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獄中) 수기(手記), 나의 간증(干證)

For A Testimony

저자: Bruce Hunt, Missionary in Korea

옮긴이: 이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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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군소리

머리말

제 1장 체포되었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제 2장 한 죄수만 들어가게 만든 감방

제 3장 벽에 쓴 글

제 4장 숫자 "22"

제 5장 새 노래

제 6장 기도와 금식

제 7장 목욕과 이발

제 8장 내가 여기에 있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한

제 9장 나는 부활에 대하여 심문을 받았다

제 10장 석방은 되었으나 자유는 없다

제 11장 늦었다, 전쟁이 선포되었다

제 12장 음침한 골짜기에 다시 들어가다

제 13장 약할 때 생기는 큰 힘

제 14장 강제수용소와 인물 교환

 

옮긴이의 군소리

오늘은 우연한 기회로 친구가 보내준 소책자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소책자의 얘기는 이차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미국 선교사 부루스 헌트 (Bruce Hunt) 목사가 만주 할빈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 격은 옥중 수기입니다. 이 목사님의 신앙이 너무도 확실하고, 목숨을 내 걸고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간증을 혼자만 읽을 수 없어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합니다. 이 목사님의 수기는 그 내용이 아주 실감이 있을 뿐 아니라, 그 분의 평생을 두고 한 선교 활동이 한국과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것을 알게될 때, 이 책은 외국인의 얘기가 아니고, 내가 당한 일을 회상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국인을 사랑한 헌트 목사에게 친근감을 느낍니다. 또한 이 헌트 목사님이 저희들이 속해있는 Orthodox 장로교회의 선교사라는 일로 더욱 더 친근감을 느낍니다.

감리교회의 교리와 Arminianism에 대하여 편지를 쓰기로 한 계획을 다음으로 미루고 앞으로 얼마동안을 이 책을 번역하는데 노력하겠습니다,

이대우 드림, 3/30/97

소책자를 소개하는 표지의 글

이 책은 한국사람들과 같이 살면서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 장로교의 선교사 부루스 헌트(Bruce Hunt)가 이차대전 당시 만주를 침입하고 점령한 일본인들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에 당한 일을 쓴 옥중 수기이다.

학대를 받고, 굶주리고, 고문을 당하고, 석방을 받은 후 며칠이 못되어 다시 체포당했지만,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므로 살아났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게 된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존경을 품게 하는 것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아끼지 않고 고난을 받을 때 저자는 그 무거운 짐을 같이 지고 나갔다는 사실이다. 학대(虐待)를 받으면서도 꾸준하게 신앙을 지켜나가는 그의 수기는 선교 사업에 몸을 바친 사람들에게 크나 큰 용기를 준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Edward J. Young교수의 말: 헌트 목사는 Orthodox장로 교단이 크게 존경하는 선교사이다. 그는 한국에서 출생했고, 우리가 다 찾아낼 수 없이 풍성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그는 일생을 한국에서 헌신했다. 그가 걸어온 헌신적인 선교사업은 하나님의 큰 축복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이 소책자를 구성한 페이지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빛을 내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기대하는 보통의 책이 아니다. 어려운 시험 중에서도 주님께 충성을 다한 놀라운 기록이다. 이 책은 모든 그리스도인 들이 읽어야 하며, 만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그리스도인 생활의 오묘한 비밀을 알게될 것이다.

책 첫 페이지에 아래와 같이 썼습니다.

"내 아내 캐씨(Kathy)의 부모님과 내 부모님에게 이 책자를 바칩니다. 그들은 40년이 넘도록 일생동안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복음의 씨를 한국에 뿌렸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여러 교회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옥중(獄中) 수기(手記), 나의 간증(干證)

머리말

감옥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이십 년이 넘은 내 편지에는 나(I)라는 대명사를 수 없이 쓰고 있다. 이 편지를 지금에 와서 보내고자 한다. 내가 어떤 특이한 일을 했었다는 것은 아니며,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입장에 있었든 것을 나는 안다. 또한 나는 내가 특별히 용감했거나 대담했었다는 것도 아니고, 보통 이상의 고난을 당했다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몹시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했고, 수년 동안을 감옥에서 살았다. 내가 지금에 와서 편지를 보내는 이유 중의 하나는 옥중에서 기도 중에 하나님께 맹서(盟誓)한 것을 시행하는 것이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시142:7)

한국이 해방된 후 1946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알게 된 것은, 내가 속해 있던 70명의 죄수 중 3명이 목숨을 바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간증을 인봉(印封) 하였다. 그 세 사람은 안용애와 김윤섭과 김신복이다. 김신복은 아주 젊은 여인으로서 심한 고문을 견디고도 살아 남아 해방을 마지 했지만 결국 후유증(後遺症)으로 곧 죽고 말았다고 한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모두가 석방 되였고, 그후 꽤 많은 형제들이 북한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북한에 남아 있어야할 이유는 그들이 거느리는 양떼를 뒤에 두고 자신들만이 남한으로 도망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 여러 사람들은 UN이 북한을 공산 국가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말하기는 시간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믿었으며, 하나님께서 천황(天皇)을 신으로 섬기게 하는 일본 독재로부터 한국을 해방하셨으니, 무신론자인 공산당의 손에서도 해방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지금까지 공산당의 손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졌다. 남한에 있는 우리는 북한에서 사는 우리 형제들로부터 소식을 들을 길이 없다. 축의 장막이며 철의 장막이라고도 할 수 있는 38선을 빠져 넘어 온 형제는 최한지 전도사의 소식을 전했다. 최 전도사는 옥에서 석방된 후 마을과 마을을 전전(轉轉)하면서 복음 전도 집회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도 지금은 공산당 손에 죽었으리라고 생각된다.

70명중에 한 사람이던 천봉선 전도사를 나는 가끔 만난다. 그는 그때 12년의 징역 언도를 받았고, 같은 때 15년 징역 언도를 받은 김윤섭 전도사에 대한 얘기를 나에게 전해 주었다. 김전도사는 감옥에서 15개월 동안 심한 고초를 받은 나머지 마침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보내면서 책이 출판되도록 만든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우선적으로 그 어렵던 나날을 나와 같이 함께 지낸 내 아내 캐씨와 아이들에게 이며, 그 다음으로 Van Gundy부부에게 이다. Van Gundy부부는 National City, California에서 우리가 Paradise Hill Orthodox 장로교회에 다닐 때 원고를 쓰도록 권유해 주었고, 원고를 타자 치고, 교정하고, 또 여러 가지 일을 맡아 준 분들이다. 또한 나는 일리노이주에 있는 Weaton대학의 동창이었든 Miss O. Muriel Fuller에게 감사하는 것은 그가 많은 출판 경험을 가진 분으로 책을 출판하도록 격려하고 도와준 일이다. 그 후 원고를 거의 망각하고 있을 때, 젊은 학생 Danny Foster가 그의 관심을 전해 준 것이다. 우리가 원고를 New Jersey에 있는 갈보리 Orthodox 장로 교회 다락에다 임시로 보관했던 것을 그가 발견했고, 그 원고를 친구들과 돌려 읽어본 다음에, 원고를 다시 편집하여 출판하도록 나에게 권유해온 것이다.

나는 또 특별히 우리 사위인 John J. Mitchell목사에게 감사하는 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교정을 보고 출판할 수 있도록 정리해 준 것이다. 출판을 주선해 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인 Edward J. Young박사에게 또한 감사한다.

나는 기도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소책자를 보내며, 그들이 어려움에 처할지라도 크신 능력의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게되는 큰 용기를 주시기를 바란다.

1966년 3월 29일, 부루스 F.헌트, 한국 부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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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체포되었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1941년 10월 22일이었다. 하와이 진주만 폭격이 있던 한달 반 전이다. 만주 할빈에는 벌써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우리 집 다이닝룸(dining room)은 아늑했다. 우리 딸들 셋은 늘 얘기듣기를 좋아했으며, 내가 막 방문하고 돌아온 개척교회의 얘기를 해 달라고 졸라댄다. 식탁 건너편에 자리잡은 내 아내, 캐씨는 어린 아들 David에게 아침을 먹이려고 애를 쓰고있었고, 나는 David의 쌍둥이 누이 Mary 에게 아침을 먹도록 타이르고 있었다.

갑자기 초인종이 울리자 러시아 시녀가 문간으로 나갔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던 것은 경찰들이 우리 집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약 6-7명으로 보였으며, 3명의 일본인과 중국인과 한국인들이며, 일본인이 지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그들을 현관 안으로 들어오도록 권했다. 한국인 박 순경이 소환장을 낭독하였다. 그와는 그전에도 앞면이 있는 사이였다. 나는 소환장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소환장은 나에 대한 체포령(逮捕令)이며, 나는 평화롭게 응할 것이며, 그렇지 않을 때에는 강제로 체포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영장이야말로 나를 놀라게 하였으며,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나는 1936년 후 한국사람들을 상대로 미국 Orthodox 장로교단이 파송(派送)한 선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 후 특히 1938년부터 나는 일본 정부가 교회를 통치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일본 천황을 숭배하도록 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반대해 온 것이다. 나는 이전에 두 번 경찰서에 소환되어 오랜 시간의 심문을 당한 적이 있으며, 그 처음 소환은 약 1년 전이었으며, 둘째 번은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그 때 경관이 나를 체포할 것이라고 협박한 것을 기억한다. 그들은 비밀리에, 혹은 경우에 따라 공개적으로 나를 뒤 좇아 다녔든 것이다. 정부의 통제하에 있는 신문은 내가 하고 있는 사역(使役)에 대하여 반대하는 기사를 게재(揭載)한 적이 있다. 지난 일년동안 나의 한국인 동역자들이 투옥되었다. 최근에 전 북녘(北域) 만주에 있는 상당한 수의 교회에서 70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투옥된 것이다. 꼭 십일 전에 아주 젊은 학생 이준호가 바로 우리 집 현관에서 이 박 순경의 손으로 체포된 것이다. 사실상 너무도 많은 한국 친구들이 체포되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된 것이 아버지는 감옥에 가지 않나요?"라고 묻기까지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차례가 온 것이다. 경찰대를 지휘하는 우두머리 경찰관이 "감옥에 갈 준비를 하시오"라고 내게 명령하였다. 내가 침실에서 짐을 꾸리기 시작할 때 순경 한 명이 내 뒤를 따라와 나를 감시하였다. 같은 때에 다른 경찰들은 건너편 집에 살고 있는 장로교 외국선교회 독립협회(Independent Board for Presbyterians Foreign Missions)의 Roy Byran의사 내외에게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Byran의사 내외는 우리와 같이 한국인 선교의 동역자들이며, 우리가 천황 숭배를 반대하는데 같은 신앙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내 캐씨((Kathy)는 자동적으로 나를 따라 침실로 온 후 기계적으로 내가 필요한 옷들을 챙겨주었다. 그에게는 이러한 경험이 처음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번 내가 경찰에서 심문을 받았을 때 캐씨는 만일을 알 수 없어 옷을 챙겨둔 적이 있다. 캐씨는 아주 두터운 두벌의 내의와, 털 양말과, 털장갑과, 오버코트와, 모자와, 신을 꺼내어 주었다. 나는 캐씨의 빈틈없는 깊은 사려(思慮)에 대하여 여러 번 감사한다.

아이들은 너무 어려서 영문을 모르고 흥분만 하고 있다. 우리 큰 아이와 시간을 맞춰 같이 공부를 하는 유대인 아이 Ida Rappaport가 막 들어왔다. 그 아이와 같이 공부하는 여덟살 짜리 우리 맏딸 Lois는 그에게 아주 소중한 초콜렛 두 개를 종이에 싸서 내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사실은 밤이 되어 내가 감방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 초콜렛이 유일한 저녁 식사였다. 짐을 다 꾸리고 난 다음에 현관으로 갔다. 현관에는 두 경찰이 무뚝뚝하게 앉아 있었다. Byran 내외를 체포하러 간 경찰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아내 캐시는 내 곁에 바짝 앉아 있고, 큰딸들 셋은 나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우리 쌍둥이들은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그들의 작은 푸른색 의자를 끌고 다니면서 순경들의 무뚝뚝한 모습을 못 마땅히 여기는 듯하였다.

나는 우리의 서재(書齋)이며 사무실인 현관방을 둘러보았다. 양쪽 벽으로 책들을 진열해 둔 이 방은 아늑하고 아담하다. 놋쇠로 만든 한국산 촛대가 윤을 내면서 책장 위에 장식된 나비 공작품을 멋있게 반사한다. 맞은 편에는 골동품인 고려자기 화병이 장식되어 있고, 또 다른 쪽에 눈을 돌리면 동양 미술품과 서양 미술품이 섞여 진열되어있다. 이러한 미술품은 대개가 우리의 결혼 선물이며, 상당한 감상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방을 늘 즐겨왔는데, 이방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찹찹하다. 우리는 아직도 아침 기도회를 가지기 전이였기 때문에 나는 순경들의 승낙을 얻어 아이들이 성경과 시편을 가져오게 하였다. 우리는 시편 46편을 공부해 왔으며, 모두 목소리를 같이하여 이 시편의 찬송을 불렀다. 아내 캐씨는 나와 마찬가지로 얽혀 솟아 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곡조를 잘 맞춰 노래를 시작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찬송이 끝나고 내가 성경 한 구절을 읽은 다음 식구가 차례대로 기도를 하였다. 순경들에게는 아주 흥미 있는 구경거리였음이 분명했지만 그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Byran 내외는 기다리고 있는 차로 갔다. 내가 식구들을 막 떠나면서 그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우리를 실은 차가 집 앞을 떠날 때 아내 캐씨와 세 딸아이들이 현관에 서서 손을 흔들며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고, 어린 쌍둥이는 러시아 시녀와 같이 창문에 서서 코를 유리창에 눌러대며 내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유난히 빛났고, 가끔 손을 흔드는 것은 아빠가 타고 가는 차가 신기하고, 시야(視野)에서 없어지는 것에 실망한 탓인 듯 하다.

경관들은 우리를 시내에 있는 검찰관 사무소로 데려갔다. 경찰들의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우리 한국 교인 둘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그 중 한 명은 Byran의사 진료소의 간호원이며, 그를 대려온 경찰이 그를 우리와 나란히 서게 하였다. 또 다른 교인은 다섯 명의 아이들을 가진 부지런한 어머니며, 그의 얼굴은 아주 평범하게 생겼다. 그는 혼자서 검찰관 실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며칠 전에 다른 교인들과 같은 때에 체포되었으며, 막내 아이를 감옥에 대려 올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고, 또 다른 아이를 해산할 날이 곧 임박한 것으로 알고 있다. 며칠 전에 그녀는 우리에게 사정을 실토한 바가 있다. 경찰의 심한 협박을 받은 불신자인 남편이 그에게 아주 심한 꾸중을 했고, 아이들이 울어대는 바람에 진술서에다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그 진술서는 "신사(神社) 참배(參拜)를 할 수 있다"라는 고백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왜 그녀가 여기에 다시 왔는지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진술서에 다시 도장을 찍으라고 호출을 받았어요" 언제나 신실하게만 보이는 장신애 여인의 얼굴상은 아주 화가 나서 흥분한 것처럼 보였고, "나는 사는(*죽는) 것만도 못해요"라고 하소연하듯 진정서에 도장 찍은 것을 후회하는 눈치다. *원문에 저자는 "Sa nun gut man do mot hay yo"라고 했으나 "죽는 것만도 못해요"라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경찰은 그녀에게 무엇인가 중얼댔지만 그녀를 때리지는 않았다. 대개 내가 본 경험으로는 일본순경들은 사소한 일에 성을 잘 낸다. 경찰은 그녀에게 "집에 가시요. 아이를 놓은 다음에 우리가 가서 다시 당신을 만나 보겠소"라고 소리질렀다. 우리는 신애 여인이 건물에서 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신앙과 앞으로 낳게될 아이가 건강하기를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를 바랐다. 이렇게 신도들의 경험을 듣고, 보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인가! 지금은 우리 차례가 돌아왔고 시험을 받을 때가 된 것이다. 얼마쯤 있다 순경들이 우리를 유치장으로 대리고 갔다. 그들은 우리를 벽 아래 놓인 긴 나무 걸상에 나란히 같은 간격을 두고 앉도록 명령하였다. 우리는 서로 얘기를 못하도록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남은 여가는 성경을 읽으면서, 심문을 받을 때 인용할 성경 구절들을 찾아 두었다. 유치장 감방(監房) 중앙에 놓인 간수 책상 너머로 창살을 박은 큰 감방이 보인다. 그 감방은 일반 죄수들을 수용하며, 순경들이 몇 명의 죄수들을 대리고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며칠 동안 내가 심문을 받는 동안에 나는 그 감방에서 기다렸다. 그 감방에 있는 동안 좌수들이 순경과 숙은 거리는 것을 들었고, 그들은 석방되기 위하여 흥정을 하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죄수의 친척이 감방밖에 와서 머리로 창살을 치며, 울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잡아넣게 한 법을 원망하기도 했다. 우리는 석방을 위하여 흥정을 하지 않았으며, 우리를 유치한 정당한 법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여하간 감옥 안의 관경(觀境)들이 모두 슬픈 일들이다.

마침내 약 열 한시 경에 우리를 이층으로 데려가서, 검찰관이 개개인을 상대로 심문을 시작했다. 열두시 경에 우리는 경찰실로 내려와 중국 국수와 사과를 사 먹도록 허락을 받았다. 오후에는 심문이 또 계속되었다.

날이 어둡게 되자 우리를 차에 집어 싣고 시내에 있는 붉은 벽돌 감옥으로 이전하였다. 그 감옥은 우리 수많은 한국 형제 교인들이 고난을 당한 곳이다. 이 감옥은 우리 집에서 겨우 세 부락쯤 떨어져 있지만 우리 세계와는 상거(相距)가 있는 곳이다. 감옥에 들어가는 문간에서 우리는 조사를 받았다. 허리띠, 넥타이, 시계, 만년필, 보석 같은 것을 빼앗은 다음 빼앗긴 소지품의 목록 표를 만들었다. 그리고 난 다음 우리를 감옥 속으로 대려 들어갔다.

감옥은 여러 개의 감방들이 나란히 된 두 개의 긴 건물을 서로 등을 데고 붙여서 만든 것이다. 두 건물을 연결한 뒤의 높은 벽은 시멘트 콘크리트로 되어 있고, 건물 앞에는 시멘트 바닥의 통로를 두고 있다. 감방 사이의 칸막이는 시멘트로 되어 있고 각 감방 전면은 나무 창살이 천장까지 닫게 박혀 있었다. 나는 많은 죄수들이 들어있는 몇 감방을 지나가 간수가 기다리고 있는 감방에 이르렀다. 그는 신을 벗으라고 명하였고, 석자밖에 안되는 감방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라고 눈짓을 했다. 나는 작은 감방 문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허리를 굽혀야 했다. 이 방은 네모난 길쭉한 방으로 깊이가 20자 쯤 넓이 10자 쯤이며, 3면이 콘크리트 벽이며, 앞면은 나무 창살로 되어있다. 나는 들어가자 감방 바닥에 수 없이 많은 사람들로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 24명의 죄수들이 한쪽에 12명씩 머리를 벽 쪽에 두고 두 줄로 나란히 누어 있었고, 그들의 다리는 방 중앙에서 서로 맞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서서 있을 곳도 찾기가 어려웠고 앉아보거나 누워볼 생각은 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 자리를 얻기를 바라면서, 감방 중앙을 향해 발을 디뎌볼 양으로 좌우를 번갈아 살펴보았다. 그러나 빈자리가 없었다. 마침내 나는 감방 뒷벽에 겨우 기대어 서 있게 되었다. 밤새도록 내가 이렇게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가 찰 일이었다. 나는 더 이상 자유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 아님을 알았고, 이러한 사정을 얘기할 만 한 상대가 없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어쨌든 최선의 결과를 찾기 위하여 감방 마지막 자리에 누어있는 사람의 두 다리를 번쩍 들어 내 다리 위에 얹고 등을 시멘트 콘크리트 벽에 대고 앉아 밤을 새웠다.

