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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께 드립니다 (방언에 대하여)

목사님 그 동안 안녕하신 줄 믿습니다. 그간 소식이 없어 궁금할 뿐 아니라, 목사님께서 약속하신 모임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아직도 있는지---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달에 약속드린 대로 성경말씀 중에서 "방언"에 대한 가르침을 찾아보겠습니다. 제가 드리는 글이 모든 사람의 비평을 받기를 원합니다. 제가 잘못 이해하는 부분을 목사님께서 교정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기대하며, 그러므로써 제가 말씀을 공부하는데 그릇되게 나가지 않게 되리라 믿습니다.

방언에 대하여 오래 전에(1994년에) 공부하고, 그 현상이 "가장 현저한 말세의 징조"임을 발표한 바가 있으며, 그 글을 목사님께 보내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이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이유를 몇 가지 요약하면,

첫째 말세의 징조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운영되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멀리 떨어져 가는 상태이며,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태를 예상하시고 글로(성경말씀으로) 분명하고 정확한 율법을 주셨지만, 그것보다는 인간의 육감을 믿고 따라가는 때가 바로 말세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성경구절이 요한계시록 22 18-19절입니다.

"내가 이 책에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 구절의 가르침은 물론 성경말씀이 아닌, 인간이 만든 교리를 가르침을 지적합니다마는, 보다도 더 조심해야 할 현상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기사와 이적을 인간에게 행하신다는 잘못된 믿음을 대한 경고하십니다.

방언은 기사이며, 기사와 이적이 절대로 택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속해 있지 않음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며 경고합니다. 이에 대한 성경구절을 지적하여 공부하기 이전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몇 가지 현상을 들어보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Harry Poter): 아시다시피, 최근에 출판된 책이 큰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책의 이름은 "Harry Poter"라는 12세 소년의 얘기이며, 5,300,000권을 초판에 출판하였으며, 세계 역사상 초판의 권수가 100만이 넘게 출판된 책은 지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아동들을 위하여 동화와 같이 쓴 책이지만 아동들이나 장년들에게 상관없이 내용을 즐겨 읽는 다고 합니다. 제게 관심을 끌게 하는 것은 얘기의 줄거리입니다. 그 얘기 줄거리는 주인공 Harry Poter라는 남자아이가 상상의 세계, 마술의 세계를 여행하며, 계속 앞으로 일어날 마술의 예상이 너무도 아슬아슬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밤을 세워가며 읽는 다고 합니다.

책의 저자는 영국 여인으로, 이혼을 하고, 한때 정부의 복지금(福祉金)을 타서 생계를 유지해 온 여자였지만, 지금은 그녀의 재산이 20억불(2 billion)이 쉽게 능가할 것이라고 합니다.

장난감, 마술의 세계: 7월 중순에 손주들 셋이 Switzerland에서 왔습니다. 아이들 나이가 6-9세인데, 하루 종일 집안이 떠들썩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즐기고 있는 장난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 아이들이 가장 즐기고 있는 장난감이 포키만 카드(Pockeman Card)입니다. 포키만은 일본사람의 작품으로, 그 뜻이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괴물"(Pocket Monster)이며, 가상한 여러 가지 짐승들이 주인공(어린아이들)을 호신하며, 마술을 부린다는 얘기를 담은, 아이들 손바닥만한 그림 카드입니다. 그 카드의 종류가 꽤 많으며, 이 카드를 아이들끼리 교환하며, "나는 무슨 카드가 있다"고 자랑함으로써 아동들 세계에서 자신들의 부유함을 과시합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두 손자들과 지내면서 장난감을 하나씩 사 주기로 약속하고, 장난감 가게, "Toys R Us"에 갔습니다. 놀란 것은 장난감의 반 이상이 다 포키만의 장난감이며, 포키만책, 포키만 표시를 한 물품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아동들의 세상이 온통 포키만으로 점령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상상의 세계, 마술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조물주께서 이 인간을 내려다보시고 무엇이라 하실 까 상상해 보시겠습니까? 목사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방언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기대하실 수 있겠습니까?

