. 사라가 잉태하지 못하여 번민하던 생활은, 믿는 자 들의 신앙 생활을 대표합니다. 자식을 잉태하지 못할 것이 분명한 사라에게 자식을 약속하신 것은, 구원받을 가망이 전혀 없는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것과 같습니다. 사라가 하갈에게서 받은 고초의 기간이 14년이었음을 창세기 16-17장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기간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서 고초를 받는 상징의 기간이며, 하갈이 마침내 아브라함의 집을 떠나 광야로 쫓겨가는 것은 세상의 종말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 주제로 돌아가서, 성경이 가르치는 성경해석의 원리를 몇 가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역사는 구원계획의 설명이다.

최근에 많은 교회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구호를 내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의 태반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내용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설명할 수 있도록 그 시기와 사건을 정하시고 진행하셨다는 점입니다. 지면상 그 예를 다 제시할 수 없지만, 몇 가지 예를 들면 모세의 출생과 그의 일생, 다윗 왕의 생애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역사, 또한 모세가 광야에서 받은 제사법도 한결같이 인간의 구원 계획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러한 성경 역사에 나타나는 시기에 대한 공부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지난달에 소개한 "교회 시대의 끝장"을 설명하는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처음에 생각할 것은 대환난이 올 것이라는 구절입니다. 이 대환난의 징조를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이라든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하신 그 대환난이 교회에서 시작되고, 교회의 상태를 봄으로써 만 알 수 있다 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교회에서 시작될 것이 성경 여러 곳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 구절들을 찾아보면,

베드로전서 4장 17절에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라고 하셨고,

에스겔 9장 6절에 "늙은 자와 젊은 자와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라고 하셨으며,

아모스 3장 2절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로마서 2장9절을 또 읽어보겠습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라고 하심으로, 마지막 때의 환난과 하나님의 심판이 교회에서 시작됨을 가르칩니다.

교회를 심판하시는 일에 대하여는 예레미야 25장을 공부함으로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3절에 예레미야가 백성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되 부지런히 일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이유의 근본 원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상태: 예레미야 25장을 살펴보기 전에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의 상태를 먼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작업입니다.

한국 교회는 그 잘못된 상태가 유난히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는 우선 그 사명을 알아야하며, 그 사명을 수행할 만한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한국 교회는 이 두 가지가 다 결여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단체를 말하며, 이 지상의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한 교회, 곧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는 천상(天上)교회의 일부가 되어야하며, 그 사명을 천상 교회에서 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상 교회에서 받는 사명이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이 사명을 일일이 성경에 기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열 두 사도들로 인하여 지상의 신약 교회가 시작되었지만, 그 교회는 부단히 사단의 방해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사단의 방해는 마지막 환난 때까지 하나님께서 제재하셨다가(계 20:3), 사단에게 교회를 속일 수 있는 여러 가지 능력을 주는 때가 바로 이 마지막 환난입니다.

한국인의 교회: 첫째, 한국 교회는 카리스마적인 활동의 온상이며, 그 고장이 되어 세계적으로 명성을 올리고 있습니다. 카리스마적 활동은 방언을 장려하며, 신유를 주장하고, 꿈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는 위험한 집단의 활동이며, 가장 위험한 이단(異端)들입니다. 이 집단의 교인 수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수 천명이 모이게 할 수 있는 부흥 집회가 바로 이것이며, 부흥사가 수 천명이 모인 집회에 임금처럼 군림하고 있습니다. 회중이 강사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이름"으로 감언이설(甘言利說)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늘의 양식을 받는 줄 알고 있으나, 사실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독약을 얻어 마시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전통을 자랑하는 장로교회에도 카리스마적인 물결이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나는 방언을 말하지는 않지만, 방언이 잘못된 것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장로교의 목사님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많은 교회가 방언을 말하는 교인들을 일등 회원으로 대접을 하고,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교인은 성령의 교제가 없는 2등 교인으로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목사님이라야 큰 교회에서 환영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성경이 인정하지 않는 사실이며, 성경이 뒷받침 할 수 없을 때는 그 근원이 사단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상태이며, 병든 한국 교회의 가련한 현상입니다.