감방 마루는 나무로 되어있었고, 24명의 죄수들이 앉고, 눕고 하며 비비적거리니 마루바닥은 윤이 나게 반짝였다. 내가 앉아 있는 곳에서 뒷간에 손이 닿고 또 만져 볼 수 있었다. 통풍이 전혀 없는 감방은 이 뒷간 뚜껑을 닫아두어도 냄새가 흉악하다. 그러나 그 뚜껑을 밤낮 없이 열고 닫을 때는 그 냄새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래도 뒷간에서 좀 떨어진 자리는 공기가 맑은 샘인데, 내 자리는 바로 그 뒷간 옆이란 말이다. 내가 자리에 앉자 간수는 가버리고, 내 새로운 감방 동반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질문을 시작했다. 단순한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이러한 곳에 들어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을 그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일본 천황(天皇) 숭배(崇拜)와 일본 정부가 교회를 통치하는 일에 반대했다는 얘기를 했을 때, 어떤 죄수들의 얼굴에는 존경한다는 표시를 보여주었다. 어떤 죄수는 다음 감방에 젊은 한국 교인을 알고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해 주기도 했다. 바로 그 젊은 교인이 17세가 된 이준호 이며, 그는 10일 전에 우리 집에서 체포되었다. 그들은 이준호 청년을 볼 수는 없지만, 감옥소 안에 있는 비밀 정보망을 통하여 알고 있다. 이준호 청년이야말로 자신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참 즐거움을 죄를 짓고 감옥사리를 하는 죄수들에게 전해 준 것이다.

나는 내가 온갖 잡종의 죄수들과 같은 방에 감금된 것을 알았다. 감방에는 세 사람의 러시아인들과, 일본인 한 사람과, 그리고 20명의 중국인 죄수들이 있었다. 일본인은 전직 순경이며 정부의 돈을 횡령한 죄로 감금되었고, 한 러시아인은 돈이 많은 부자이며 외환을 교환하는데 투기한 죄로 잡혀왔다. 그는 거의 일년을 이 감옥에서 살고 있다. 어떤 죄수는 감옥 안에 발진티푸스 전염병이 나돌 때 들어와 죽을 번 했고, 그 탓으로 아직도 재판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미국에 가 본적이 있어 제법 영어를 하며, 그는 우리의 감방을 국제 호텔이라고 불렀고, 현대식 문명의 이기로 장식된 곳이라고 익살을 떨었다. 내가 바로 그 문명의 이기(뒷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잡은 것을 다 알고있지 않은가!

또 한 젊은 사람의 자초지정을 들으면 자기는 무죄하며, 그는 단순히 자기부모가 아직도 살고 있는 러시아에 갈려고 여권을 신청한 일로 잡혀왔다고 한다. 그는 공산당과 함께 있었다는 죄목을 받고, 아무도 밖에서는 그를 옹호(擁護)해 줄 친구가 없어 그의 형은 종신징역을 받은 것 같다. 세째 러시아인은 아편중독자이며, 떠돌아다니던 거지이며, 중국인 아편 중독자와 똑 같이 더러운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에는 이가 득실대고, 옷 거죽에도 이가 슬슬 기어다니었다.

중국인들은 가지 각층의 사람들이었다. 몇몇 중국인은 시내에서 사는 갑부로서 경호원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또 몇몇 중국인들은 도시 사람들과 달리 세상물정을 모르는 농사 군들이다. 내 바로 옆자리의 중국인은 두 다리에 쇠고랑을 찾는데 감방의 모든 죄수 중에 다리에 쇠고랑을 찬 죄수는 이 중국인밖에 없었다. 그는 체격이 아주 건장하게 생겼지만 감방 죄수들 중에서는 가장 소망이 없는 궁지에 빠져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산적(山賊)이며, 일본인들을 여럿 죽인 일로 체포되었지만 감방의 죄수 동지들은 그를 애국자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살인자의 진상이, 이 죄수의 생명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 덜 중요하다고는 할 수 없지 않는가? 이렇게 잔인한 발 쇠고랑때문에 그의 발목이 붓고, 상하게 하였고 염증이 생기게 만들었다. 또 다른 죄수 하나는 그에게 소매를 걷고 다른 상처를 보여주라고 하였다. 이 화상은 경찰이 그의 공범자(共犯者)를 알아내려고 신문지에 불을 질러서 한 고문(拷問)의 결과라고 한다. 그의 상처를 전혀 본체만체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더러운 신문지를 아픈 상처에 대고, 흙이 잔뜩 묻은 겉옷에 상처가 스치지 않게 한다고 한다.

내가 앉은 자세가 거북하고 옹크려야 했지만 첫날밤은 그런 대로 잠을 잘 수 있었다. 체포되었을 때 신경을 너무도 썼기 때문에 아주 피곤했던 모양이다. 간수가 아침이 되었다고 소리를 질렀다. 천장에 매달린 전등은 밤낮없이 켜져 있지만 떠오른 해는 그 햇살을 감방 안으로는 보내지 않는다. 간수가 명령하는 대로 우리 25명은 모두 일어서 방안을 돌기 시작했다. 뒷간 앞에 줄을 세우며 나란히 섰다. 용무를 마치고는 제자리로 돌아가 웅크리고 앉거나, 양쪽 벽에 등을 기대며 앉는다. 영어를 할 줄 아는 러시아 친구가 앞뒤로 설렁대다가 군중을 뚫고 지나가 감방 중앙으로 걸어갔다. 일본인 죄수와 반반하게 생긴 중국인죄수 둘이 러시아 친구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간다. 나도 그 사람들 뒤를 따라 걸었지만, 20쌍이 넘는 눈초리가 항상 내게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고 좀 수줍어졌다. 공산당원으로 지목된 젊은 러시아 청년은 창살에 얼굴을 대고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어마신다. 그는 속내의 바람으로 서 있기 때문에 다른 죄수들이 부러워하듯 쳐다보고 있다. 그는 바지를 벗어 접어 두고 확실치는 못하지만 조만간(早晩間)에 출옥할 때 입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방안을 설렁대고 있을 때 간수가 손으로 말아서 만든 골련 둘을 제가 좋아하는 죄수에게 슬쩍 쥐어준다. 나머지 죄수들은 마치 굶주린 짐승들이 음식 부스러기를 찾는 것처럼 몰려 한번만 골연을 빨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런데 일단 골연을 입술에 대면, 그 한번이 너무 오래가기 때문에 다음 사람이 한번 빨기 위해 잡아챈다.

지금 막 간수는 뒷간을 씻어 내릴 한 물통의 물을 가져왔다. 물을 뒷간에 부어 쏟는 동안 모두 벌떼처럼 모여들어 그 물로 손과 얼굴을 적시기를 애썼다. 둘째 물통의 물이 왔을 때 나머지 죄수들이 또 모여들었다. 나도 그들과 어울려서 내 손과 얼굴을 적셔 볼까? 그렇지 않으면 그냥 내 자리에 앉아서 모양이 어떻든, 손이 더럽든 신경을 쓰지 말고 보고만 있을 것인가? 나는 다른 죄수들처럼 애를 쓰지 않고도 물을 손에 받을 수가 있었다. 간수는 밖에 서서 빨리 물을 뒷간에 부어 버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난 다음 아침 식사가 들어왔다. 러시아인들과, 일본인과, 내 아침밥은 쌀밥에 콩이 몇 알 섞인 것이었다. 중국인들의 아침은 까실 까실 한 수수밥에 콩이 좀 들어있었다. 이러한 차별대우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쌀밥을 받은 죄수들은 수수밥을 먹는 중국인들과 조금씩 교환하였다. 나는 살인 죄수와, 또 밥을 더 먹으려고 무척 애쓰는 중국인에게 나누어주었다. 밥을 먹기 위하여 간수가 마루바닥에 던져 넣는 절까락들 중에서 깨끗한 쌍을 서로가 집으려고 애를 썼다. 식사가 끝나면 절까락을 회수해 가며, 그 절까락을 씻지도 않고 그냥 다시 가져와 마루바닥에 던져둔다. 절까락에 음식이 아직 묻어 있는 것을 본다. 감옥에서 이질병으로 죽는 죄수가 숫하게 많은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절까락을 집을 때 누가 쓰던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 있겠는가? 밥을 다 먹고 밥그릇이 비워지면 뜨뜻한 물을 담아주고, 그 물을 다 마신 다음에는 밥그릇과 절까락이 회수된다.

이러한 중에 식료품 상자가 영어를 할 줄 아는 러시아 사람과, 부유한 두 중국인들에게 들어왔다. 식료품 상자 속에는 치즈, 쏘새지, 과자, 우유와, 과일 등이다. 그들은 나머지 감방 죄수들이 부럽게 쳐다보는 중에서 열심히 먹었다. 음식을 깨물 때마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따라다니며, 군침을 흘린다. 그들은 식료품을 좀 남겨서 친하게 지내는 동요 죄수들과, 발목을 묶인 살인범 죄수와, 중 환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들도 우리가 쳐다보고 있는 동안 그러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몹시 어색한 것처럼 보인다. 그 식료품 상자가 들어 올 때마다 식료품을 싼 종이를 소중히 손바닥만 한 크기로 찢어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준다. 이러한 사역(使役)은 뒷간에서 쓸 종이가 없기 때문에 매일 일어나는 중요한 일과로 변해 버렸다. 나는 나흘을 이 감방에 있었으며, 아침이 되면 밥을 먹자마자 호출을 받아 검찰관의 심문을 받으러 나갔다. 24시간의 하루를 이렇게 혼잡한 감방에서 죄수들과 인생을 두고두고 살아야 된다고 생각해 본다. 사실은 우리 믿는 형제,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경험을 해왔고, 어떤 형제는 일년 혹은 일년 반을 변함없이 따분한 감옥생활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감옥살이가 그들의 건강에 지장을 크게 준 것도 알고 있으며, 그 후환(後患)으로 죽은 사람도 알고 있다.

지난 나흘동안 온 종일 심문을 받고 밤이 어두워지면 우리는 감옥에 돌아왔다. 내가 감방에 돌아오면 여러 사람이 싸늘하게 식은 내 몫의 밥그릇을 둘러싸고 나를 위하여 지키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만일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들은 좋다구나 하고 내 밥을 먹어버릴 참이다. 이 사람들이 얼마동안을 기다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감방에 들어간다. 내 밥은 언제나 제 자리에 있게 마련이다.

첫날 밤 후에 한사람이 감방에서 옮겨졌을 때 나는 즉시 그 빈자리를 알아 낼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죄수들이 내가 첫날밤에 자리 잡은 곳에 그대로 가 있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 둘째 번 저녁은 뒷간 옆에서 자고, 셋째 밤에는 뒷간 뚜껑 위에서 자고, 넷째 날 밤에는 뒷간 맞은 편에서 잠을 잣다. 나는 매일 심문을 받는데 너무도 피곤했기 때문에, 밤중에 뒷간을 쓰기 위하여 나를 깨울 때는 몹시 원망스러웠다.

나는 감방 건너편 쪽 죄수들의 다리들을 어떻게 할 수 없어, 내 다리를 마음대로 펴지 못했고, 내 양쪽 옆에 누어 자는 죄수들이 있어 무릎을 굽히기가 힘들었다. 사람들이 밀접하게 얽혀있어 한 사람이 움직이면 여러 사람들이 그 영향을 받는다. 가끔 가다 한사람이 움직임으로 한 밤중에 말다툼 소리를 내며 싸움이 일어났고 마침내 간수의 호령을 듣고서야 조용하게 된다. 내 바로 옆 죄수는 두 발목에 수갑을 차고 있다. 잠결에 나는 그의 상한 팔의 상처를 문질러 잠을 깨운 적이 있다. 그 죄수의 팔의 상처를 내가 조심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다 보면 마음을 턱 놓고 잠을 잘 수가 없다.

내가 체포된 날이 수요일 이였다. 일요일 아침 Byran부부와, 나와, Byran의료원의 간호원인 김태경이와 그리고 또 한 명의 한국여인이 경찰실로 인도되었다. 뚱뚱하고 좀 거추장스럽게 생긴 사복 차림의 한 중국인 경관이 Byran의사와 나를 나란히 서게 한 다음 우리 둘에게 한 수갑을 채웠다. 그의 코에 상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 상처는 싸움판에서 상대방을 때려눕힌 승자의 표시로 가지고 있는 듯 하다. 혹시 그는 죄수들을 뚜들겨 심문을 하기 위하여 채용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된다. Byran부인과 태경이(우리는 그 간호원을 "태경이"라고 불렀다)는 우리처럼 서로 수갑을 차고, 또 한 여인은 수갑 없이, 모두를 기차역으로 데려갔다. 역에서 경관 둘이 왔으며, 그 중 한 경관은 바로 내게 영장을 읽어 주고 나를 체포한 박 순경이었다.

우리는 만주 벌판을 달려가는 민간인 기차 속에서 이 일요일을 손목에 수갑을 찬 그대로 지냈다. 다섯 명의 죄수들이 다 손에 성경책을 들고 가끔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를 지키고 있는 경관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 관경(觀境)이야 말로 아주 색다른 일이었음이 틀림이 없다. 기차가 연착함으로, 만주의 수도였던 신경에서 안동으로 가는 기차와 연결이 안된 것이다. 우리는 그 지방 감옥에 끌려갔고, 기나 긴 밤을 남방시설도 없고, 찬바람이 들어오는 감방에서 수갑으로 연결된 다섯 명이 떨며 밤을 새웠다. 다음날 압록강을 건너서 있는 한국과 만주의 접경에 있는 안동으로 우리는 수갑을 찬 체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다. 안동 역에서 우리를 체포 할 때에 지휘관이었던 일본인 경관과 만났다. 그는 우리를 러시아 식당으로 데려가 음식을 주문했다. 이렇게 음식으로 선대(善待)를 받아 기분이 꾀 좋아졌는데, 몹시 딱딱한 경관들에게 우리를 넘겨주자 우리는 다시 마음이 찹찹하게 되었다.

경관들은 우리를 안동 교외에 있는 유치장으로 데려갔다. 아주 어두운 밤이 되었고, 유치장 대문을 차가 지나고 난 다음, 그 대문을 닫아 잠그는 소리를 들었다. 가끔 가다 밝은 전등불이 빛이고, 높은 벽돌 건물과 파수대가 보였다. 앙상하게 생긴 경관이 우리를 인계 받았다. 그는 우리를 완전히 내의(內衣)까지 벗게 하였다. 또 여자 경관은 여자들을 커튼으로 막은 방에 데려가 몸을 조사했다. 처음에 우리가 수감될 때 처럼 우리의 시계, 허리띠, 넥타이, 그리고 다른 물건들을 빼앗아 갔다. 그리고 나서 얼마 있다가 그 경관은 내 손수건과, 작은 타월과, 칫솔과, 치약과, 비누를 돌려주었다. 우리가 간절히 애원한 끝에 감옥의 법을 억이고 우리의 안경은 돌려주었지만 성경책은 돌려주지 않았다. 사복 차림의 중국인 호위경관이 떠나고, 검정색 정복을 입은 경찰이, 여자들은 뒤에 두고 Roy(Byran의사의 아명)와 나를 데려갔다. 우리는 감옥의 뜰을 지나고 여러 개의 작은 건물들을 지난 다음, 유치장 사무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다. 이 감방은 양철지붕의 나지막한 건물이며, 벽은 하얀 회로 되었고 침침한 전등불이 들어와 있었다. 간수가 문을 열었다. 우리는 이 크고 길쭉한 감방 중앙에 들어갔고, 20명 넘는 죄수들이 마루바닥에 누어있는 것을 보았다. 당직 간수(看守)가 우리를 데리고 감방 왼쪽으로 있는 낭하를 지나서, 여러 개의 감방 문을 지나갔다. 감방 문은 두툼한 나무로 된 문이었다. Roy를 한 방에 집어넣은 다음, 나를 낭하 끝 마지막 감방에 집어넣었다. 문을 열쇠로 열자 신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간수가 전등을 켜라 했으나 전구가 나갔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이 감방을 쓰지 않았던 모양이다. 방에는 남방시설도 없고, 아무런 세간도 없고, 침구도 없었다. 나는 실망을 했지만, 무엇인가 든든한 마음이 생겨, 오버코트를 덮고 딱딱한 마루바닥에 누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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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한 죄수만 들어가게 만든 감방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욥 35:10)

아침이 되자 나는 감방(監房)을 살펴 볼 수 있었다. 회반죽으로 된 열자나 되는 흰 벽이 천장에 닫고 있다. 발을 피고 누우면 감방의 길이가 내 키보다 서너 자 정도 더 길다. 내가 서서 양쪽 팔을 펴면 양쪽 손이 양쪽 벽에 동시에 닫는다. 감옥에 들어가는 문 건너편에는 창살을 박은 창문이 있고 이 나지막한 창문 너머로 추수가 다 끝난 배추밭을 내다본다. 그 배추밭 너머로는 감옥소의 벽돌로 된 높은 벽이 어렴풋이 보인다.

감방의 마루바닥은 갈대를 가늘게 쪼개서 엮은 얄팍한 자리로 깔려있다. 감방으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갈대 자리가 낡아 부서진 것으로 보아 그 자리가 이방에 깔려 진지 오래되었으며, 내가 이 감방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죄수가 아님을 알게된다. 이 감방을 내가 처음으로 방문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다른 증명은 사람이 앉은키 높이에 때가 꼬질 꼬질 묻은 줄이 벽에 남아 있다. 이 줄은 죄수들의 머리가 벽에 닿아서 때가 묻은 줄이다. 내가 늘 앉는 뒤편에는 나무문이 있고, 내 허리정도 높이에 밖에서 창살을 박은 창문이 있다.

간수(看守)들이 이 창문으로 가끔 감방을 들여다보고 또 나에게 얘기를 했다. 나는 허리를 좀 꾸부려야 얘기를 할 수 있었다. 문짝과 창문 살은 군함의 색깔인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읽을 수 있는 책도 없고 무엇을 쓸 수 있는 자료도 없이 하루 종일을 아무도 없는 감방에서 홀로 지낸다는 것을, 여러분이 경험한 일이 없는 한 상상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체포되어 감금된 일은 하나님의 어떤 목적이 있다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나날을 견디게 하고, 또 이 나날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내고자 하는 생각에 잠기게 된다.