기사와 이적: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세상의 말세를 너무도 잘 상징합니다. 마술의 세계는 사단의 세계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마술의 세계를 동경하며 살게됩니다. 말하자면 방언의 현상도 이 마술의 한 종류가 된다는 저의 판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술의 세계에서 살 수 없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마술의 능력이 산신(山神)에게서 온다던가, 어떠한 잡신(雜神)에서 온다 할 때, 그 문제를 이해 할 수 있게됩니다. 말세에 가면 사단도 어느 정도 기사와 이적을 행할 것이라는( 24:24) 성경말씀을 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기사와 이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할 때는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요한계시록 22 18절을 위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2 18-19절은,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일하게 존재함을 선언하신 것의 결론입니다. 이 하나님의 결론은 아주 논리적입니다. 성경이 완성되기까지 여러 가지 기사와 이적을 하나님께서(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시고, 선지자들이나, 제자들이 행하였습니다마는,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충분한 하나님의 계명이 완성된 후로는, 인간의 혼돈을 없게 하시는 그 방법으로 요한계시록 22장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만일 이 하나님의 선언이 없었던들 하나님의 말씀을 천권 만권으로 기록해야 되었을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를 찾는 과정이 몹시 어렵게 되었을 것입니다. 한 권으로 된 책, 하나님의 말씀이, 특히 현대인에게 고맙고 귀중한 책임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기사와 이적은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정의되며, 방언이 기사임은 누구나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방언은 특히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유행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도 세계적으로 선교사들을 보내며, 방언이 세계선교와 동시에 퍼져가고 있습니다.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잘못된 길을 앞장서서 가는 것이 한국 기독교입니다.

시험을 치르는 인생: 방언이 왜 잘못되었는가 하는 것을 성경에서 찾아보기 전에, 왜 한때는 고린도 교회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셨고, 사도바울도 방언을 했었는가 하는 생각을 먼저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시험과 동시에 시작됩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선악을 아는 과실나무를 심어 놓으시고, 인간이 얼마나 자기 말에 순종하는 가를 시험하신 것과( 2:16~17) 동일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해롯 왕이 두 살 난 사내아이를 살해하는 시험 속에서 살아나셨고, 복음을 전도하시기 직전에 40일간을 광야에서 사시면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은, 우리에게 본이 되신 바입니다.

모든 인간들도 나면서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특히 학교 제도는 시험을 치르는 과정이며,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또 대학을 합치면 16년간을 수 백 번 시험에 합격해야만 어느 정도 사회생활에서 제 구실을 하고, 특히 한국에서는 계속하여 취직 시험 이라든가, 국가 고시를 합격해야만 관리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목사님들도 교단에서 목회를 하기 위하여 치러야 하는 시험이 있는 모양입니다. 방언을 하는가 안 하는가의 시험은 결국 우리가 어느 나라의 말을 하는가의 시험입니다. 오래 전에 쓴 편지에서, 방언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첫째, 사도행전에서 읽는 방언은 전혀 알지 못하던 외국어를 알게 되어, 처음 만난 외국인과 복음을 나누며 교제한 경우였으며, 둘째로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방언은 세상에 허다한 민족과 언어가 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받을 때 한결같이 한 방언, 하나님 나라의 언어(천국어)를 사용 할 것이라는 결론입니다. 셋째로, 다른 한편, 그린도전서 12-14장에 나타난 방언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경우이며, 이 경우가 사도행전에서와 요한계시록의 경우와 다른 점은, 말하는 사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방언을 성경은 이스라엘이 알아 듣지 못하던 침략자 앗수르의 방언을 지적하여 하나님께서 예언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이스라엘 족속아 보라 네가 한 나라를 원방에서 너희에게로 오게 하리니 곧 강하고 오랜 나라이라 그 방언을 네가 알지 못하며 그 말을 네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5:15)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함으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시리라"( 28:11-13)

하나님의 경고: 이상의 이스라엘에게 대한 하나님의 경고와 예언이 이스라엘의 역사로만 존재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말세의 교회와 일대일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고 하신 바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시는 것과 동일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이 분명했고, 또 하나님의 보호가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이방인들의 신과 풍습을 원했던 것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경우도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 8:5)라고 백성이 사무엘에게 고할 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고 하셨습니다.