 

한국 장로교: 한국의 장로교는 백 여 년을 바르게 믿고 지켜오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28)는 말씀을 무시하고, 총회에서 여자 교역자를 인정함을 선언했다고 합니다. 장로교 교단이 한국 기독교 인구의 태반 차지합니다 마는, 장로교회 중에 올바른 교리를 토대로 세워진 교회가 몇이나 되는지 의문입니다. 한국 장로교는 교파 수가 100을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파가 갈라지는 것이 무슨 뚜렷한 교리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파벌을 일삼는 한국인의 특성을 교회가 배우고 따라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좀 설교를 반반하게 하다보면, 교인이 따르게 되고, 그 군중의 으뜸이 되고자 한 것이 새로운 교단의 발생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근본적인 진리를 어떻게 회중에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교파의 이름을 보면, 합동, 보수, 통합, 개혁 등의 단어를 이리저리 연결하면 새로운 교파의 이름이 나타납니다.교파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간절한 사명감보다는, 어떻게 하면 교회라는 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교역자들의 선교 집념입니다.

교인의 수가 어느 정도 늘어나면, 교인의 배가 운동을 하며, 그 배가 운동에는 사업인들, 관료들, 연예인들이 가담합니다. 교회와 세상의 명인들이 서로 합작하여 서로 돕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명성이 높으면 교회의 장로로 곧 추대를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예배 방법이 쉽게 세상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일종의 기업체로 전락되고, 목사, 장로 집사 할 것 없이 모두가 큰 교회, 이름 있는 교회를 건립하는데 합심을 합니다. 교회는 기업체가 되었기 때문에 수입이 늘어야 하며, 수입이 늘면 그 돈은 우선 찬란하고 웅장한 교회를 짓는 데에 사용이 됩니다. 그렇게 하여 큰 교회를 건립한 사건은, 그 교회 담임 목사님에게 큰 이력이 됩니다. 더 큰 교회를 담임 할 수 있는 성공한 목사님이 사회에 끼친 영향이 크겠지요. 그러나 그 큰 성공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성경 구절을 끊임없이 인용합니다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인간 사회복지를 위하여 이용하는 것 뿐입니다.

4000명이 출석하는 교회 담임 목사님의 간증을 들어보겠습니다,

"기복적인 신앙 관을 가지고 교인들을 기만하고 유혹해서 성장한 대형 교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지역적인 여건이 세상 적인 의미이지만 좋은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장합니다." (뉴스엔조이 USA 20011003)

반면에 이 큰 교회를 비평하는 작은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다음과 같이 간증합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저는 이루지도 못하는 큰 교회를 비난하기 위해 이런 책을 쓴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 여러 가지 자랑스런 요소가 많아도 화목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고 믿지요. 작은 교회는 그것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눈을 한번 열고 보니까, 온 세상이 대형 교회의 해악으로 떠들썩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뉴스엔조이 USA 20011003)

이렇게 신문을 통해서 자신의 교회를 소개한 목사님들의 간증은, 시종 일관 교회의 관리법과 성공의 비결을 말할 따름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께서 지상 명령으로 교회에게 주신 사명에 대하여 간증하는 교회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값싼 교회 음악: 교회에서 나팔을 불고, 기타를 치고, 북을 두드리는 것은, 젊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얻는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련한 일입니다. 인간이 주는 감명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처하겠습니까?