우리가 서로 수갑을 찬 체 기차여행을 하는 동안 할빈 감옥에서 처음 나흘 밤 동안에 일어난 경험담을 나눈 적이 있다. Roy는 자기 감방 벽에 한국어로 성경 구절이 씌어진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가 감방에 들어가기 전에 필경 우리 형제 중 하나가 그 감방에 있었든 모양이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어떤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만일 내가 감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다음에 이 감방에 들어 올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남겨주어 그로 하여금 생각 할 수 있게 하자. 그렇지만 무엇을 가지고 쓴다는 말인가? 부서진 갈 때 조각을 내가 쓸 수 있을 까? 하지만 회 벽은 너무도 단단하게 생기지 않았는가? 내가 손톱을 가지고도 벽에다 자국을 낼 수 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내 신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보통 죄수들은 신을 감방밖에 벗어 두고 양말만 신고 감방에 들어가도록 명령을 받는다. 나에게는 신을 벗으라고 명령을 했지만 그 신을 방안에 두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구두끈 끝에 달려 있는 금속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도구가 되지 않겠는가! 구두끈 하나가 끊어져 다시 묶어서 연결한 것을 나는 발견했고, 구두끈을 다 풀지 않아도 쇠로 된 구두 끈 한쪽을 풀은 다음, 두 손가락으로 쇠붙이 끝을 잡은 다음 감방 문 옆에 한국말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를 새겼다. 손가락에 상당한 힘을 주어야 했고 어떤 글자는 두세 번씩 긁어야 했다. 그러나 그 작은 쇠붙이를 쥐고 눌러서 벽에 글을 새겨 쓰는 일에 성공했다. 그리고 한 발 물러서서 내 손재주를 만족한 느낌으로 감상하게 되었다. 벽에 깊이 파서 색인 글씨들이 두고두고 그 감방에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 글을 쓰는 작업이 막 끝났을 때 간수가 와서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다 챙겨 들으라고 명하였다. 그는 나를 대리고 Roy가 있는 감방 다음으로 내려가도록 했다. 감방의 크기나 생김새가 내가 막 나온 감방과 꼭 일치하다. 사실은 내가 알지 못하고 끌려 왔지만 이 감방이 줄곧 내 거처가 되었다. 사실상 내 감옥 생활을 쓸모 있는 기간으로 만들 수 있는 궁리를 하면서, 같은 감방에 매일 들어온다면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했다. 만일 나를 매일 다른 감방으로 옮겨 놓는다면, 방마다 나는 성경 구절을 새겨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유일한 일을 찾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벽에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다시 새겨 쓰게되었다. 얼마 후에는 로마서 6장 23절을 벽에 새겼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나는 또 십계명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내 손가락이 아파 쑤시고 쥐가 나기 때문에 하루쯤 쉬었다 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그 쉬는 날을 정할 결을이 없었다.

고독감이 나를 엄습(掩襲)하고 나를 또 놀라게 하였다. 나는 온갖 생각을 다하여 이 주어진 내 시간을 효과 적으로 보낼 계획을 했다. 명상의 시간을 여러 번 가져보았다. 잠이 깨자마자 나는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나는 정식으로 일과 시간을 짜 보자는 것이다. 마치 이것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행동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나는 온갖 노력을 다하여 암송할 수 있고, 마음속으로 노래할 수 있는 찬송구절들을 찾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기억하는 몇 가지밖에 없는 찬송구절에 실증이 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난 다음 나는 찬송(暗誦)할 수 있는 성경구절들을 생각하기에 노력했다. 그러면서 암송할 수 있는 찬송가의 가사나 성경구절이 더 있으면 하고 얼마나 애석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없다. 그 다음 나는 식구들의 이름을 한 사람씩 들어가며 기도했다. 그리고 친구들과 세상에 흩어져있는 믿는 형제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과 시간은 항상 생각보다는 일찍 끝나고, 항상 기나긴 아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도수 체조를 좀 해 보았다. 그 중에 한가지 운동을 매일 같이 계속했다. 그 운동은 무릎을 서서히 꾸부리면서 쪼그리고 앉은 다음 양쪽 팔을 활짝 펴 보는 동작이다. 이 동작은 내가 스케이트를 타면서 해 보기를 원 했으며, 그래도 소망을 가지고 감옥 사리를 하는, 비단 그 소망이 경우로 보아서 하잘 것 없는 소망이 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상쾌한 동작의 운동이다. 나는 감옥에 있는 동안 내 체격을 제대로 유지하겠다는 결심을 단단히 했다.

아침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물이 담긴 대야가 들어 왔다. 이 물을 가지고 뒷간에서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고 또 손수건 둘을 세탁하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난 다음 내 옷에서 자라고 있는 벌레를 조사했다. 그 다음에는 창문에 다가서서 햇볕이 내 얼굴과 옆구리를 비치도록 옷을 벗어 본다. 이 감방에 인색(吝嗇)한 점심이 배달되는 정오가 다가오는 것은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리며, 기나긴 오후를 지내야 하는 생활은 고역이다. 나는 오전에 하는 일정을 오후에 또 반복하였다. 이러한 무미건조한 생활의 반복이 나를 멍청한 사람으로 만들 것이 아닌가? 저녁밥은 일찌감치 배달되고 저녁시간은 여전히 같은 재주를 부려보는 수밖에 없다.

혼자만 들어가는 이 감방에서 제일 첫날 경험한 일들은 나로 하여금 지치게 하였고, 내 마음을 몹시 쓸쓸하게 만들었다. 내 영혼이 침침한 골짝 바닥에 도달했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뛰어 오르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이러한 느낌은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감방 앞뒤를 거닐었다. 세 발자국 걷고 허리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세 발자국 걷고 허리를 왼쪽으로 돌리면서 한참동안 체조가 계속된다. 나는 내 기분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 체조(體操)에 맞추어서 휘파람을 불렀다. 특별히 곡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학에 다닐 때 친구들끼리 불러보던 노래의 곡조다. 나는 가사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내 체조는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감사를 드리세"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세" 차차 나는 가사를 붙여 가며 곡조를 가사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머지 않아 내 행진곡의 제 일 절이 완성되었다.

 

"감사를 드리세,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세

그는 만 왕의 왕이 아니신가

모든 나라와, 민족과, 국가와 족속들이

그에게 찬양을 드리세

그는 세상을 권능과 의로 다스리시니

바다의 노도라할지라도 그의 뜻에 복종하는 도다

감사를 드리세,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세

당신의 기쁘고 즐거움으로 찬양하세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밤중에 노래하게 하셨다!" 내가 지은 가사들이 내 생각과, 내가 처한 환경에서 온 것이 결코 아니었다. "감사를 드리세!" 나는 좁은 감방을 앞뒤로 서성거리면서 소리를 크게 지를 번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공포(恐怖)가 나를 엄습했다. 나는 내가 노래한 구절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온갖 힘을 다 했지만 내가 기억력을 너무도 상실하여 아침이 되면 가사를 다 외우지 못했다. 곡조에 맞추어야 될 단어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내 마음을 들뜨게 하였다. 어디에다 이 가사를 적어 둘 수 있을까? 무엇을 가지고 쓴단 말인가? 아침에 나는 구두끈을 가지고 벽에 가사를 써 보려고 노력했지만 벽은 너무도 단단했다. 그리고 충분한 시간도 없지만, 높은 감방 천장에 달린 전등 빛을 가지고는 벽에 쓸 글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주 성급해졌다. 내가 지어낸 노래를 기록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내 손가락이 주머니 구석에 쳐박혀 있는 동전에 손이 닿았다. 이 동전은 중앙에 구멍이 뚫린 중국돈 오전이다. 이 동전은 내 오버코트 주머니 깊이 숨어 있어 내가 감옥에 들어 올 때 몸수색을 한 간수가 발견치 못했던 모양이다. 나는 이 동전을 손가락으로 단단히 잡은 다음에 용감하게 힘을 내어 벽에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감사를 드리세!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세!" 나는 구절을 다 쓰고 말았다. 날은 이미 저물어가 내가 벽에다 긁어 쓴 가사의 흔적(痕迹)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최선을 다한 것을 나는 안다. 여하간에 나에게 지금 노래가 있다. 나는 몸이 가벼워지고, 감사의 기도가 마음속에 흘러 넘쳤다. 나는 눈을 감았다. 혼자만 갇혀 있는 감방에서 나는 곧 깊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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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벽에 쓴 글

아침이 되고 아침 햇살이 충분해서 내가 쓴 벽의 글을 일일이 살펴 볼 수 있었다. 힘이 들기는 하였지만 내가 완성한 작품을 보고 나는 아주 기쁨에 넘쳤다. 벽에 그린 가사에 맞추어 곡조가 되살아 나왔다. 주님을 찬양하세! 온 종일을 바쁘게 만들 일거리가 생겼다. 새겨 쓴 글을 고치고, 곡조를 분명하게 생각에 담고, 또 다음 구절을 생각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감방 마루바닥을 이리저리 거닐면서 내 노래를 불렀다. "감사를 드리세!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세!" 얼마 있다가 간수가 작은 문구멍으로 나를 들여다보았다.

"당신 그 벽에 쓴 것이 무엇이요?" 의심하는 눈치로 물어댄다. 나는 이것을 낭하에서 들여다 볼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대답을 선뜻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나중에 발견한 일이지만, 벽에 쓴 내 글이 그 창문으로 아주 명료하게 나타나지 않는가! 내가 글 바로 앞에서는 이 글을 잘 읽을 수 없었든 것이다. 그러나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내가 동전으로 새겨 쓴 글에 정통(精通)으로 비침으로 글 자국은 마치 내온 싸인 같이 빛나는 것이 아닌가! 간수의 질문은 내가 그리스도안에 사는 믿음을 간증할 기회를 주었다. 예수님의 승천 후 초대교회가 이러한 방법으로 전도를 하지 않았던가? 감옥의 죄수들과 또 노예들이 간수들과 주인들에게 이렇게 설교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방법이 데오빌로 각하에게까지 전도를 할 수 있었든 기회가 아니었던가!

나는 구절과, 그 구절에 포함된 단어를 일일이 풀어 가면서 나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과, 만유를 능력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했다. 말할 나위도 없다,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돌리는 일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간수는 아주 이상한 눈초리로 나와 벽에 쓴 글을 번갈아 쳐다본다. 마치 그는 "세상에 누가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서 감사를 드린다는 말인가?"라고 자문하는 눈치다. 그는 나의 동전을 압수했다. 그렇지만 그의 얼굴은 마치 "미친 짓이 어떤 사람의 도움이 된다면, 그런 일은 고려할 여지가 있지 않는가"라고 하듯이 밝은 미소를 짓고 있다. 어떠한 일이든 간에 만주에 사는 주민들의 슬픔과 화근이 되고 있는 침략자들이 질 밟는 발급을 견디게 하는 일이라면 환영한다는 감정이다. 그 후 나는 여러 번 그 간수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낯선 간수가 올 때마다 벽에 쓴 글이 무엇인지 내게 물었다. 모든 간수들에게 나는 서투른 일본말이나 중국어를 마음놓고 사용하면서 최선을 다하여 설명하였다. 심지어 일본인 간수장(看守長)이 어떤 오후에 와서 이상한 얼굴로 벽에 쓴 내 글을 쳐다보며 내 더듬거리는 일본어 설명을 열심히 들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한 일에 대하여 견책(譴責)치 않았다. 나는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자랐기 때문에 한국인 간수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은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누가 오든 간에 똑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날이 지나면서 간수들이 나와 더 사귀고자 찾아왔다. 특히 중국인 간수들은 다른 감방을 한 바퀴 돌고 난 다음 내 감방에 와서 얘기를 걸었다. 이 사람들과의 얘기는 상당히 긴 얘기 거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 감방이 설교하는 강대상이 되고 말았다. 일과 중에 상당히 긴 동안을 내 감방 문에 달린 작은 구멍으로 설교하는 일로 보냈다. 가끔 간수는 감방 문을 열고, 나는 사람대접을 받고, 사람과 사람이 마주서서 얘기 할 수 있었다. 어떤 간수는 아침에 오자마자 내게 와서 "당신은 오늘도 감사 드립니까?"라고 농담을 걸어온다. 나는 항상 분명하게 대답해 주고 대화를 계속했다. 그리고 나면 노래 가 내 감방 문을 여는 것 같다.

 

나는 내 영혼이자유롭게 해방된 것을 발견할 뿐 아니라 내 앞에는 아무도 닫을 수 없는 기쁜 간증의 문이 열려있음을 발견한다.

내가 가졌든 동전이 압수되었지만 며칠 동안을 구두끈에 달린 쇠붙이를 가지고 성경 구절들을 벽에다 새겼다. 한국인 간수 한사람이 내가 벽에 쓰는 일을 저지(沮止)했다. 그는 키가 훌쩍하고, 체격이 좋고, 그가 입은 검정색 정복(正服)은 항상 깔끔하게 손질이 되어 있었다. 이 의젓하게 생긴 사나이는 약간 냉소하는 시늉이 그의 품위를 상실하게 하며, 그는 또한 무엇인가 인생을 각성한 것처럼 보이려한다. 그는 그의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도 죄수들을 필요 이상으로 심하게 다름으로써 그 부끄러움을 숨겨보려고 한다. 나는 여러 차례 그와 맞서게 되었다.

하루는 그가 내 감방 창문아래에 있는 정원을 청소하는 일을 감독하게 되었다. 건물 쪽으로 햇볕이 비치며, 그는 칼라를 귓전에 올리고 햇살을 즐기며 벽에 기대어 서서, 죄수들이 일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 행사를 감독하는 그는 기분이 좀 좋은 것 같고, 내게 와서 내 자신에 대하여 묻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최령(Chairyung)에서 왔으며, 그 최령은 우리 아버님께서 그의 거의 전 일생을 보낸 곳이며, 내가 내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그의 부모들은 그리스도인들이며, 우리 아버님께서 새운 고등하교에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기독교에 대한 흥미가 있는 듯하지만 기독교 신앙에 대한 얘기를 길게 하는 것을 꺼렸다. 또 한번은 그 간수가 일요일에 청소할 것을 명령했다. 주중에는 육일동안을 간수나 죄수나 할 것 없이 빈둥거리며 놀고 재낸다. 그러나 이 주일날, 심지어 일본인들이 은행도 문을 닫고 관공서도 문을 닫고 쉬는 날에, 자리를 내다 털고 마루를 닦고 청소를 시킨다는 말이다. 최근에 일본정부는 서양식을 배척하는 일이 전개(展開)되고 기독교계의 활동을 극히 저지해 왔다. 바로 그 한국간수가 이 날 당번이었다. 그가 내게 자리를 내다 털라고 명령했을 때, 나는 그에게 "오늘은 안식일입니다. 내가 어느 딴 날에 이 일을 기꺼이 하겠지만 오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쉬는 날 입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 하여야만했다. 나는 얘기할 때 마루바닥에 앉아 있었고, 그는 문간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나를 때릴 것인가? 나를 심히 고문 할 것인가?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기다렸다. 표면으로 아주 조용한 순간이 지나갔지만, 내 맥박은 내 마음의 문을 몹시 심하게 두들겼다. 그는 코방귀를 뀌며, 나를 째리고 보았다. 그는 나를 깔보는 듯이 입술을 비쭉거리며, 내 감방 문을 내려 닫고 가버렸다. 나는 또 곰곰이 생각했다. 수다한 사람들이 하찮게 생각하는 일을 내가 문제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그리스도인의 자유 문제를 가지고 수년동안 싸움을 싸워온 것이 아닌가?. 어떻게 될 것인지 짐작할 수 없다. 우리 중 한 사람은 이러한 일로 이미 죽었고, 우리 70명에게도 같은 운명을 기다려야 할 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위하여 고난이 시작된 한, 끝까지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의 권리(權利)를 주장(主張)해야 하지 않는가! 이것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간수는 문 벽 옆에 쓴 내 글을 발견했고, 내 감방에 들어와 감방을 살펴보고 어떤 비밀이나 있나 하고 조사했다. 이러한 조사는 당번이 된 간수들의 일정의 하나이다. 그는 벽에 쓴 글을 발견하고 우뚝 서서 글을 읽었다. 그는 나를 쳐다보며, "당신 무슨 연장을 가지고 이 글을 썼소?" 물었다. 나는 구두끈에 달린 쇠붙이를 보여 주었다 "당신은 다시는 그 짓을 할 수 없소" 그의 어조가 불친절한 것은 아니었지만, 간수의 권위를 표시하는 위엄을 보였다. "저, 십계명을 거의 다 썼는데, 두 구절만 더 쓸 수 없을까요?" 이렇게 나는 대답 했다. "안됩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벽에다 글을 쓰는 일은 끝장이 난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내 목적은 달성한 것이다. 이 일은 나로 하여금 할 일을 하게 하였고, 그 일이 유용하다고 느껴졌다. 내 선교사의 사명을 다 한 것이 아닌가?. 시간이 가서 누구든 간에 이 감방에 들어온 후 이 글을 읽는다던가, 그때 간수들이 읽어보고 영향을 받을지 누가 알까? 며칠을 지난 다음 "요시다상"이 내 생활에 일부분이 되었다. 요시다상은 약 18세 된 한국사람이며 그는 국경에서 밀수업을 하다 잡혀온 사나이다. 그는 최근에 결혼을 하였고, 젊은 신부와 헤어져야 했든 일로 슬퍼하고 있었다. 그가 일본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일본정부의 시책으로 모든 한국사람들이 일본이름으로 개명(改名)을 한 것이다. 어떤 한국인이 본래의 한국이름을 법적으로 가질 수 없고, 특히 사업을 할 때는 일본 상권(商圈)으로 되어 있는 세계시장에 가담할 수가 없었든 것이다.

간수들은 요시다에게 감옥소 안에서 어느 정도의 자유를 주었다. 이것은 마치 성경에 있는 요셉의 얘기를 생각나게 한다. 그는 마시는 물과 청소하는 물을 길러 나르거나, 밤에 간수 당번이 교체(交替)될 때 필요한 일들을 도와주었다. 또 가끔 그는 독방에 가친 특수한 죄수들을 도와 주었는데, 그는 아침이 좀 지나서 조용할 때 나에게 세수할 물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서로 아무런 겁이나, 방해 없이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항상 밖에서 걷고 있는 간수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나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근무 중에 있는 간수들은 우리에게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요시다는 한국사람인고로 나에게 언어의 장해는 전혀 없었으며, 얘기거리가 숫하게 많았고 대개의 경우 우리는 종교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선교사로서의 의무를 생각함으로 신앙에 대한 화제를 늘 근본으로 생각했다. 혹 그가 일본인들의 꼭두각시가 아니며, 혹은 정탐 자로 보내어 나에게 해를 줄자가 아닌지 어떻게 내가 안다는 말인가? 내가 수감되기 전에 교회에서 같은 종류의 경고를 가진 일이 있다. 기독교원리에 대한 화제가 있을 때는 나는 담대하게 내가 믿고 있는 신앙을 분명하게 얘기를 했으며, 그 표현 방법에 있어 종교적인 견해를 역설하여 민중을 선동하는 자가 아님을 나타내기 위하여 노력했다. 나는 일본치하에 있는 한국과 만주에서 오래 살아왔기 때문에 대화의 상대방을 조심해서 다루어야 함을 배워왔다. 만일 세 사람이 앉아 얘기할 때 한 사람이 정치적으로 좀 위험성 있는 발언을 하면, 나머지 둘은 눈동자를 서로 맞추어 쳐다보게 마련이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모일 때에도 그 중 한사람이 가룻 유다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요시다가 일본인들의 꼭두각시 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는 처음 얘기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구주이심을 믿는 믿음을 내 앞에 선포하고 간증한 것이다. 나는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감옥에 투옥(投獄)되어 있고, 심지어 중한 죄수가 되어, 독방에 갇혀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내 사명이 이 감옥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내 보잘것없는 작품, 벽에다 색인 글을 통하여 또 한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신 것이 아닌가!