지금 교회의 방언의 현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충분하고 분명함에도 불고하고, 그것이 못 마땅해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방인(사단)의 말을 사모하는 것이 말세를 눈앞에 둔 현재의 기독교입니다. 제가 이 사실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 본문을 읽어 가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4 21-22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 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과 방언: 이 구절들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첫째, 얼마 전에 지적한 바, 이사야 28장을 사도바울이 인용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한 역사가, 현대 교회의 방언을 말하는 현상과 일대일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 다음은 "믿는 자" "믿지 아니하는 자"의 분간입니다. 여기에서 "믿는 자" "구원받은 자"의 동의어임이 분명하며, 구원을 바라고 천국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비상처럼 무섭게 생각하고 멀리 해야 되는 것이 방언입니다. 셋째로 기억할 것은, "예언이 믿는 자의 것임"을 강조하여 말한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분부하신 것이 바로 "예언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 거듭나는 순간 "예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선지자들에게나 사도들에게 주신 예언의 내용보다도 더 충분하고 확실한 내용입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예언의 은사"를 어떻게 "이방사람의 방언"과 대처하겠습니까?

혹 말하기를 "사도바울도 방언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경험한 여러 가지 기사와 이적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도바울처럼 설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도바울이 한 것이 어떻게 우리 행동의 기본이 되겠습니까? 우리 신앙의 기본은 오로지 말씀에 있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방언 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고 하지 않았는가? 왜 방언이 잘못된 것으로 보느냐? 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 속에 숨겨두신 하나님의 참뜻을 찾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심중을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가"를 보십니다. 결국은 고린도전서 14장이 방언을 금하지 않는 것처럼 보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고린도전서 14장이 방언을 부정하는 말씀임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고전 14:8), "야만이 되고"(고전 14:11),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다섯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9),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23), 등의 부정적인 가르침을 외면하고 자기 욕심대로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고전 14:4),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헛소리를 하는 것이 방언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방언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가르치면서, 또 다른 각도에서 방언을 볼 수 있도록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고 했으며, 달음질에 "폐하고"의 뜻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9~10)

말할 것도 없이 이 구절에서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세상의 종말을 말하며, "부분적으로 알고"는 천국에 대한 부분적인 지식이며, "부분적으로 예언하니"는 말세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부분적인 예언입니다. 그러나 "방언"은 그 시기를 지적하지 않았지만, "그치고"라고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그치고"의 시기가 장래에 올 것이라고 말하실 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종합해 볼 때, 성경이 마감되는 순간 방언은 그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택하신 백성들의 혼돈을 제하신 것이며, 백해무익한 "일만마디"(고전 14:14)를 바라지 말고, "다섯마디"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기사와 이적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것: 오늘은 예수님께서 기사와 이적에 대하여 직접 말씀하신 곳을 몇 군데 찾아보고 편지를 마감하겠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13:38, 8:11)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13:39)고 하셨습니다. 또한 표적(방언)은 외식하는 자들이 구하는 것이며 또 사단이 구하는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24 24~25절에,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또 모세에게 명령하신 명령은 목사님들에게 또 하시는 명령입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시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쫓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13:1~3)

이 말씀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방언에 대한 결론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십니까? 회개하고 사단에게 속한 방언의 역사에서 떠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잘못된 것을 알고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육신의 생계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우리의 소유를 영생과 대처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된 "마술을 행하던 유대인들"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 () 50,000의 값이 되는 "마술 책"을 불사른 기록이 있습니다. 그 은의 현대 싯가가 약 6,400만불 이라고 합니다.(Nelson 성경사전 참조) 그리고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육신의 생계를 포기하고, 육신이 굶주릴지라도 영생하는 복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던 중에, 불순종의 길을 선택했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불신자들의 길, 방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목사님들에게 "마술 책을 태운 유대인"들 처럼 은 50,000보다 더 큰 값을 치른다 할지라도, 방언이 사단의 농간임을 알고서야 어찌 그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말세가 코앞에 다가와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회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이대우 드림, 7/27/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