회중의 감정을 이용하는 또 다른 예배의 방법이 있습니다. 손뼉을 치며, 설교의 마디마다 "아멘! 아멘!"하고 응답을 하게 만듭니다. 회중의 감정이 절정에 이르면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21세기 한국 교회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고 명령하신 바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어떻게 변천했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종파: 한국에 장로교의 교파가 늘어나듯이,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의 종파는 수천으로 늘어났습니다. 어떤 종파는 일어난 지 얼마 되지 못하여 모습을 감추고 흔적도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요한계시록 제 2장과 3장을 읽어서 알게 됩니다마는, 초대 교회가 현재 터키 지방에 일곱 교회로서 시작되었으나, 지금 그 교회들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성경의 진리와는 거리가 먼 카톨릭교회가 분파 되지 않은 것을 자랑합니다마는, 사실상 역대의 교황과 정치적인 배경에 따라 교회는 잘못된 이단적 교리를 마음대로 제정해 왔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역대의 모든 교회가 사람의 생각대로 교리를 세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각 교파마다 그들의 교리를 "전통"이라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을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 시대에 따라 하나님께서 사건이 일어나게 하시고, 그 사건을 통하여 성경의 진리를 최소한도로 보전하셨고, 21세기에 사는 그리스도의 백성을 위하여 말씀을 보전하셨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사건은 종교개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바른 교리를 찾아냈고, 그 교리에 따라 교회를 건립하고, 한동안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고, 성경 연구의 결과를 남겨 놓았습니다마는, 그 수를 볼 때 불과 손꼽을 정도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종파는 한 지도자 혹은 몇 사람이 인도하는 어떤 집단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그들이 강조하는 교리가 시종일관 교파가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종교개혁도 어떠한 특수한 개인이나 지도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천국에서 중요한 인구가 될, 평신도들은 그 때까지 지도자들의 설교만을 듣고 신앙을 유지하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평신도들에게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지도자: 지도자들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듣고 믿던 현상이 사실상 19세기까지 계속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 이유는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평신도들이 성경을 소유할 만한 여건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롬 10:17)는 말씀이 절대적으로 진리이며, 사이비한 이단 교파들이 다 한 지도자에 의하여 잘못 인도되었음을 역사가 증명합니다. 몇 가지 잘 알려진 이단 종파를 생각해 보더라도, 몰몬교, 칠일안식교, 여호와의 증인들이 한 사람이 강조하는 잘못된 교리를 따라 가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적 교리를 가진 비교적 잘 알려진 교파들이 이러한 사실에서 모두 제외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감리교, 성결교의 교리를 보더라도 그 근본이 아르미니우스파(Arminian)에 근거를 두었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고, 더 나아가서 천년왕국을 믿게 되는 결과는, 이단 종파가 만든 교리와 구별할 필요가 없이 잘못된 것입니다. 교리가 성경적이 아닐 때 그 결과는 이단 종파와 동일하며, 신자들을 멸망으로 이끌어 갑니다.

장로교의 교리를 볼 때도 "인간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정하셨다"는 성경의 절대적 진리를 가르치기는 합니다마는, "배우자가 음행하면 이혼할 수 있다"든가 "물로 주는 세례가 구원을 확정한다"등의 교리를 고치지 못하고 고수하는 것도 또한 멸망의 길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상의 교회는 성경의 완전한 교리를 가지지 못합니다. 이 잘못된 교리를 고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이 심판을 받기 이전에, 먼저 심판을 받을 것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교파의 교리는 신도들의 신앙의 터전입니다. 교리가 우선 옳게 세워져야 하며, 그 교리를 지켜야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주신 법도를 따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으로 비교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이 각기 산당(山堂)을 짓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믿었던 것은, 지금 교회가 창시자들의 잘못된 교리를 믿고 따라가는 것으로 비교하셨습니다. 참으로 우매한 것이 인간입니다. 교인들이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우선적으로 따르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목사를 믿고, 교회를 믿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바른 교리는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욘 2:9)라고 하신 것을 믿는 것이며, 영문성경은 "Salvation is of the Lord"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예정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구절입니다. 교회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르치는 것은, 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반역하여, 내가 생각하고 내가 좋다고 믿는 것이 구원의 기본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다수의 교회가 이 자유의지를 믿기 때문에, 한결같이 사회 복지를 큰 사명으로 하는 교회가 마치 "교회다운 교회"인양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선교의 목적이 사회 복지를 위한 것이며, "교회는 사회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과는 너무도 먼 인간의 생각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으며, 또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성경에서 찾는 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알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바라보겠습니까?