이대우 드림, 4/2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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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숫자 "22"

며칠이 지난 후, 감옥에서 하루에 제일 먼저 주는 음식을 아침이라고 한다면 그 아침식사가 막 끝났다. 나는 감방을 정리하고 긴 하루를 이 독방에서 지낼 준비를 마음으로 단단히 하고 있을 지음, 내 귀는 감옥의 큰 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죄수가 독방에서 얼마동안 지나게 되면, 감옥소 안에서 생기는 몇 가지 안되는 소리를 잘 분간하게 된다. 간수(看守) 하나가 사무실에서 나와 낭하를 지나고 눈 위를 걸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감방 문에 달린 작은 창문으로 갔다. 내가 창문으로 간 것은 밖을 내다보자는 것이 아니며, 밖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간수가 감방으로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밖에서 나는 소리를 조심해서 듣는 일은 나의 일과중 한가지가 되었다. 그 간수는 곧 죄수들의 번호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밤 당번(當番)으로 일하는 간수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심문을 받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다. 내 감방 바로 옆방에 수감된 선교사업의 동료(同僚)인 Roy Byram은 두 차례에 걸쳐 법정에 끌려가 심문을 당했다고 들었다. 최근에 밤에 일하는 간수가 나에게 여러 번 "법정에 간 일이 없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내가 "그런 일이 없다"라고 대답 할 때, 이상하다는 표정을 보여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규킢꾸 니쥬우 나나 방", 사무실에서 온 간수가 일본말로 번호를 외쳤다. 이 번호는 내 죄수 번호인 927번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하이"라고 대답했다. "하이"는 일본어로 "예"라고 하는 대답이다. 간수는 내 감방으로 와서 열쇠로 문을 열었다. 내 손가락은 추위 때문에 얼고, 또 갑작스런 충격을 받은 탓인지 구두끈을 매기가 심히 힘들어졌다. 간수는 꾸부리고 앉은 나를 내려다보면서 속히 나오도록 재촉을 했다. 내가 막 낭하에 나가자, 머리는 엉클어지고, 엉성한 옷차림으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일곱, 여섯 명의 한국인 죄수들이 벽을 따라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줄 마지막에 가 서면서, 내 자신이 한국죄수들에 비하여 너무도 뚜렷한 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지난 이주(二週)동안 두툼한 담요 기지로 된, 털을 단 오버코트를 입고, 또 잘 때는 이 오버코트를 이불로 삼고 지내왔던 것이다. 이 오버코트는 아주 낡은 것이었지만 감방을 휩쓰는 매서운 찬바람에서 나를 막아주었다. 그러나 이 한국사람들은 홑 무명옷을 입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지난 이주간(二週間)에 자란 짧은 내 홍색(紅色) 수염도 이 사람들의 검고 긴 수염과 대조가 된다. 이 줄에 서 있는 몇 사람들은 나와 같이 일하는 전도사들, 김용섭과 박이흠이 갇혀있는 감방에서 온 것이다. 그들이 존경한다는 눈짓으로 전해주는 인사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지나친 찬사를 받는 것 같아 나는 몹시 부끄러워졌다.

또 다른 죄수들은 둘씩 한 수갑을 차고 있었다. 그러자 한 수갑이 내 오른 팔목에 채워졌고, 내 짝이 될 죄수를 기다리면서 달랑거렸다. 한참동안 수없이 번호를 불러대고, 죄수의 수를 여러 번 세었다. 한 죄수도 도망친 일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문이 열리고 감옥소 앞뜰로 행진하며, 또 딴 건물을 지나갈 때, 창문에 나타나는 창백한 얼굴들은 세상이 까맣게 잃어버린 딴 세계에의 유령들이 우리를 짜려보고 있는 듯 했다. 그중 하나는 양판삼 마을 교회의 집사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바로 우리가 아직도 자유를 누리던 날 양판삼교회 집사가 나와 같이 웃어대고 농담을 하든 바로 그 사람인 것을 믿기가 힘들었다. 그때는 밥상에 가득한 음식을 즐기던 때가 아닌가!

우리를 감옥소 사무실로 몰아 넣었고, 그때 그 사무실에는 이미 집단으로 온 딴 죄수들로 채워져 있었다. 우리를 몰고 온 젊은 간수는 사무실 안쪽에 있는 책상 위에 그의 모자와 군도(軍刀)를 내 동댕이치고, 걸상을 가져다 앉고, 서류를 정리하는데 매우 바빠 보였다. 마치 그는 어떤 실업가가 한날의 사무를 시작하는 듯 보였다.

우리가 서서 기다리는 중 또 한 간수가 들어와 모자를 벽에 걸고, 감옥소 소장 실에 들어가, 아주 뻣뻣한 거수경례를 한 다음 제 책상으로 돌아가 앉아 사무를 보기 시작하였다. 마지막으로 어느 사무실 소사(小使)로밖에 보이지 않는 두 젊은 정복의 간수가 들어와 우리가 찬 수갑을 검사했다. 그리고 난 다음 각 죄수들의 허리를 끈으로 동여매었다. 내 오른 팔목에 매달린 한쪽 수갑을 무뚝뚝하게 생긴 중국인 죄수의 왼 팔목에다 잠겼다. 이 사람은 어떤 일로 심히 놀랐거나, 약을 먹고 취한 사람같이 보였다. 우리가 서 있는 동안, 둘씩, 셋씩, 혹은 다섯 명으로 된 죄수의 집단이 이 사무실로 계속 들어 닥쳤다. 모든 죄수들은 나무로 된 두 개의 꼬리표를 차고 있었는데, 그 하나는 감옥에 들어오면서 받은 죄수 번호이다. 둘째 꼬리표는 여러 사람이 같은 번호를 가지고 있는데 그 번호는 "22"로 되어있었다. 나도 둘째번 꼬리표의 번호가 22번이다. 나는 이 둘째번 꼬리표의 번호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또 다음 집단의 죄수들이 들어 올 때마다 나의 맥박이 몹시 뛰기 시작했다. 그 중에 세 사람이 만주 중부 지방에 있는 우리 시골 교회 교인인 때문이다. 그들은 지난 팔(八)월에 체포되었으며, 내가 체포되기 훨씬 전부터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얘기를 주고받을 수 없고, 물론 서로 아는 사이라는 눈치를 보일 수도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반가운 사이라 눈이 맞게 되어 있다. 그중 하나는 최씨이며 나이가 좀 많은 분이다. 그는 우리 아버님이 선교사로 한국에 왔을 지음 젊은 청년 그리스도인 이였고, 신학교에서 축구선수 노릇을 한 것을 나는 안다. 우리가 자유로웠든 옛날에 그는 나에게 우리 아버님이 굉장한 씨름꾼이라는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나는 우리 아버님과 갈라지고 이 나이 많은 최씨는 우리 아버님을 대신하여 내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지 않는가! 최씨는 아직도 여름옷을 입고 있으며, 한국사람들이 나들이를 할 때 입는 두루마기도 없이 말이다. 겨울철이 되면 한국사람들은 겹으로 된 저고리와 바지에 솜을 넣어서 입게 마련인데, 그는 짧은 저고리와 솜도 넣지 않은 여름 바지를 입고 있지 않는가? 너무도 추워서 그는 주먹을 꼭 쥐고 떨며, 그의 입술은 파랗고, 그의 양팔은 완전히 지쳐있다. 대개의 한국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는 버릇이 있는데 최씨의 머리는 제멋대로 자라 엉클어졌고, 그의 검정 수염도 자라서 흐트러져 거지처럼 초라한 모양이다. 그는 몹시 여위었고, 또 얼굴은 창백하다. 그는 나이가 상당히 든 사람이지만 늘 정력이 넘쳐있던 사람이다. 언젠가 내가 어떤 마을에서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을 때, 그는 나의 여행길을 동반하면서 눈을 뜰 수 없는 심한 큰 눈보라를 헤치고 목적지 마을까지 동행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눈보라 때문에 길을 여러 번 잘못 헤매다 다시 길을 찾고는 했다. 우리는 가끔 바람으로 쌓인 눈 위를 잘못 알고 푹 빠졌다. 그때 그는 내 삶의 동반자였고, 우리는 눈을 뭉쳐 서로 던지며 눈싸움도 했고, 서로 눈 더미에 떠다밀어 보기도 했고, 껄껄대며 웃고, 농담을 하던 친구가 아니었던가! 그리스도의 사자(使者)들이 금지구역(禁止區域)이 된 사경(死境)을 헤매야 했는데, 그는 그런 사경을 아랑곳없이 생각하고 여행길을 즐겁게 만들어 준 일이 세 번이나 있었다.

그는 지금 나이가 들었고 아주 냉정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의 조용하고 자신만만한 얼굴은 내 마음속에 깊이 박힌 인상이다. 그는 몹시 창백하고, 추워서 떨며, 또 수갑을 찼지만 그는 죄를 범한 죄수가 아니다. 인접 교회에서 집사가 된 그의 아들과 그 같은 교회의 다른 집사 한사람이 또 여기에 들어왔다. 안동 감옥소는 북녘 만주에 있는 이 사람들의 마을로부터 무척 먼 곳이다. 그러나 그들이 굳게 믿고 있는 신앙 때문에 일본인들은 그들을 체포하여 여기에 모인 70인 중에 가담한 것이 아닌가! 70명 중 35명이 내가 감금되었던 독방으로 된 감방에서 왔다. 갑자기 나는 내 동료 죄수들이 똑 같은 번호의 꼬리표, 22번을 차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꼬리표에는 "공범자(共犯者)"라고 적혀 있다. 이 꼬리표는 나에게 중요한 뜻을 새롭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이 꼬리표가 몹시 자랑스러웠다. 일본의 전제주의(專制主義)와 천황(天皇)을 숭배하는 일을 거절하고, 그들의 누리든 평안을 포기하고, 생명도 저버릴 각오를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영예를 더 중요한 것으로 믿고 조용하게 간직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이 한국사람들 중에 내가 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닌가!

여러 차례에 걸쳐 간수들은 우리의 숫자와 이름을 칠판에 적어가며 점검하는 일로 시간이 지났고, 우리 중 26명을 순찰차 속에 몰아 넣었다. 두 사람의 경찰관이 마지막으로 차를 타고 문간에 자리를 잡았다. 같이 수갑을 찬 중국인과 잘 협조가 되어 자리를 잡고 보니 나는 최씨와 그의 아들과 마주보고 앉게 되었고, 내 옆에는 앞서 말한 그 젊은 집사가 앉게 되었다. 호위(護衛)경찰의 눈치를 살피면서 우리는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았다. 우리는 교회의 사정과 체포된 사람들의 진상을 서로 위로하듯 얘기했다.

눈이 덮인 거리를 지나고, 늦은 아침의 밝은 태양 빛에 녹은 질퍽질퍽한 길을 한참 달리다가 우리를 실은 차는 덜컹거리며 철로 길을 건너간 다음 현대식 삼층 건물인 법원(法院) 앞마당으로 들어갔다. 두 한국여인이 법원 대문 문턱에 서서 우리를 보고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둘씩 수갑을 찬 우리는 차에서 내려왔고, 그때 그 중 한 여인은 할빈에서 "성경의 여인"에서 일하든 분의 딸임을 알았다. 55세인 그의 어머니는 감옥소에 수감된 그리스도인 죄수 중에 하나이지만, 이날 심문을 받는 죄수들 중에 한사람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 두 여인들에게 말을 건널 수 없었고, 우리가 그들을 안다는 표시를 해서 위험한 경지에 몰아 넣을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슬쩍 눈치로 인사하고 난 다음 건물 일층에 있는 문을 거쳐서 지하로 내려가, 지하실 한방에 몰아 넣게 된 것을 알게되었다.

이 큰방은 양쪽으로 몇 개의 문을 지나 다음 방으로 갈 수 있었고, 그 다른 방에는 죄수들이 가서 걸상에 앉아 자기들이 심문 받을 차례를 기다리는 곳이었다.

위층으로 가는 층층대 끝에는 두 명의 순경이 감방과 낭하 사이에 놓여진 책상에 걸터앉아 빈둥거리는 꼴이 보인다. 가끔가다 이 순경들은 이상한 눈초리로 우리를 짜려보다가 내게 다가와서 그들이 궁금한 일들을 묻곤 하였다. 아침이 잘 지나갔다. 가끔 말끔한 옷차림을 한 법관(法官)이나 서기(書記)들이 층층대를 내려와 들고 다니는 서류들을 조사하면서 순경들에게 죄수들을 불러오도록 명령했다. 순경들은 단조로운 일거리에 실증이 났을 지음 죄수들을 대리고 다른 곳으로 가는 일이 고맙다는 듯이 죄수들을 몰고 자리에서 살아진다. 어떤 죄수들은 끌려간 후 다시 돌아왔지만 어떤 죄수들은 영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은 죄수들이 무죄로 판결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는지 퍽 궁금해진다. 아마도 더 난처한 곳으로 보내진 것이나 아닌지? 집에 돌아가는 죄수들이, 혹 가련한 사정에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나는 그들이 부럽다. 집 생각과 자유를 그리워하는 생각이 나의 내장을 통해서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 같아, 나를 깊은 향수에 잠기게 한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 감옥에 있지 않은가? 집에도 못 가고, 자유라는 것도 아주 모르게 될, 더 어려운 궁지에 빠지게 된 것이 아닌가? 점심 시간이 되어 순경들이 우리 점심을 감옥에서 가지고 왔다. 아침부터 이렇게 떠들썩하게 차를 타고 법정에 왔으니, 무엇인가 특별한 점심이라도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점심은 변화 없는 바싹 마른 옥수수떡이다. 감방에서 먹든 점심과 다른 점이 있다면, 감방에서는 감옥 주방에서 만든 따끈한 배추 국과 시루에서 바로 꺼낸 옥수수떡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선 옥수수떡은 다 식어서 차갑고, 컵에다 주는 뜨신 물을 마시면서 떡을 먹었다. 이 뜨신 물은, 우리가 들어오던 아침부터 조그마한 검정 주전자를 난로(煖爐) 위에 얹어서 대운 물이다. 난로라는 것은 또 장관(壯觀)이다. 난로 밑창은 언제나 열려있어 재가 흘러나오고, 담배꽁초가 수두룩하고, 뱉은 침이 말라붙었고, 또 마룻바닥에 밟아드린 진흙이 뒤섞여서 그 지저분하기가 짝이 없다.

순경들은 거의 전부가 중국인이며, 자그만 하고 반질반질하게 생긴 일본인 순경이 아주 뽐내며 순경들 앞에 달려가 앞에서 훈계를 하며, 또 제법 농담을 주고받는다. 마치 일본과 중국은 옛날부터 친한 사이 인 것처럼 연극을 한다. 한번은 아주 심각한 일이 생긴 모양이다. 그 일본순경은 말다툼 끝에 중국인 순경의 뺨을 여러 번 들어 쳤고, 일본 순경은 그날 그 후 자취를 감추었고, 중국순경은 실쭉한 얼굴로 온 종일을 보냈다.

중국인 순경들이 가끔 나를 쳐다볼 때마다 나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들은 아마 "가엾은 흰둥이, 저놈이 감옥에 들어왔다는 것은 근세(近世) 두개의 강대국(强大國) 세력에 격투가 붙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중국으로 말하면 일본과의 강대 세력의 격투가 몇 세기 전에 있어야 했지 않은가? 그가 나로부터 시선을 돌릴 때 나는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상상해 본다. "나는 중국대국의 국민이며, 중국이 오랜 역사의 강대국 이였든 것을 알고 있다한들 어떻단 말인가? 중국정부가 해결할 일이지, 그러나 지금 나는 다음 끼의 죽 한 그릇이 어디에서 오는지 찾아보아야 한다."

한국인 서기가 층층대로 내려와서, 내가 방을 나와 그를 따라갈 때 내 명상(冥想)은 이미 파손되어 있었다. 나는 그를 따라서 두 번이나 원형(圓形)으로 꾸부러진 층층대를 올라가서 법원 뒤쪽 낭하를 지난 다음, 겨우 책상하나와 네 개의 걸상을 놓을 수 있는 조그마한 방에 끌려갔다. 의자 하나는 심문하는 일본인이 앉아 있고 또 하나는 한국인 통역자가 앉아 있었다. 나에게 남은 한 의자에 앉으라고 눈짓하였고, 나머지 의자는 법정에서 심문 결과를 기록하는 서기가 나중에 차지하였다.

심문하는 일본인은 내가 할빈감옥에 있을 때 네 시간에 걸쳐 나를 호되게 심문하든 바로 그 사람이다. 필경 그는 다른 기차 편으로 안동에 와서 우리의 사건을 끝까지 심문하도록 지명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는 내가 이주(二週) 동안 감옥에서 주는 음식이 먹고 견딜만한 지를 물었고, 제법 자라난 내 홍색(紅色) 비틀린 수염에 대한 의견을 말했다. 그렇게 말 한 다음 그는 내 개인 신상에 대한 얘기를 지나치게 언급한 일에 대하여 무안하게 생각한다는 시늉을 했다. 나는 그가 나에게 친근감을 가지고 말 해주는 것으로 간주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답변했다. 음식에 대해서 정직하게 답변하는 것은 그의 심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 말하기가 힘든 일이었다.

두툼한 서류를 앞에 놓고 심문이 시작됐다. 그는 지금 까지 기록해 온 심문의 내용을 훑어본 다음, 마치 무엇인가 마음을 새롭게 한 것처럼 미리 적어 온 쪽지를 내놓고 심문을 시작했다. 각 질문을 그가 일본말로 하면, 젊은 한국인 통역관이 한국말로 전해 주었는데, 이 사람은 기독교 신앙이나 신학(神學)에 대한 조회(照會)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한국말로 대답했고, 그 한국 통역관은 일본말로 내 말을 전했다. 나는 일본말을 거의 못하는 처지었지만 신학 용어(用語)의 발음이 일본말이나 한국말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 통역관이 전하는 일본말을 그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대개의 신학용어를 한국어나 일본어가 동일한 중국 한자(漢字)를 쓰기 때문에 내가 알아듣는데 덕을 보는 것이다. 여러 번에 걸쳐 잘못 번역된 단어를 나는 바로 잡아야 만 했다.

몇 시간의 심문이 지난 다음 법정 서기를 불렀다. 그는 중년의 일본인이며, 그 얼굴은 세상의 어떠한 나라 정부 사무실에 들어가도 만날 수 있는 덤덤하고 실증이 나는 인상이다.

그가 오자마자 통역관과 나는 완전히 제쳐놓았다. 심문 관이 대충 기록한 쪽지를 보고 법정서기는 자기대로의 심문기록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가끔가다 그는 여러 가지 질문을 한 질문으로 합하여 적은 다음 그 답으로는 내가 특별한 질문에 대답한 것을 전 질문의 답으로 기록하였다. 결과적으로 법정서기의 기록이 완전한 사실의 기록이 아니지만 잘못되었다고 거절할 만큼 오류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법정서기의 기록은 다 일본어로 되어있어서 내가 읽을 수도 없고 정확한 통역을 요구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일은 1940년 내가 투옥되기 일년전의 경험을 상기 시켰다. 할빈에서 지방 경찰로부터 비슷한 심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내가 일본어를 읽을 수 없다는 이유로 서명하기를 거절했을 때 그들은 한국어로 내용을 적은 적이 있다. 나는 그 한국말로 된 진술서에도 서명을 하지 않았음으로 그들을 몹시 난처하게 만든 적이 있다. 내가 거절한 한 이유로는 내가 지방에서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내가 서명한 기록을 그들이 무엇으로 사용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내가 서명했기 때문에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화가 미쳐서는 안되며, 내가 서명해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게 큰 소리로 호령을 쳤고, 체포하겠다는 위협을 하다가, 나에게 간청도 하고, 설명도 했지만 내가 끝내 서명을 거절했을 때 극도로 화가 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이 끝내 자신의 진술에 서명을 못한다면 병원(病院)에 가서 당신은 미쳤다는 증명서를 받아 오시오" 그 소리를 듣자 나는 문간으로 걸어가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나를 짜려다 보면서, 부드럽게 마치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손을 흔드는 것처럼 손을 흔들면서 "당신 어디로 가는 거요"라고 말을 걸었다. "당신이 병원에 가라고 하지 않았소!" 나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나는 내가 미쳤다는 증명서를 얻으러 갑니다. 나는 내 머리가 아주 썩 좋지는 못하지만, 의사가 그러한 증명서를 줄 것이라는 약속은 할 수 없소. 그러나 당신이 가라고 하니 나는 가겠소." 그러나 상오간의 긴장은 풀렸다. 그도 웃고, 나도 웃고, 이 일로 그가 다른 방책을 찾아낼 기회를 주었다. 나는 아무대도 서명(署名)한 일없이 자리를 나올 수 있었다. 그후 심문과 대답은 어떤 사실에 대한 얘기를 묻고 답변하는 일로 끝이 났다.

"당신이 이번에도 이 진술서에 서명하지 않겠지요?" 내가 그렇다는 확신을 표명하자 이 일은 끝을 냈지만, 그는 내게 이렇게 물어보는 요점(要點)을 말한 것이다. 이럭저럭 오늘 하루가 지나갔다. 법원 서기는 진술서를 다 쓴 다음 심문하는 경관에게 읽어 주었다. 심문하는 경관은 나를 쳐다보며 다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오늘도 당신이 이 진술서에 서명하지 않겠지요!" 나는 "아니요"라고 대답한 다음 내 걸상에 앉았다. 법관서기는 깜짝 놀랐다는 듯이 나를 짜려 보며, 야단이나 치는 시늉을 하였다. "바보! 너는 미국사람이니 다행이야, 지금 당장은 우리가 어떻게 할 새로운 방책이 없으니 말이야. 만일 네가 동양인 중의 하나거나, 비단 일본인이라 할지라도 네가 서명을 할 때까지 심한 고문을 당할 것이다. 감히 어디서 그런 말버릇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법관 서기의 말로는 하지 않은 심정을 증명이나 하는 듯이 옆방에서 큰 소리가 흘러 나왔다. 심문하는 법관이 어떤 죄수에게 외치는 소리다.

"누가 이 나라를 만들었단 말인가? 여호와냐? 아마데라스 오미까미(天祖大神)냐? 그는 한국말인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히브리어인 여호와라고 하였다. 아마데라스 오미까미는 일본인이 섬기는 태양신이며, 그들의 천황이 이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믿고 숭배하고 있다.

나는 죄수가 중얼거리는 답변을 들을 수가 없지만, 그는 확실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고 말한 것이 틀림없다. 나는 심문하는 경관의 화가 난 높은 언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누가 이 나라를 만들었단 말인가? 종교적으로 말한다면 좀 얘기거리가 있지만, 이 나라야말로 오랜 전부터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일본인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이방 신이다. 이 태양신이 우리 일본인에게 복을 주며, 우리는 그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나라의 깃발아래서 보호를 받고 있는 누가 이 태양신을 거역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일본이 보호를 받고 있는 어머니 같은 신이 아닌가? 너는 일본 국의 시민으로 이러한 특권을 포기하고 이방 신, 유대인의 신을 신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얘기는 유대인을 반대하고, 나치 정권의 선전을 믿는 일본인들에게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네 사람은 한참동안 말없이 조용하게 앉아있었다. 서류는 수집(收集)되었고, 한국인 통역관은 나를 지하실로 데려가고, 일본인 두 사람, 법정 서기와 심문하는 경관은 자기들끼리만 방에 남았다. 이 두 일본인간에는 직업상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같은 국민이라는 이유로 어울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와 이 한국인 통역관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단순한 통역관이 아니다. 그는 내가 심문한 심문을 받는 것을 들었고, 옆방에서도 똑같은 일로 이 침략자들의 심문을 받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는가! 나를 지하실 방으로 데려가는 길에서 그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부모님은 그리스도인 들입니다!" 그렇게 말을 시작한 다음, 좀 미안하다는 듯이 말을 계속했다. "나는 교회에 가는 일이 거의 없어요"

지하실 방에 우리가 돌아 왔을 때 방안은 상당한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간수들은 오버코트를 입고, 모자도 쓰고, 칼도 차고, 권총도 차고 제 각기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죄수들을 두 개의 큰방과 또 작은 방들에서 둘씩 서로가 수갑을 차고 나와, 줄을 서고 감옥으로 돌아갈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사실을 알고 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심문을 받고 내가 올 때까지 모든 죄수들의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든 것이다. 간수들은 하루의 일이 끝나고 집으로 가기를 원하고 있으며, 죄수들은 감옥으로 돌아가는 일이 늦어 허기가 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한 20세 쯤 되는 말끔하게 생긴 한국청년이 걸상 옆에 서 있었다. 그의 오른 쪽 팔목에는 수갑 한 쪽을 차고 또한 쪽은 그 팔목에 달려있었다. 그는 바로 오늘 아침에 꼬리표 22번을 차고 있었던 한 사람이다. 나는 그전에 그를 만난 적이 없지만, 필경 그는 일본의 천황을 신으로 섬기는 것을 거절한 그리스도인 중의 한 사람이다. 오늘 아침 나는 그를 보자 미소를 던져 주었는데, 지금 그는 나를 보고 얼굴에 꽃이 피는 미소를 보여 주며, 그가 찬 수갑의 한쪽이 내 팔목에 잠겨졌다. 나는 간수들이 이렇게 한 일에 대하여 놀랐다. 그 이유는 아침에 그 빤질빤질하게 생긴 일본인 간수가 번호 22가 죄수들간에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라는 특별한 유의를 한 때문이다. 내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 일본순경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지배하는 인종(人種)이니, 그 특권을 행사하며, 벌써 저녁식사를 즐기려 갔고, 우리 죄수들을 감옥으로 끌고 가도록 중국인 간수들에게 맡긴 모양이다. 이러한 것이 관대(寬大)함을 설명하고, 몇 일전 중국인 간수가 뺨을 몇 차례 맞은 일이 생긴 후, 미국인인 나에게 그는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와 함께 수갑을 차게된 한국인 청년은 나와 같이 수갑을 차게된 일을 기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 청년의 기쁨은 내가 그 한국청년과 함께 수갑을 차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의 반 정도도 안될 것이다. 나는 대국(大國)의 시민이기 때문에 그 영향이 내 재판에 이득(利得)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정의를 위하여 나선다면 내 정의를 인정하고 도와줄 배경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사정은 다르다. 그들은 일본의 국민(國民)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 정의를 위하여 나설 때 세상에 아무런 나라도 한국을 위하여 싸워 줄 사람이 없다. 만일 어떤 한국인이 일본정부 박해(迫害)에 반항(反抗)하여 정의를 내 세운다면 그들은 무자비한 처형(處刑)을 받을 따름이다. 만일 내 마음에 달린 눈으로 이 사람을 볼 수 있다면, 그의 신앙만이 그를 구원할 것이며, 그의 주변에는 영웅적인 찬란한 빛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줄줄이 선 죄수들은 침침한 지하실 낭하를 걸어 나갔다. 우리가 같이 걸어나갈 때, 나와 수갑을 같이한 청년은 심문을 당하면서 매를 맞았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그들은 내가 울 때까지 매를 쳤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가 얘기한 것이 몸이 몹시 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울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얼마나 많이 참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했다. 그가 바로 내가 심문을 당할 때 옆방에서 소리를 지른 청년이다. 민일 내가 울기까지 매를 맞았다면, 이 청년처럼 아직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을까? 나는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낭하를 나가서, 층층대를 올라가 기다리고 있는 포장 트럭에 울라 탔다. 법정 건물에는 죄수들이 다 나가고 텅 비었다. 청소부들이 이방 저 방을 다니면서 청소를 할 수 있게되어 있다. 벌써 밖은 어두웠고, 쌀쌀한 바람을 막기 위하여 옷자락을 이리저리 잡아 당겼다.

우리는 그들을 보았다! 흰옷을 입은 한국인 부인들과 아이들이 차가 지나가는 길목에 서 있지 않은가! 죄수들이 막 대문으로 나가자, 이 무리들이 앞으로 약간 다가와서, 고개를 내 밀고, 눈을 휘둥그렇게 하면서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찾는 사람들을 보았고 아주 반갑고 기쁘다는 소리가 들렸고, 그들 얼굴에는 미소가 흘렀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창백한 얼굴에 담긴 고통을 보며, 애석하고 안타까움으로 그늘지고 있다. 우리는 죄수임을 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가 말 할 수 없지만, 서로가 다정한 인사를 나누고 있음을 발견했고, 서로가 다 알아듣지 못하는 인사를 간수들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무리들은 약 15내지 20명의 여자들과 아이들이며, 우리나 간수들이 전혀 기대하지 못하던 일이었다. 다행히도 중국인 간수들만이 있었고, 간수들은 그들을 못 본체 하였다. 그러나 간수들은 군중들이 찾는 사람들을 다 찾고 혹 대모가 나기 전에 우리를 빨리 차 속으로 몰아 넣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이름을 부르며, "안녕 하십니까?"라고 물었고, 우리는 "예! 당신들은 평안하신 지요?"라고 대답했다.

나와 같이 수갑을 찬 청년이 소리를 질렀다. "저기 내 아내가 있습니다" 나는 이 젊은 부부를 번갈아 쳐다보며 장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이 젊은 청년의 아내는 열일 곱살 쯤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가장 좋은 옷을 찾아 입고 온 것 같다. 그녀 얼굴에 안타까워하는 표정이 보였지만, 남편에게 용기와 기쁨을 주어야 하겠다는 간절한 소원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끝까지"라고 소리지르는 것을 들었다. 이 말은 성경의 베드로전서 1장 13절의 말씀을 외친 것이며, "끝까지 견디라"는 격려(激勵)인 것이다. 또 다른 부녀자가 이 말을 외쳤다. 우리 모두는 참으로 끝까지 견디어야 하겠다는 격려를 받은 것이다. 작은 시골에서 온 교회집사의 부인과, 그 아이들이 엄마 치맛자락에 매달려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아주 평민이며, 그는 식구를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해야만했는데, 감옥에 갇혀있으니, 그들의 놀라운 믿음으로 이 어려운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런 대도 그녀는 "끝까지"라고 남편을 격려하고 있지 않는가? 수갑으로 나와 짝이 된 청년의 아내는, 젊은 신부는 얌전하게 기다리는 한국식 예절을 지키는 듯 참고 있다가, 마침내 참지 못하여 소리를 질렀다. "끝가지!" 이 청년은 기쁘고 자랑스럽다는 감정을 아내에게 던져주면서, 내가 이것을 알고있는지 묻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또 나이가 든 여인이 거기에 서 있었다. 그는 나이 때문에 이 격려하며 소리지르는 무리와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 그녀의 눈은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여 여윈 창백한 얼굴을 가진 그의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들이 집으로 돌아온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잠겨 있는 듯하다.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현실에 사는 일이며, 언젠가 날이 바뀌어져 그의 아들이 석방(釋放)되도록 기도하는 것 밖에 무엇이 있겠는가?

이 관경(觀境)을 다 설명할 수 있는 시간보다 훨씬 더 짧은 시간에 우리는 차에 올라 자리에 앉고, 차는 움직여 법원 정문을 나가서 거리로 나갔다. 우리가 가는 것을 보며 서 있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시야에서 살아졌다. 몇 작은아이들이 차를 따라오면서 "끝까지", "끝까지"라고 외친다. 그 아이들의 소리가 내 귀에 메아리가 되어 남아 있다. 우리는 감옥소에 돌아와 각기 제 방을 찾아갔고, 차고 있는 꼬리표 22번은 나만이 아니라, 오늘 법원에 갔든 죄수 누가나 할 것 없이 큰 자랑거리가 되었다.

이대우, 5/2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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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새 노래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여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 (시 138:1)

 

감방에 돌아와 처음 몇 시간을 달게 잠을 잤다. 그러나 그 후 잠은 제대로 오지 않았다. 마루바닥은 단단하고, 여위어진 내 몸은 딱딱한 마루바닥을 견딜 만큼 뼈에 살이 붙어 있지 못했다. 내 몸의 윗도리는 오버코트로 덮어 방한(防寒)이 잘 되도록 하고, 나머지 부분은 오버코트 안에 달려있는 털로 된 기지를 연결시켜 찬바람을 막게 하였다. 그러나 자다가 보면 그 연결한 자리가 떨어져, 찬바람이 들어와 잠을 깨웠다. 나는 춥게된 자리를 막아 보려고 오버코트를 이리저리 잡아 당겨보다가, 마침내 떨어져 낡아빠진 오버코트 깃을 벌거벗게된 목에다 끌어대고 꾸벅꾸벅 졸며 밤을 새운다. 내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잠을 깨게 마련이다. 천장에 달린 전등은 밤새껏 켜있게 되어있지만 나는 창문을 쳐다보고 아직도 밖은 캄캄하여 아침이 되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 나는 다시 잠을 청했지만 낮에 경험한 일들이 머리에 떠올라 잠을 깨운다.

심문하는 경관이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는 중에, "일본 천황도 예수를 믿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나는 사도행전 4장 12절을 인용하여 "하늘 아래 사는 모든 인간들 사이에 예수의 이름 말고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다시 반문(反問)하면서,

"그렇지만 당신이 인용한 그 구절 때문에 일본 천황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참으로 구원을 잃는다는 말입니까?"라고 물었다. "예, 일본의 천황은 사람입니다. 우리와 똑 같은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신 예수를 믿지 않는 한 그분도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눈썹을 치켜올려 눈을 크게 뜨며, 마치 "당신이 당신자신의 정신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요?"라고 나 하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다 나는 내 정신으로 대답한 것을 잘 안다. 이 대답은 나 자신의 신앙 간증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기록해 놓으신 사실이다. 일본정부의 관료들은 일본 천황숭배를 무조건 반대한다는 것으로 내 말이 통역(通譯) 되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자들은 법적으로 사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오래된 한 선교사업 단체가 그들이 받을지도 모르는 형벌을 두려워하여 공석에서는 천황숭배에 대한 토의는 입을 막도록 한 정책의 사실을 안다. 그러나 나는 신으로 숭배를 받는 천황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된다는 엄청난 선언을 한 것이다. 나는 사형 이외에는 다른 선고를 생각할 수 없게되었다.

이러한 순간 내 생각은 내 심장의 고동(鼓動)을 멈추게 하였다. "그렇지만 잠깐만!"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내 나이는 겨우 38세이다. 나는 젊은 아내가 있고 아주 사랑스러운 다섯 명의 자녀들이 있지 않은가? 나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어야된다는 말인가?" 나는 집을 그리워하는 생각으로 잠겼고, 처자(妻子)를 포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얼마 후 나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 위하여 가족과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데 까지 오지 않았던가! 한국 그리스도인들 몇 명의 그 큰 희생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공연히 겁을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25세밖에 되지 않는 안용애 여인을 보지 않았던가! 그는 감옥에 들어 갈 때 용감하고 늠름했었는데, 들어간지 겨우 7개월만에 다 죽어 가고, 뼈만 남고, 그의 눈과 볼은 깊숙이 들어갔고, 입술은 흙투성이로 되어 나온 것을 보지 않았던가? 그후 두 명의 의사와 간호원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치료했지만, 몸은 계속 약해지고만 것을 나는 보지 않았던가? 결국은 내가 그녀를 땅에 묻어 장사지내지 않았던가?

이북에서 나를 돕겠다고 온 키가 후리후리한 김연섭 전도사가 우리 집에서 잡혀 감옥에 간 후 8개월만에 거의 죽게 되어서 출옥한 것을 나는 보지 않았던가? 그가 출옥했을 때, 그는 너무 허약해져서 몸은 말할 것도 없고, 손도 움직이지 못했고, 속삭이는 말도 겨우 할 수 있었든 것을 나는 보지 않았던가? 그후 그가 겨우 지팡이를 집고 절뚝거리며 나들이를 하게되자, 다시 체포당해 투옥된 것을 보지 않았던가? 나는 또 27세의 젊고, 건장하든 그 성경학교 여교사가 잡혀간지 11개월만에 감옥에서 나올 때는 뼈만 남고, 송장 같은 그가 병원에 앉아 있던 것을 보지 않았던가? 나는 그의 몸이 회복될 가망도 없게 상한 것을 보지 않았던가? 그녀가 나를 쳐다보려고 눈을 돌릴 때 그는 마치 몰매를 맞고 죽어 가는 짐승 같았고, 나는 거듭 자문(自問)하지 않았던가? "믿음을 지키고 받는 값이 너무도 지나친 것이 아닌가?"라고. 우리가 자유를 누리던 시절에 이 사람들은 거의 매일 같이 우리 집에 오던 사람들이 아닌가?" 이 사람들 말고 또 다른 사람들이 이같은 희생을 치른 것을 나는 다 알지는 못한다. 내 가슴은 다시 녹아버렸다.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나도 조그마한 희생을 한국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바치도록 기회를 주신 것이다.

지금 막 컴컴한 밤은 지나가고 아침이 되돌아왔다. 회색 동편(東便) 하늘이 황금색(黃金色)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나는 감옥소의 높은 벽돌담을 볼 수 있다. 이 벽돌담 너머로 멀리 푸른 하늘아래 내 십자가, 한국의 산맥, 감방 안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나의 동경, 자유세계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나는 내 오버코트를 제쳐버리고, 다리를 덮은 털 조각도 차 버리고 벌떡 일어섰다. 처음으로 나는 파자마 역을 해 준 회색 내의를 벗어버렸다. 내 벌거벗은 살은 추위에 소름이 끼쳤고, 나는 신속한 동작으로 밤에 잘 때에 베개로 삼았던 다른 내의를 갈아입었다. 내 콧등은 얼어 따가웠고, 뻣뻣해진 손가락들은 내의(內衣)의 단추를 끼우는데 잘 움직여지질 않는다. 나는 벗은 내의(內衣)를 창살에다 걸어 두었다. 창살 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와 햇살이 행여나 내의에 붙어 있는 벼룩과, 이를 내 몰아 버리기를 바랐든 것이다. 나는 내의만 입은 채 창문에 가까이 서서 차갑고 깨끗한 밖의 공기를 흡족히 들여 마셨다. 그리고 나서 일정(日程)으로 정해둔 여러 가지 체조를 시작했다. 나는 내 건강을 유지해야 되기 때문이다.

국경 너머로 보이는 푸른 한국 산들의 산꼭대기를 이른 아침 햇살이 비취기 시작할 때다. 저녁 당번의 간수들은 감방 안을 들어다보지 않고 가버렸고, 아침 당번의 간수들이 조그만 한 나무문을 열고 들어와 내 감방을 들여다보는 이른 아침이다.