교회가 당면한 큰 문제는, 교회가 가진 전통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전통이 바로 교단의 교리입니다. 이 교회의 전통과 생사를 같이하겠다는 것이 21세기의 교회입니다. 교리를 뜯어 고쳐야하며, 성경의 진리가 새로 발견되면, 교회의 새 교리에도 이것이 반영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소개: 우리 교회의 목사님을 간단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칼빈의 교리를 절대적으로 믿는 자칭 개혁주의 교역자입니다. 그리고 전통 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목사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열심히 가르칩니다. 그 교리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고쳐볼 의향은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그의 농사법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100년이 넘은 예배당에 달려있는 주택에는 사방 6미터 정도의 농토가 있습니다. 해마다 이 농토에 열두 가지 정도의 채소를 재배합니다. 씨를 콩나물 기르듯 뿌려놓고 수액을 바라봅니다 마는, 그 좁은 땅에서 어떻게 수액이 있겠습니까? 농사에 좀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그 답답한 형편을 보고만 있을 따름입니다. 이 농토를 20년 이상 경영한 분에게 무슨 조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분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가르치는 것도 같은 농사법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교단의 교리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기 때문에 부단한 검토 없이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현대 교회가 이혼과 재혼을 인정하는 것은 장로교회가 그 책임을 담당해야 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심판을 교회에서 시작하시는 원인의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저희들 목사님의 예배 방법과 설교 내용에는 늘 감사합니다. 예배에서 시종 성경 말씀을 읽고 배우는 일 외에는 없으며, 그의 설교 내용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예정되었음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작은 교회의 문제점: 그러나 문제점이 있습니다. 교회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 그 설교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교인의 수가 20여명 정도로 늘 남아 있습니다. 저는 결코 "교인수가 적은 것이" 문제점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명령하신 교회의 사명,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막 16:15)고 하신 말씀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 작은 교회의 문제점입니다.

크고 재정이 풍부한 교회는 거의 예외 없이 사회 복지를 바라보고 사람의 생각대로 설교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잘못된 교리를 세계선교에 사용하실 수가 없으심이 분명합니다. 그 큰 교회가 전파하는 것은 비 진리이므로 실제적으로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세계 선교는 끝장을 본 것입니다.

낡아진 교회: 미국 동부에는 건물만 덩그렇게 남아있는 고색이 짙은 교회당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건물이 낡아서 더 쓸 수 없지만, 역사적 고적지로 관광객을 위하여 정부가 보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낡아지는 것은 사실이며, 물건이 낡아지면 제 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폐물로 처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근 2000년 동안, 계획하신 대로 교회를 세계 선교를 위하여 쓰셨고, 그 교회를 통하여 선교의 목적을 달성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가 더 이상 교회의 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폐물로 처리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세에 이르러 세계 선교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을 사용하심이 분명합니다. 말세에 와서 천국 복음이 모든 인간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사역은 교회를 통하여 아루어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계획하셨으며, 21세기의 큰 인구 60억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또 진리를 가르칠 방법을 따로 정해 두셨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배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21세기 교회의 상태와 입장을 열거해 보았습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상황을 "산당(山堂)을 짓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달에는 산당을 말씀하신 성경 구절 몇 군데를 읽어보고, 다음 달에는 그 말씀과 21세기 교회의 상태를 비교하는 공부를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레 26:30-31)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작은 산과 시내와 골짜기를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로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너희 제단이 황무하고 태양상이 훼파될 것이며 내가 또 너희 중에서 살륙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겔 6: 3-4)

이상의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 계획의 중점이 21세기 60억 인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음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위의 구절에서 산당은 현대 교회를 지적하며, 이 산당을 짓고 있는 현대 교회에서 도망쳐 나와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과 같이 공부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대우 가족 드림

10/14/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