"어저께 당신은 마침내 법정에 갔다 왔지요!" 그는 비웃는 듯 말을 걸면서, 마치 하숙집 학생에게 하듯 주인의 행세(行勢)를 보였다. "그들이 당신에게 무슨 질문을 하든가요?"라고 대화가 계속되었다. 나는 중국어를 3개월간 공부했고 지방을 다니면서 몇 가지 단어를 주워 들어 배웠지만 내 중국말은 서툴었다. 나는 그 서투른 말로 나의 법정 심문은 내 종교에 관한 것이며. 천황 숭배하는 일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은 심각(深刻)해 지고 이상하다는 표시를 했다. "그래요", "단순한 종교문제로 투옥이 되었다면, 종교 이상의 문제가 당신에게 있는 것이 분명하오, 도대체 그 배경이 무엇이요? 그래 종교라는 것이 그렇게 생명을 걸도록 중요한 것이요?"라고 하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의혹(疑惑)에 찬 얼굴을 보고 이렇게 대답했다. "이러한 일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실제적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그를 대적하는 적(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상당히 오랫동안 종교에 대한 토론을 했다.

건물 밖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로 우리의 토론은 중단되었다. 그 발자국의 주인공은 낭하 끝까지 온 다음 밖의 문을 열쇠로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식사를 가지고 오는 소리를 나는 분간할 수 있었다.

나는 서둘려야 했다. 털내의(內衣) 위에다 목을 덥도록 만든 조끼를 입고, 털 속감을 오버코트에 붙여 단추를 잠근 다음 입었다. 이렇게 단단히 준비를 한 옷차림으로도 몸은 아직 따습지를 못하다. 나는 두 개의 손수건으로 목을 두르고 온종일 입고있는 오버코트가 쉽게 때가 묻지 않게 대비(對備)했다. 그리고 난 다음 매일 같이 세탁을 하는 또 하나의 손수건을 편리한곳에 펴 깔았다. 이것은 바로 소일(消日)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 기차간에서 점심을 먹고 숨겨둔 절가락을 손수건 위에 놓았다. 할빈 감옥에서 경험한 후 벤또(일본말의 도시락)에 딸려온 절가락을 간수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물 한 사발이 방안에 있어 그것도 나는 식탁을 차리는데 두었다. 중국인 간수와 긴 얘기를 하다보니 아침 식탁을 차려야할 시간을 빼앗긴 것이다.

내 감방 문이 열리자, 열쇠를 손에 든 검정색 정복의 간수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옆에는 긴 쇠사슬로 연결된 두 사람의 중국인 죄수가 내 아침 식사를 나르고 있었다. 그들은 똥똥하고 기분이 상쾌한 모양을 가졌고, 오렌지색을 한 토실토실한 곰 같이 보였다. 나는 그들이 왜 그렇게 하는지, 또 얼마동안이나 있을지 궁금했다. 사실은 그들이 오렌지 색 옷을 입은 것은 이미 재판을 받고, 선고를 받았다는 표시인 것이다. 그들은, 이 감옥에서 이미 일년 이상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내 친구들, 한국 그리스도인들과 달리 좀 이득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일년이 지났어도, 아직 재판도 받지 않고, 집에는 연락도 못하고, 체포되었을 때에 입고있던 그 한 벌 옷을 지금까지 입고 떨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선고를 받고 감옥살이를 하는 죄수들은 집과도 연락이 되고, 또 집에서 보내는 여러 가지 물품(物品)들을 받아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똥똥한 두 중국인들은 노랑 색 옥수수떡이 담긴 나무 양동이를 긴 나무막대기로 꿰어들고 와서 옥수수떡을 손으로 집어냈다. 나는 사발 하나를 내 밀어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난 다음, 내 다른 사발을 갖다 물을 쏟아 버리고, 소금에 저린 짜거운 무장아찌를 담아 주었다. 옥수수떡이야말로 구미를 돕지 못하는 음식이다. 옥수수를 씻지 않은 것이 분명하며, 아주 거칠게 가루를 만든 다음 쪄서 주는 빠삭 마른 떡이다. 사실상 떡 속에는 굵은 모래가 있어 Byran의사는 이 하나를 분지르고, 단단히 씹지 말라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나는 두 사발에 음식을 받고, 고맙다고 한 다음, 마룻바닥에 차린 손수건으로 덮인 식탁 위에 차려놓았다. 나는 음식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머리를 숙이고 식사 기도를 올렸다. 일상 생활에서 지키는 습관을 내 감옥생활에 연결시키는 것은 나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된다. 내가 눈을 뜨고 쳐다보니 아직도 세 사람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좀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떡이 아직도 좀 뜨듯한 기운이 남아 있을 때 먹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나는 미소를 지워주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이 중국인 죄수들은 조롱(嘲弄)하는 눈치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우마(맛이 있어요)?"라고 한 사람이 내게 물어 뎄다. 나는 볼에 음식이 가득히 있는 체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하우(맛이 좋아요)!"라고 받아 넘겼다. 그들은 미소를 지었고, 그 중 하나는 경멸하는 눈치를 보였지만, 나는 다시 미소를 던져주었다. 우리는 다 같이 죄수들이고, 다른 세계에는 더 좋은 것들이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현재로는 주는 것을 받을 뿐이고, 또 우리는 이것을 좋아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이렇게 내 문간에 서 있는 일은 이상한 것이 아니고, 가끔가다 우리가 서로 천진난만하게 대화하는 것을 간수들은 허용하였다. 짜거운 무장아찌는 침이 입에 감돌게 하였고, 이것이 없었던들 바싹 마른 옥수수떡을 먹을 수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장아찌를 다 먹은 다음에(좀 더 있었으면 하면서), 간수는 더운물을 사발에 담아 주었고, 그 물이야 말로 아침 식사를 마지막으로 뱃속에 씻어 넣는 음식이다.

물 한 사발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배운 적이 있다. 일주일 전에 감옥에 들어오는 수도관(水道管)이 고장이 나서 24시간 물 없이 지낸 적이 있다. 물론 압록강변(鴨綠江邊)에 있는 감옥이니 물을 길어 올 수도 있었든 것이 아닌가?

짜거운 장아찌와 바싹 마른 옥수수떡을 먹고 난 다음 목마른 것을 견디기가 무척 힘들었다. 마침 아침에 세수한 비누 물을 버리지 않고 대야에 담아 두었었고, 나는 그물을 손수건 세겹을 통하여 걸러 마신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비누 물이 배탈을 나게 하였고, 며칠 동안을 고생했다. 이러한 물 없는 날은 그 후에도 다시 발생했다.

나는 옥수수떡 부스러기를 좀 남겨, 식탁보인 손수건에 싸서 챙겨두었다. 나는 창문에 다가서서, 혹시 참새가 가까이 있으면 옥수수떡 부스러기를 뿌려줄 생각을 한다. 처음에는 참새들은 겁을 내더니 차차 창문살 까지 내려왔다. 까마귀들은 참새들보다 더 겁이 많지만, 내가 먹을 것을 뿌려주는 것을 알게되었다. 언젠가 하루는, 눈이 와서 새들이 평소에 먹을 것을 찾는 땅이 눈으로 가려진 날, 새들은 담 벽 꼭대기에 나란히 앉아 있다가 내 창살에 와서 떡 부스러기를 물고 다라 나곤 했다.

그 후 나는 이 일을 계속했다. 처음에 나는 내 고독한 시간을 극복하기 위하여 열심을 내 본 것이다. 그러나 몇 주일이 지난 다음 내 감방생활이 안정되었고, 나는 이렇게 오락 삼아 새와 보내는 시간과, 기도하는 일을 즐겼다. 기계문명이 발달한 시대에 사는 우리가 외부(外部)로부터 무엇인가 해야된다는 압박감(壓迫感) 때문에 깊은 명상(冥想)의 시간을 방해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지금 나는 가끔 새롭게 떠오르는 생각과 내 환경에서 감동을 받아, 내가 알고 있는 찬송과 성경구절에 도취되어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했던 찬송이나, 성경구절이 떠올라 그것을 암송하게 될 때의 기쁨이란 내가 다 표현할 수 없다. 기도 할 때도 같은 경험을 하게된다. 속히 기도를 마쳐보려는 생각이 없어졌다. 어떤 때는 나 자신을 완전히 잊거나, 처해있는 입장을 잊어버리고 기도를 계속하게된다.

나의 아침 기도회가 끝난 다음, 세숫대야에 찬물이 들어온다. 나는 그 물에 손수건 두 개를 세탁하는 것이 예식처럼 되어버렸다. 언젠가 한번은 그 물에 내 와이셔츠를 세탁한 적이 있다. 햇빛이 중천(中天)에 오르면 나는 햇빛이 비치는 창문에 기대어 서서 내 옷에 기생(寄生)하고 있는 벌레를 찾기 시작한다. 이것이 나의 사냥 놀이가 된다. 내가 포수(砲手)가 된 것이다. 펄떡 급하게 뛰는 놈은 노루이며, 숨어서 찾기가 힘든 놈은 토끼이다. 어떤 날 내 사냥은 노루 일곱 마리, 토끼 30마리의 기록을 올린 적이 있다. 도대체 이놈들이 어디에서 다 왔단 말인가? 할빈 감옥에 있을 때 밤을 틈타서 내게 온 모양이다.

그렇지만 오늘 나는 이러한 사냥 놀이를 하는 중 새삼스럽게 흥분하게된 것이다.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한 것이 남아 있는 동안, 나는 무엇인가 하기를 원했으며, 이것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 생각을 한 첫날 저녁 노래의 한 구절을 지어내어야 했기 때문에, 낮 시간에 이미 생각해 낸 구절을 계속 암송하면서 또 새 구절을 만들어 보는 일로 시간이 모자라는 지경이었다. 아마도 내 바로 옆 감방에 감금된 Byran의사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내 행동은 그를 성내게 했을 것이다. 나는 감방을 거닐면서 똑같은 구절을 같은 곡조로 수백 번을 반복했으니 말이다. 나는 이 수백번 반복한 구절을 내 두뇌 속에 새겨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저께 나는 검찰관(심문관)이 내 친구에게 소리 지르는 것을 들었다. "누가 이 나라를 만들었는가? 여호와 하나님인가? 아마데라스 오미가미냐?" 나는 정말로 큰 격려를 받았다. 진실로 이 문제는 논제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에 구멍이 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어떤 정치적이나 국가적인 이유로 체포되어 감옥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 간수들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쓰고 있으며, 이 이름은 내 노래 속에 여러 번 쓰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런데 도대체 여호와라는 뜻이 무엇인가? 출애굽기 3장 14절 말씀에 의하면 그 뜻이 "I am that I am=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이것은 히브리어에서 동사 "to be=존재한다"라는 뜻이며, 하나님께서 설명하시는 것은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뜻이며, 피조물 밖에서 존재하신다는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러한 생각은 내 노래의 제 2절을 구상(構想)할 수 있게 하였고, 나는 이 구절을 마음에 새겨 쓰기 시작했다.

감사를 드리세!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세,

그는 홀로 존재하시는 바로 그분일세.

그는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창조되지도 않은 바로 그분일세,

그리고 그분은 시작이 없는 분이로다.

그분은 모든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서부터 영원 끝까지 계실

여호와 하나님 바로 그분일세.

감사를 드리세!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세.

감사를 드리세! 그분이 영원히 다스리시네.

그러나 나는 법원에 끌려갔을 때 또 다른 감명을 받은바 있다. 그 노란 색깔의 나무로 된 꼬리표에 빨간 색으로 씌어진 번호 "22"는 너무나도 상징적 이였기 때문이다. 성경은 많은 숫자로 되어 있는데, 나는 그 "2"라는 숫자의 상징적인 뜻을 우리가 처해 있는 입장에 적용하여 생각해 보았다. 숫자 "2"는 증인이나, 순교자의 숫자이며, 주님께서 자기를 증거 하시기 위하여 보낸 제자들인 것이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나는 노래의 구절을 구성(構成)하기 시작했다. 이 일은 아마도 쉽게 나의 전(全) 하루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내가 구절을 구성할 뿐 아니라, 이 구절들을 완전히 기억하도록 나는 연습해야되기 때문이다. 일거리가 생긴 것이다! 나는 다시 경험하는 감명과 흥분된 마음을 달래가면서 노래를 짓기 시작했다.

이십이 (22), 둘씩 둘씩

꼬리표에 새겨진 빨간 숫자 "2"와 또 "2"가 나란히!

이 죄수들은 우리 주님에게 속해 있다는 표시를, 감히

세상의 이것보다 무엇이 더 잘 맞고, 좋게 표시할 수 있겠는가?

죄수들 집단 속에 있지만 그들의 고향은 거기가 아니라네.

둘씩 둘씩 그들을 끌어 드리네;

어떤 이는 얼굴이 뇌랗고, 창백하고 여위었네;

병을 치료하는 태양 빛을 막아버렸네,

추위와 굶주림이 힘을 다 빼앗아 갔네.

둘씩 둘씩 수갑이 채워졌네,

이렇게 된 것은 단 한가지 목적일세, 옛날에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리스도께서 계획하신 그 뜻을 따라감일세,

그가 보낼 때 둘씩 둘씩 짝지어 보낸다네.

아비와 아들, 남편과 아내,

어미와 아이, 모두가 삶의 변두리에 이르렀네,

의사와 간호원, 목자들과 양떼들,

둘씩 둘씩 그들은 짝이 되어 끌려가네.

두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채워진 수갑, 그러나

그들의 가슴속에는 둘씩 둘씩으로 되어 있네

둘씩 둘씩이라는 꼬리표를 차고있지 않는가,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둘씩 짝이 되었다고 꼬리표가 달렸네.

한사람 한사람씩 각기 감방에서 살지만,

그들의 영혼은 둘씩 둘씩임을 선언하네.

너희들 둘이 모여 마음이 하나가 될 때,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이루어지리라고 하셨네.

간수가 보지 않을 때 둘씩 둘씩은,

서로의 머리를 굽혀 가까워지고, 무릎이 서로 닿았네.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그리스도께서 "너희들 중에 있겠노라"고 하셨도다.

그러나 당신들이 증거 할 소식이란 무엇인가,

"너희들은 둘씩 둘씩 쇠고랑을 차고 가라"고 하셨던가요?

당신과 나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신 그 어린양의

왕국, 그의 심판, 우리에게 보이실 영광을 전할 것인가요?

그렇지만 몇 사람밖에 없다는 그들을 당신은 알아볼까요?

당신의 증언이 정말인지 어떻게 알 수 잇다는 말입니까?

성부와 성자, 그리고 말씀과 성령께서도

둘씩 둘씩인 우리 마음속에 계시어 증거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둘씩 둘씩 보낼 때 부족한 것이 있었던가?"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말씀과, 권능과,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피할 길을 또 주실 것입니다.

이 높은 담 벽 너머로는 높고 푸른 하늘이 있고,

둘씩 둘씩의 꼬리표가 또 있습니다.

말하십시오, 용감하게, 숨길 생각이란 하지 마셔요,

감옥에 갇힌 우리들 곁에 그들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서있는 곳에서 말하기란 힘들지도 모르니

빗장과 창살 뒤에서 소곳이 말씀하시구려.

그들이 밖에 있거나, 그들이 안에 있거나,

둘씩 둘씩이란 승리의 뜻을 말합니다.

"끝까지, 끝까지", 둘씩 둘씩

몸이 땅에 묻히고,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갈 때까지.

죽임을 당했다고요?, 그들은 새 왕국에 서 있을 것입니다.

부활되고 영광을 받을 둘씩 둘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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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기도(祈禱)와 금식(禁食)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너희가 이 산에게 말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겨져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에게 불가능한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니라. 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리라."고 하시더라. (마 17:20-21, 킹 제임스 성경에서 인용)

나는 요시다상과, 또 친절한 간수들로부터 3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감옥소에 투옥(投獄)되어 있는 것을 알게되었다. 6명이 여자들이며, 그중 한 명은 생후 한달 밖에 안된 갓난아이를 대리고 있다고 한다. 가장 활동적이든 그리스도인들의 지도자 김윤섭과 박이흠이 우리가 있던 감옥, 요시다상이 갇혀있던 바로 그 감방에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갇혀있던 감옥은 다 외국인들, 즉 일본인, 한국인, 그리고 미국인들이며 만주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만주의 전역을 통치하여 정부의 모든 높은 자리를 일본인에게 맡긴 일본이 일본인 죄수들을 우리와 같이 둔 것을 잘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이 감옥에 온지 얼마 안되서, 우리 그리스도인 친구 한 명이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사람은 정신착란(精神錯亂)을 일으켜 여러 가지 흉내를 내며 지낸다고 한다. 내게 이 소식을 전해준 사람의 얘기를 자세히 들은즉 이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철저하고 경건하게 살던 약 25세가 된 최한기이다. 정말 믿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은, 친하게된 간수 중 하나가 알아보아 주겠다고 자원한 다음 똑 같은 정보(情報)를 가져다주었다. 이 소식은 나로 하여금 적지 않은 실망을 안겨주었다. 놀랄 만 한 일이 생겼다. 하루는 오후에 순경이 와서 내 감방 문을 열쇠로 열고 따라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내가 그 최한기에게 가서 그를 위하여 기도해 줘야한다고 말하면서 나를 대리고 그 감옥 건물로 들어갔다. 나는 이 건물에 여러 번 가본 적이 있다. 내가 이 감옥에 온 다음날 아침 이 건물에 와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새로 온 죄수들을 빨가벗겨 몸을 조사하고, 몸무게를 달아보고, 몸을 두드려 보는 일반 신체검사를 받았다. 그 때 그 의사는 중국인이며 그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목단에 있는 남만주(南滿洲) 철도의과 전문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아주 친절했고, 능률 있게 일하는 의사였다. 처음 그를 대면하자마자 그는 나에게 감옥 생활을 견딜 수 있는가? 차가운 마루바닥에 잘 수 있는가? 감옥 음식으로 견딜 수 있는가?를 친절하게 물었다. 나는 대답하기를 내가 한국사람들이나 중국사람들의 밥을 먹고 살아 왔으니 그들이 견딜 수 있다면 나도 견디겠노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당신은 서양사람이 아니오" 그리고 당신들의 생활 수준(水準)이 우리 보다 높지 않소. 내가 어떻게 당신을 도와 줄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요?"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견디면 나도 견딜 수 있겠지요. 하기야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서 병들고 마침내 죽게되는 것을 알지요. 정말 당신이 나를 도와주실 수 있다면 당신에게 부탁드릴 것이 좀 있습니다."

"감옥소 앞뜰에 집단이 여기저기 있고, 또 포대 쪽도 여기저기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 놈들을 꿰매어 엮고 집을 채우면 적당한 매트리스(mattress)가 될 것이며, 난방(煖房)장치가 없는 이 감방에서 섭씨 영하의 온도를 견디는데 도움이 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의사는 할 수 있는 한 그렇게 해 보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그 착한 의사의 의도는 좋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주(二週)가 지나도 매트리스는 오지 않았다.

그 후 손가락에 염증이 생겨서 의료실(醫療室)에 몇 번 들린 적이 있다. 구두끈에 달린 쇠붙이로 열심히 글을 벽에 새기는 일을 할 때 인지(人指) 손 고락을 다친 것이다. 내가 집에 있다면 약간 염증이 생겼으니 옥토정기를 한번만 바르고 잊어버릴 수 있지만, 감옥에서는 그리 쉽게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 염증이 더 심해지자 나는 간수에게 보였고 내가 감옥에 올 때 가방에 챙겨온 구호약품 등을 가져다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내 요청을 거절했지만, 나를 의료실로 데려갔고, 나는 조그마한 대기실에 차례를 기다리는데 온 아침을 보냈다. 단조로운 감옥생활에서 이렇게 색다른 사건을 겪는 것은 환영(歡迎)할만한 일이다. 계속해서 몇 차례만 치료를 했으면 쉽게 나아버리고 말 것을 간수는 제 고집대로 며칠을 두고 본 다음 염증이 악화된 것을 보고야 다시 의료실로 대리고 갔다. 일요일과 휴일이 끼었고, 또 간수가 까맣게 잊고 있어 의사를 두 번째 볼 때 상처는 몹시 악화되었다. 나는 상해(上海)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다리를 잘린 Powell씨의 사진을 본 기억이 난다. 그의 다리의 상처가 악화되었을 때 감옥소 관료들이 본체만체 했기 때문에 더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 되여 다리를 잘라야 했든 것이다. 내 손가락도 감옥소 관료들이 무관심해 진다면 손을 잘라야 하는 경우가 생기지 않겠는가? 지금 나는 다시 의료실로 끌려가 의사의 친절한 인사를 받았다. 그는 자진하여 매트리스 얘기를 꺼냈다. 그는 출장중이였고, 아직도 매트리스를 본적이 없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난 다음 최한기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알고 말고요"라고 대답하자 그는 나를 의료실 뒷방으로 대리고 갔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자동적으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최한기가 분명하기는 한대 정말 몰라보게 된 것이다. 최한기는 언제나 말끔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나타나는 사나이다. 그는 항상 흥겨운 사람이었고, 또 그가 참석하는 모임마다 행사의 중심인물이었고,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아니었던가. 그는 예리한 관찰력과 지각이 있으며, 부단히 성경 연구를 한 결과, 그와 같은 젊은 친구들 간이나, 나이가 든 교인들이 다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게된 지도자가 아닌가. 그의 아내는 교회에서 활동적이고 그들은 아주 귀여운 두 아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편리하고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고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해 보겠다고 왔던 것이다. 나는 그들이 북녘(北域) 만주지방에 가난한 가족들과 같이 일하기 위하여 조그마한 오막살이를 임시 거처로 삼고 이사한 것을 기억한다. 그들은 한국에서 부유한 집안에서 살다 온 사람들이였으나, 만주에서 사는 모습은 마치 진흙구덩이 속에 피어 있는 Orchids 꽃처럼 아름답고, 선망(羨望)의 대상(對象)이 된 사람들이다. 그는 처음 몇 차례 경찰에 호출을 당하더니 마치 그물에 걸린 것처럼 잡히게 된 것이다. 한번은 그가 경찰 진술에 그의 신앙의 입장을 불분명하게 대답하고 온 다음, 양심의 가책을 참을 수 없어 오십리(五十里) 길을 걸어 경찰에 다시 가서 분명한 진술을 남겨두고 온 것을 나는 기억한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바로 우리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 일을 내게 얘기 해 준 때 였다. 그러나 그때 그는 간증하기를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만일 누구든지 아비나 어미나 아내를 미워하고, 내게 오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인용하였다.

우리도 그후 같은 입장에 도달한 것이다. 미국정부에서 우리가 긴급히 귀국할 것을 통보한 것이다. 미국시민들을 피난시킬 선박을 동양 해안에 이미 보낸 것이다. 우리 친구 선교사들은 이미 귀국하였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유하며 떠난 것이다. 최소한 Kathy와 아이들이 우선 피난을 하라고 서두르지 않았던가!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식량은 벌써 구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우리를 적대시(敵對視)하는 것을 어떻게 참는다는 말인가? 부모가 된 우리에게 아이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권리가 있는가?

그 다음 우리는 최한기와 또 그와 같은 다른 친구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처럼 깊은 신앙의 기본에서 시작한 것도 아니지만 우리와 같은 대열에서 우리와 같이 견디겠다는 것이다. 물론 같이 견디겠다는 것이 우리를 위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구주(救主)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도망할 자리가 없다. 나야 내 식구를 미국으로 보낼 수 있지만, 한국사람의 경우 시베리아는 그들을 거절하였고, 일본이 한국인들을 중국으로 갈 수 있게 안할 것이며, 미국정부의 Exclusion 법안으로 미국에 갈 수도 없다.

지난 2-3년 간 나는 남녀 할 것 없이 어른들과 아이들에게 죽도록 믿음을 지킬 것을 강조해 왔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신사참배(神社參拜)에서 천황(天皇)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 보다는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참아야 된다는 격려(激勵)를 해 온 것이다. 겨우 아홉살된 여자아이가 어머니와 함께 투옥된 것을 나는 보았다. 바로 그 해 여름에는 16세된 목사의 아들이 투옥된 후 용감하게 신앙을 지켜온 일로 우리 모두가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일이 있기 몇일전 학교 교사 김씨 내외가 한달 된 갓난아이를 대리고 투옥되었다. 이전에 얘기한 바 있는 장신애 여인은 다섯 아이들이 있고 얼마 있어 여섯째 아이의 해산날을 기다리는 임신부이며, 치맛자락에 매달리는 어린아이들을 불고하고 감옥에서 심문을 받지 않았던가. 그의 큰아들은 학교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거절함으로 심한 몰매를 맞고, 결국은 국민이 다 받을 초등학교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도록 학교에서 쫓겨난 것을 나는 기억한다.

우리 식구들이 한국을 떠나버리고, 고난은 한국 사람들끼리만 받도록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바로 내가 그들에게 신앙을 끝까지 지켜야 된다고 열심히 강조한 다음이 아닌가?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한 우리는 식구를 할빈에 그냥 살게 할 것이며, 우리는 한국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고난을 당하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진료실에 들어가는 문간에 서 있을 때 이러한 생각들이 내 가슴속에 용솟음쳤다.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 머물러 있는 것이다. 만일 내가 이러한 짐승을 무섭다하고 안일한 것을 찾아 미국으로 귀국했다면, 그러한 부끄러운 일이 어디에 더 있겠는가. 그렇다! 짐승이다! 머리는 길게 자라서 빗질하는 일이 없고 얼굴과 손은 축 늘어지고, 그가 입은 더러운 저고리는, 저고리를 본 일이 없는 사람이 입혀준 것 같이 제멋대로 몸에 붙어 있지 않는가. 젊고 건장하던 그의 몸은 몹시 여위고 다 늙은 노인처럼 되었다. 도대체 그는 애써 아픔을 참는 것인지, 병이 들어 너무 허약해 진 것인지? 그렇지만 눈을 보라! 마치 미친개의 눈처럼 촛점이 없이 멍하게 떠 있지만 사납게도 보이지 않는가!

나도 알지 못하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내 입술은 떨렸다. 내가 감옥에 있는 죄수라는 것을 잊고, 허락을 받아야 서로가 얘기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나위가 없이 나는 소리를 쳤다.

"한기야!" 늘 친근하게 부르던 아명(兒名)으로 그를 불렀다. 그는 감각없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것이 어떻게 된 거야? 너는 몰매를 맞았구나?" 아차 하고 나는 정신이 되 돌아왔다. 이러한 질문을 한다는 것은 현명치 못한 일이다. 한기는 고개를 끄떡거리지만, 제정신으로 하고 있는지 분간 할 수가 없었다.

이 진료실에 들어와서 또 한가지 놀란 것은 Byram의사의 부인 Bertha가 의자에 기대어 맥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건넜다. 죄수들끼리 말하는 것을 간수들이 묵인을 할지는 의문이다. 간수들은 친절했고 의사도 그러했다. 그들은 다 중국인들이며, 혹 일본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조심되었다. 우리가 수갑을 차고 감옥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나는 Bertha와 만난 것이다. 우리는 말없이 어깨를 굽히고 처량하게 앉아 있는 최한기를 내려다보고 있다. 최한기는 넓은 가죽띠를 띠고 있었고, 그 가죽띠는 자물쇠로 잠겨져 죄수가 그 띠로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을 방지하도록 한 것 같다.

"나는 며칠 전에 여기에 온 일이 있어요" Bertha가 말을 시작했다. "그 때 최한기와 같이 기도를 하도록 나를 대리고 왔지요. 내가 기도를 시작하자 그는 그의 머리를 내 어깨에 턱 기대고 마치 갓난아이가 어머니 젖가슴에 의지하는 것처럼 나를 의지했지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보였지만,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미소를 보여주는 여인이다.

나는 최한기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의 멍청한 꼴을 어떻게 할 수 가 없었다. 가끔가다 그는 덜덜 떨며, 알아듣지 못할 말로 중얼거리며, 아이들이 온다고 했지만 그가 하는 말은 아무런 뜻도 없고 사실성(事實性)이 없는 헛소리였다. 그의 입술은 파랗고 얼굴과 온 팔뚝에 소름이 끼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대체 그들이 어떻게 했기에 정신이 돌기까지 되었는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내가 알고 있다면, 그는 바로 최한기이다. 그 믿음의 사람의 정신이 돌았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 그들이 그를 미치도록 때렸단 말인가? 그를 몹시 성나게 심문했다는 말인가? 나도 경험한 일이 있다. 그들의 심한 고문을 받을 때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최한기는 아주 지성적인 신사(紳士)이지만 몸은 그리 건장한 편이 못된다. 아마도 그의 지성이 그 심한 고문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춥고 굶주려서 정신이 돌기까지 되었다는 말인가? 내가 굶주린 경험에서 알지만 심히 굶주리면 두뇌(頭腦)가 제 기능을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만일 그의 비위가 상했다면 그것은 바로 그의 신앙이 받아 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하나님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기도했고, 또 Bertha가 기도했다. 마음과 근육의 긴장이 풀리는 듯 했다. 내가 상상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눈동자가 좀 정상으로 돌아오는 듯 했다.

우리의 기도가 끝났을 때 밖에서 간수들이 당번을 교체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불려온 사명이 끝나고 각기 감방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내 마음은 몹시 무거워졌다. 최한기의 모양이 내 마음에 떠오르고 사라지지 않는다. 가련한 형제, 그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러한 일이 생기리라고 생각이나 해 본 일이 있었겠는가? 그는 젊고, 젊은 아내가 있고, 그리고 아주 똑똑하게 생긴 두 명의 아들이 있지 않는가? 나는 그의 장래를 생각해 보는 일로 마음은 검은 구름으로 덮혔다. 그 젊은 여자가 이렇게 괴물처럼 생긴 남편을 수종(隨從)들며 평생을 살아야 하는가! 한국에는 정신병 환자들이 피난할 만한 제도가 없다. 그 여자는 그 남편을 평생 집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들 둘은 그 아버지를 지켜보며 자라야 할 것이 아닌가?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게 젊은 인생이 죽음으로 끝을 맺어야 한단 말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내 마음을 괴롭혔고, 생각할수록 내 가슴에 짐은 무거워졌다. "오 하나님." "오 하나님." 내 기도의 말문이 열리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불러보는 것 외에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이 왜 나를 그와 함께 기도하도록 대리고 왔다는 말인가? 그리고 왜 Bertha도 불러왔다는 말인가? 감옥의 일본인 책임자가 이 일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그들이 모를 이가 없다. 우리가 감방에서 의료실까지 오려면 상당한 거리를 걸어와야 하니 그들이 우리가 의무실에 온 것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대려오도록 명령하였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왜 그렇게 했는가? 아마도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대하여 소문을 듣고 실험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여하간 그들은 모든 것을 자기들 손아래 통제(統制)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장래도 그와 같이 비참하게 될 수 있다는 일종의 협박으로 이 가공(可恐)할만 한 실정을 우리에게 보이고자 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변을 들을 여지가 없이 내 마음은 최한기에게로 돌아갔다. Bertha가 말하기를 첫날 기도한 후에 최한기는 좀 진정해 지는 것 같더니 그 다음날과 저녁에 그의 상태는 심히 악화되어 소리를 질러대고, 어린아이처럼 울고, 몸을 벽에다 수없이 부디쳤다고 한다. 그가 다시 감방에 갔는지 모르겠다.

나에게는 새로운 일거리가 생긴 것이다. 지금까지 경험한 어떠한 일 보다도 중요한 일 인 것이다. 끝임 없이 열심으로 하나님께 간청(懇請)하는 기도를 드려야한다. 누구든지 나를 조롱(嘲弄)하려면 하게 두어라. 이렇게 어려운 경우에 처했을 때 세상에 나와 같이 종교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내 생각과 다를 수 있겠는가? 나는 기도를 시작하자 흐느껴 울었다. "하나님." "오 하나님." 오랫동안 내 기도는 이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마침내 나는 내 성경책을 손에 받았다. Roy(Byram의사)는 압수된 성경을 달라고 열흘을 애걸한 끝에 성경을 돌려 받았다고 했다. 우리가 서로 얘기할 기회란 어렵고 드물지만 이러한 얘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감방 창문이 닫혀지면 밖에서 나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가 없지만, 창문이 열렸을 때 소리의 통로가 생겨서 우리는 서로 얘기할 기회가 있었든 것이다. Roy와 내가 같은 때 창문에 섰을 때 통화가 가능하였다. 열린 앞들 공간을 향해 상당히 큰 소리를 질러야 했고, 어느 구석에서 간수들이 듣고 우리를 징벌(懲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화를 여러번 하고싶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Roy가 그의 성경을 돌려 받았다는 사실을 듣자 나도 성경을 돌려 줄 것을 애원하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난 후 나도 성경을 돌려 받았다. 그렇지만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성경을 돌려주어야 하지 않는가? 나는 성경을 돌려 받은 일이 상을 받은 것처럼 기쁘게 생각되었다.

나는 최한기를 위하여 기도하며, 또 성경을 공부했다. 어떻게 나는 기도해야 하는가? 무엇을 구할 것인가? 언젠가 예수님께서 정신이상으로 난폭하게 광증을 부리던 사람을 위하여 말씀하셨다. "이러한 것은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고칠 수 없다"고 하셨다. 금식이라니? 나는 최한기를 위하여 금식을 할 수 없다. 나는 배가 부르도록 음식을 받아먹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옥수수떡이 충분할지는 몰라도 내가 필요한 음식이 내게는 없단 말이다. 아침에 주는 옥수수떡과 짜거운 무장아찌, 가재를 몇 마리 넣고 끓인 멀건 배추 국과 함께 주는 옥수수떡 점심, 그리고 짜거운 무장아찌를 삶아서 옥수수떡과 주는 저녁 등이 규정(規定)된 음식물이다. 나는 금식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내가 투옥되기 전에 매주 24시간을 음식과 물을 마시지 않고 근 일년을 계속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우리 집에서 몇 부락 떨어진 곳에 사는 그리스도인이 투옥되고 감옥에서 굶어 죽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손님을 만찬에 초대하거나, 오후에 차를 마시려고 모이는 일이나, 내가 집에서 평안하게 지내는 일은, 이 수감된 친구 그리스도인을 쉽게 잊어버리게 마련이었다. 나는 매 화요일마다 금식하고 내 자신이 맹세하기를 이 금식을 내 친구가 출옥할 때까지, 혹은 내가 감옥에 들어갈 때까지 할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나는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금식해야 할 일은 다른 일 때문이다. 지난번에는 그 금식 기간이 끝난 후 나는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주간에 매일같이 음식은 잘 먹고 지냈다. 그러나 나는 이 감방에서 이미 금식을 하고 있는 샘이다. 나는 계속하여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그 말씀이 계속하여 머리에 떠올랐다. "이러한 것은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고칠 수 없다".

하루는 감옥소 직원에게 내가 감옥에 들어 올 때 가져온 돈 얼마를 최한기 앞으로 구좌를 옮길 수 없는가를 물은 적이 있다. 그 돈으로 감옥소 안에 있는 작은 상점에서 음식이라도 사 먹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필요한 것은 음식일 것이다. 감옥소 직원은 그러한 일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최한기를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도와 금식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게 하여 나는 날을 정했다. 요시다상을 통하여 나는 김용섭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십년(十年) 징역형(懲役刑)을 받고 복용중이며, 우리들에게 아직도 자유가 있을 때 그와 나는 여러 날을 같이 기도와 금식을 하며 지나든 사이다. 그에게 이번에도 기도와 금식을 같이 하자는 요청을 보낸 것이다.

"당신과 같이 기도하는 일에 가담하겠습니다."라는 회답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첫 번째 감옥살이에서 건강을 잃었기 때문에 금식에 대해서는 지금 내가 매달려있는 건강을 생각합니다. 아마도 지금의 싸움이 오랫동안 지속(持續)될 것 같습니다".

지난번 그가 감옥에서 나올 때의 상태가 생각나서 목이 매였다. 나는 그때 자유인 이였다. 그때 그의 부인이 감옥으로부터 남편이 다 죽어가니 데려가라는 소식을 전해 받았다.

그녀는 한 친구와 같이 택시를 타고 감옥에 갔었다. 그들은 그녀의 남편 김용섭을 감옥 밖으로 내 던지는 것을 본 것이다. 그가 입은 저고리는 다 벗겨졌고, 살이 다 노출된 그를 얼음짱 같은 땅위에 던졌고, 그는 너무도 약해서 바로 앉아 볼 힘도 없었든 것이다. 그가 입고 있던 내의는 다 찢어서 동료 죄수들의 붕대로 썼기 때문에 없어졌다. 동료 죄수들은 그를 크게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두 여인은 고생을하면서 그를 집으로 대려 왔었다. 다음날 그 소식을 듣고 Roy와 나는 달려갔다. 식구들이 가지고 있는 제일 좋은 이불을 온돌에 깔고 그는 그 위에 누었고, 그의 아내는 옆에서 열심히 간호하고 있었다. 그들의 네 살 짜리 아들이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그의 얼굴은 아버지가 집에 왔다는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누워있는 김용섭 옆에는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출생한 갓난아이, 딸이 나란히 누어 있었다. 우리가 방에 들어서자 그는 일어나려고 애를 썼으나 다시 쓰러졌다. 그는 우리에게 말을 건넜지만, 그 조그마한 방에서도 알아듣지를 못했다. 그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도록 시늉을 했다. 우리가 가까이 가서 앉고, 그는 쉰 목소리로 "임마누엘"(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심)그리고 "할렐루야"(주님께 찬양을)라고 속삭였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그의 신앙이었다. 그의 몸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그의 영혼에는 아무도 손을 대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에 그는 즐거워 할 수밖에 없었든 것이다. 그 후 그는 전도집회를 가졌고, 계속 설교를 하였다. 정부의 허락 없이 집회를 할 수 없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지만, 그는 마을을 다니며 집회를 계속했다. 그는 정부 기관의 높은 관료로부터 설교를 못하도록 명령을 이미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종교의 자유라는 것이 어느 정부의 인정(人情)많은 정책(政策)으로 오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마치 미국의 개척자들이 믿었든 것 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이며, 아무도 그 권리를 빼앗아 갈 수 없으며, 그 권리를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결국은 그들이 김용섭을 다시 체포하고 수감(收監)한 것이다. "지금의 싸움이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습니다"라고 한 말이 옳은 말 일 것이다. 참으로 김용섭 다운 말이다. 나는 그를 생각하면서 내 눈에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가옥에 들어왔으니 내 눈물을 막을 길이 더욱 없구나. 내가 김용섭 처럼 허약해질 것은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는 나와 같이 기도하겠다고 전했으며, 아마도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그에게 제시한 요청보다 더 좋은 것이다. 김용섭의 신앙이 금식을 하든 안하든 간에 환상(幻想的)일 수는 없다. 싸움이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금식을 할만큼 힘이 남아있다고 느꼈고, 그 금식 일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물도 마시지 않고, 옥수수떡과 무장아찌도 먹지 않았다. 나는 긴 시간을 기도하는데 보낸 후 내 성경을 열었다.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가?

최한기가 죽음의 경지에서 속히 회복되도록 나는 기도할 것인가? 이 비참한 형편에서 죽음으로 끝을 보도록 기도할 것인가? 그편이 최한기에게는 나을지 모르지만, 젊은 과부와 아비 없는 자식들을 어떻게 할 것이란 말인가? 그의 병이 낫게 해 달라고 나는 기도 할 것인가?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내 믿음은 너무 약해서 그가 더 이상 가망이 없는 것만을 생각한다. 그의 광증(狂症)이 회복된다면 그는 감옥살이를 계속할 것이며 감옥에서 겪는 온갖 고초를 되풀이 할 것이 아닌가! 나는 가끔 생각한다. 계속 복음을 전도하면서 형제들에게 믿음을 지킬 것을 강조한 나머지, 그 형제들이 경찰에 잡혀 수감되는 것을 보는 일은 내가 감옥에 갇히는 일 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이다. 나는 최한기가 병이 낳으면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을 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어려움이 되돌아 올 것이다. 혹시나 이 사람이 정신이상으로 남아 있는 이유로 그 부인은 고생을 무던히 할 것이고, 또 참고 견딤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본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또 묵상했다. 날이 저물기 전에 무엇인가 내 마음속에 충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최한기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그와 나는 다같이 하나님을 섬겨 온 것이다. 내 기도가 응답(應答)될 것을 믿게 되었다.

벽에다 말씀을 색인 일로 요시다상이 하나님께 경배하게 되었다. 나는 그로 말미암아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형제들과 같이 적지 않은 위안을 받고 있다. 감옥살이를 하고있는 형제들과 자매들은 그들이 섬기는 주님을 위하여 모든 고초를 참고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나는 지금 정신이 이상하게 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금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지키심을 나는 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와 간증을 들으시고 내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응답하실 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이대우 드림, 7/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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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목욕과 이발

감옥에도 양지쪽이 있다. 이 감옥에 온지 약 일주일이 되었을 때 내 감방 문밖에 떠들썩한 일이 생겼다. 간수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죄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 온 감방 밖에 죄수들이 나아와 낭하에 줄을 지어 서기 시작했다. 죄수 중 좀 운수가 좋은 사람들은 손바닥만한 일본식 세숫수건을 들고 있다. 몇몇 죄수들은 비누 쪽도 손에 들고 있다. Roy의 감방 문을 열쇠로 여는 소리가나서 나는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Roy도 감방에서 나와 낭하에 서 있었다. 최근에 와서 그들은 감방 창문을 열어 두기 때문에 내 감방 밖에서 생기는 일들을 볼 수 있었다. Roy가 신발을 신으려는 순간 내 눈과 마주쳤다. 이상한 것은 우리는 서로 길게 쳐다 볼 수가 없고 나는 곧 눈을 돌려 그가 낭하를 걸어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Roy와 그의 부인은 두 사람이 다 의사(醫師)이다. 그의 부인 Bertha는 집을 돌아보고 또 성경학교에서 교수(敎授)하는 일이 바빴기 때문에 의사 노릇은 그만 두었든 것이다. 그들에게는 다 큰 두 딸이 있는데, 미국에 가서 대학에 다니고 있다. Roy는 한국에서 열심히 선교사업을 하다가 우리가 만주에 오든 같은 때에 할빈에 왔다. Roy는 할빈 중국인 마을에 병원을 차리고 개업하고 난 다음, 할빈에 사는 많은 외국인들의 관심을 사게되었다. 그러나 Roy와 Bertha는 의사이기보다는 우선 철저한 그리스도인들이다. 일본의 천황 숭배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그들의 신앙을 표시하며 살아 온 것이다. Roy는 우리 가족의 담당 지정의사 이다. 그를 돕는 한국인 간호원, 아주 일 잘하는 태경이와 함께 우리 셋째 딸 Connie와, 그 다음 쌍둥이 David과 Mary를 세상에 나오도록 도와준 산부인과의 팀이기도 하다. 태경이는 감옥에 들어 올 때, Roy의 아내 Bertha와 같이 수갑을 차고 들어오지 않았던가! Roy는 마치 나에게는 고해신부(告解神父) 같은 분이다. 내가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나는 Roy에게 가서 문제를 해결 할 때 까지 그와 같이 의논을 했다. 그는 언제나 솔직하고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문제를 본다. 그러나 나는 신학문제를 가지고 빈번히 논의하는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의논할 때는 서로 받는 것만큼 또 내가 남에게 준다고 노력해 온 것이다. 내가 Roy를 가장 존경하는 이유는 그에게는 생활의 기준이 성경밖에는 없다는 점이다. 그가 성경의 어떤 구절을 이해하는 것이 내가 이해하는 것과 다른 데가 있지만 그는 언제나 바로 이해하고자 노력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언제나 성경 구절이 율법이었다. 그것이 바로 나로 하여금 내 문제를 가지고 가서 그와 같이 논의 하게된 이유이다. 그는 어떠한 문제든지 바른 대답이 있다고 믿었고, 또 그것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면서도 그가 믿고 있던 이론의 오류를 지적 당할 때 그 오류를 쉽게 인정하는 사람이다.

지금은 내가 Roy와 같이 감옥에 있다. Roy는 키가 6피트 2인치나 되고 아주 여윈 편이다. 그가 낭하를 걸어가는 것을 보니 어깨가 약간 구부러진 것 같다. 아마도 나지막한 감방 문을 출입할 때마다 그는 키가 남보다 큰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양털로 속을 댄 오버코트를 늘 입고 있다. 그것으로 추위를 견딜 수 있는 모양이다.

죄수들이 모두 나아와 줄을 섰다. Roy는 어깨를 좀 뒤로 재친 다음 앞에 서 있는 키 작은 친구를 내려다보았다. 죄과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서로가 결합된 동역자(同役者)들이다. 늘 그러하듯이 간수들이 죄수들의 수를 세는데 땀을 흘리고 있다. 아마 일곱, 여덟 번은 죄수들의 수를 점검한 다음에야 행진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문을 나가게 되었다.

얼마 후 죄수들이 돌아올 때는 모두가 설날을 맞이한 것 같이 얼굴에 빛이 나고, 발걸음은 사뿐사뿐 가벼워지고, 몸을 이리저리 때려보고, 수건을 흔들거나, 수건의 물을 짜내었다. 그들이 목욕탕에서 나온 것을 나는 쉽게 알 수가 있었다. 그들이 즐겨 지껄이는 농담은 쉽게 전염이 된다. 나는 두 번째 무리 중에 한 죄수가 되었고, 모든 죄수들이 다 흥겨워 지고 큰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을 알게되었다.

내가 줄을 섰을 때 박이흠을 보았다. 그는 경찰이 미행했을 때 까지 할빈교회에서 전도사로서 나와 함께 일을 했다. 그는 체포를 당하느니보다는 망명자로써 수개월 동안을 도망쳐 숨어살았다. 그러나 경찰은 결국 그를 중국 북녘에서 찾아내고, 안동까지 끌고 온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우리 조그마한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은 경찰이 그에게 심한 형벌을 주리라 생각하면서 걱정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나와 같이 여기 감옥에 있지 않은가! 그래도 그는 감옥생활에 잘 적응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즐거움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나지막한 건물로 행진하여 들어갔다. 간수들의 명령을 따라 모두가 옷을 벗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 명령을 잘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방 한쪽은 어름장 같이 차갑고, 다른 쪽에는 시멘트로 만든 큼직한 두 개의 목욕탕에서 따듯한 목욕물이 무럭무럭 김을 올리고 있다. 제각기 죄수들이 나무로 된 작은 대야를 잡고 목욕탕으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탕(湯)에서 물을 퍼냈다. 대야의 물을 몸에 끼어 얹고, 비누칠을 하고, 다시 물을 퍼내어 비누를 씻어 내렸다. 간수들은 우리를 내려다보며, 서둘러서 목욕을 끝내도록 재촉했다. 몸을 헹구고 난 죄수들은 한 사람씩 김이 무럭무럭 나는 탕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깐동안 혹 전염병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나의 친구이며, 나의 가정 담당의사인 Roy가 이 탕에서 목욕을 마쳤는데, 내가 걱정할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나는 곧 탕속에 풍덩 들어갔다. 머리만 물위로 내어놓고 탕 한 가운데 자리잡고 나는 앉았다. 몸이 이렇게 따끈한 물 속에 잠길 수 있는 것은 말로 할 수 없이 멋진 일이다. 우리는 한동안 싱글벙글 웃으며 서로 쳐다보았고, 갈색과 흰색 피부로 된 어깨를 서로 비비대며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두 개의 목욕탕은 빈틈없이 죄수들로 가득 찼다. 내가 40일 감옥에 있는 동안 이러한 목욕을 두 번 할 수 있었다.

바로 이때 나는 정신 이상(異常)이 된 최한기가 석방되어 집으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마침내 그는 좋은 음식을 먹을 것이며, 따듯한 방에서 잘 수 있고, 또 그를 염려해 주는 많은 사람들 틈에서 지나게 된 것이다. 나의 기도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응답된 것이다.

내가 석방되기 얼마 전에 이러한 일이 있었다. 조그마한 한국인 간수가 나를 좀 못 마땅하게 쳐다보면서 내 홍색수염에 대해 시비를 건 일이 있다. 동양에서야 검정색 수염이 표준인 것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조롱을 하고 나섰다.

"당신 수염은 꼭 쇠털 같아요." 나는 곧

"당신 수염은 돼지털 같아요"라고 말대꾸 해 주었지만 별 반응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의 머리털 색깔이 검정색이니, 이 작은 간수도 자기의 머리털 색깔에 대하여 무엇인가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다 내 머리는 길게 자라서 텁수룩하고, 내 긴 얼굴을 내려 덮었으니 내 홍색 수염과 머리털은 내 꼴을 몹시 우습게 만든 것이다. 짧은 기간에 내 머리털과 수염이 이렇게도 길게 자랐으니 그 간수에게 흥미를 끌게 한 것은 당연하다. 나는 반사하는 유리창을 거울로 삼고 상당한 시간을 보내면서 머리와 수염을 다듬어 모양을 내 보려고 노력해왔다.

"이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 간수가 내게 물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외 머리를 삭발해야된단 말인가! 나는 아직도 법정에서 죄에 대한 선고도 받은 일이 없는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는 간수가 내게 베푸는 친절을 바로 알아차리고 그에게 어떠한 이발 시설이 있는가를 물었다.

"죄수 중에 이발사가 있어요. 가위를 하나 구하는 일은 쉬우니까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이발을 하기로 승낙했다. 그 간수는 나를 대리고 Roy의 방문 앞을 지나 낭하로 들어갔다. 비어있는 감방 앞에 놓여 있는 흔들거리는 궤짝 위에 나를 앉게 했다. 그러자 그 빈 감방의 문이 열리고, 열(10)번째 감옥살이를 하는 김용섭이 나타났다. 그는 온통 뱃집 단으로 가득한 방 한 가운데 앉아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관료들이 김용섭이가 짚신을 삼을 줄 아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전쟁 탓으로 고무신을 만들 재료가 희귀하게 되어 죄수들의 짚신을 만들도록 그에게 사역을 준 것이다.

간수는 나를 죄수-이발사를 기다리게 혼자 두고 가버렸다. 우리는 침묵을 지켰다. 김용섭과 서로 나눌 태산같이 많은 얘기가 터져 나올 것을 참고 침묵을 지켰다. 간수가 우리를 신용하는 그 마음을 내가 배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이발사가 왔다. 그는 아주 젊게 생겼고, 그가 입은 옷은 밤낮 할 것 없이 몇 개월을 두고 입어 찌들고 온통 흙이 묻어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곤경(困境)은 다 같은 것이 아닌가! 간수는 떨그럭거리는 커다란 가위를 이발사에게 주었다. 이발사는 한참동안 그 가위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드디어 아무말 없이, 또 표정의 변화도 없이 내 머리를 깎기 시작했다. 이러한 엉터리 이발 기구를 가지고는 이발사의 실력을 과시할 도리가 없다. 이발사와 나는 추워 벌벌 떨고 있었다. 겹으로 된 내 오버코트로도 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모양이다. 찬바람이 낭하를 통하여 쳐들어왔다. 몇 번이나 머리카락을 비틀고 쥐 뜯겼다. 그렇지만 어쨌든 이발을 하게된 것은 간수와 이발사의 큰 호의(好意)로 최선을 다해서 된 것이다.

내가 궤짝에 앉아 이발하는 동안 간수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우리 네 사람, 간수와, 나와, 이발사와, 그리고 김용섭은 다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간수는 내가 말하는 것을 제지(制止)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장소가 잠시동안 비공식 복음회(福音會)가 되었다. 죄수를 지키는 간수이기보다는 내 설교를 즐기는 청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내 설교는,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믿기 때문에 결코 주검이 그들을 괴롭힐 수 없다고 했다.

"당신들 저 기저 김용섭을 보십니까?", "지난번에 그가 출옥을 했을 때 그는 다 죽어있었지요", "그런데 이번이 꼭 열 번째로 감옥에 다시 수감된 것입니다."

간수는 김용섭을 마치 새로 만난 사람 같이 쳐다보았다. 김용섭은 눈을 돌리지도 않고 열심히 일을 계속했고, 그 안색(顔色)은 자기가 현재하고 있는 일에 감사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나는 계속하여 얘기를 꺼냈다. "김용섭은 아내와 두 아이들이 있습니다." "당신이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것 같이 그가 자기 목숨을 사랑하지만, 다시 이 감옥에 들어왔지요. 그가 그의 신앙을 부인(否認)하고 자유롭게 집에서 살 수 있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보다도 더 중요한 분 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하고 짚신을 삼고 있는 김용섭이 내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간수가 혹 김용섭을 제재(制裁)할 수 있었지만, 그는 김용섭이 하는 말에 크게 신경을 쓰고있는 것 같다.

"지난번 마지막으로 당신을 본 후 나는 다시 죽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장질부사를 앓고 한동안 정신까지 잃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을 때 주검이란 아주 값이 싸집니다"라고 말했다.

내 이발은 끝나고 감방으로 각기 돌아갔지만, 내 귀에는 "예수님을 믿을 때 주검이란 값이 아주 싸집니다"라는 말이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이대우 드림, 7/2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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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내가 여기에 있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요 19:11)

햇빛이 내 감방을 이미 떠났지만, 멀리 남녘 한국 땅 산 고개들은 아직 태양 빛으로 빛나고 있다. 햇빛이 내 방을 떠나가는 순간 나는 더 추워진다. 간수들이 말하기를 감방 벽에 장치된 난로에다 지난 사흘동안 짚을 태워서 방을 따습게 한다고 했다. 연기가 온통 감방과 낭하에 가득 찼다. 불을 피웠다는 첫날, 떠들썩하고 야단법석을 쳤지만 벽에 가설(加設)한 벽돌 난로의 온도가 올라간 흔적이 도무지 없었다. 둘째 날 나는 벽의 찬 기운이 좀 없어진 것을 느꼈다. 셋째 날 손을 그 벽돌 난로에 얹고 훈훈한 열(熱)기운을 얻고 나는 기분이 흐뭇해졌다.

느지막한 오후 내가 이 훈훈한 난로 벽에 기대어 앉아 있을 때, 간수 하나가 흥분한 듯이 말을 전했다. "당신을 출두하라고 합니다".

지난번 내가 법원에 출두한 후 거의 삼주(三週)가 되었다. 소문에 듣기는 그리스도인들의 심문이 이제 다 끝나고, 곧 재판이 시작될 것이라고 한다. 저녁 당번인 간수가 "당신 오늘 재판을 받으셨나요?" 라고 물어 댔다. 우리는 "아니요"라고만 대답했다.

이번 주도 이럭저럭 다 자나갔다. 나는 한국말로 엽서를 써서 아내 Kathy에게 보내는 것을 허락 받았다. 나는 감방 사정이나 내 입장을 엽서에 쓸 수 없었고, 내가 필요한 물건들, 옷, 수건, 화장지 등이 필요하다고 편지를 써 보냈다. 내가 처음 감방에 들어 왔을 때 감옥 생활에 익숙한 그 김용섭 씨가 간수를 통하여 내게 종이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지금 사정은 더 나빠진 것 같다. 이주 전에 키가 후리후리한 한국인 간수가, 내에게 아내로부터 회답이 왔다고 전해 주었다. 그 편지를 내에게 보여 주었지만, 내게 주지는 않았다. Kathy는 편지에 내가 요구한 물건들을 소포로 보냈다고 했다. 그 편지를 읽은 지가 이주(二週)가 되었는데 아직 나는 물건을 받은 적이 없다. 그렇지만 도대체 내가 요구한 것이 무엇이던가? 만일 재판이 시작된다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혹 전쟁이라도 터져버리면 어떻게될까? 내가 체포당하든 때 일본과 미국의 국교관계가 몹시 나빴던 것을 나는 안다. 언젠가 죄수 하나가 내게 물어 본 적이 있다. 만일 전쟁이 선포된다면, 우리는 자신을 억제(抑制)해야 하며, 마치 비밀이라도 탈로 한 것처럼 창피를 당할 것이 아닌가! 나는 엉뚱한 생각으로 온 동양천지가 미국을 대항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한 것 같지는 않다. 한국인들이나 중국인들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이 그들에게 자신을 줄만큼 해놓은 일도 없지 않은가? 가끔 비행기 나는 소리가 날 때 나는 혹 미국 비행기가 오지나 않았나 하고 살펴보았다.

머지 않아 내 궁금증은 풀렸다. 나를 감옥소 소장에게로 끌고 갔다. 소장이 있는 건물은 서양식으로 잘 건축된 건물이다. 한때 이 건물이 감옥소와 격리되어 산언덕에 있는 것을 최근에 담을 넓혀 건물이 감옥소 안에 들어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이 건물은 아직도 개축(改築) 공사를 하는 중이었다. 내가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얻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개축공사가 전쟁을 대비하여 죄수들의 수용 양을 증가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죄수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면 한국인과 일본인 죄수들을 목단에 있는 새로 지은 감옥소로 이전(移轉)했고 안동에는 전쟁 포로들을 수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내가 혼자만 있는 독방에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다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건물 외각(外閣)에 달린 층층대로 올라갔다. 이층 감옥소 소장실(所長室)밖에 있는 현관에 이상한 물건이 보였다. 이것은 감옥에 온 후 본 일이 없지만 이상하게도 낯익은 물건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약속한바 있는 부대 쪽을 이어 꾀어 매고 짚을 채워 만든 매트리스이다. 짚단을 가늘고 길게 엮어 만들어 채운 것이 라고 상상되며, 그 모양이 부대 구멍으로 보였다. 이것이 정말 나로 하여금 좀더 편하게 잘 수 있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러나 여하간 이것은 내가 주문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마침내 나는 그들이 나로 하여금 이 감옥에서 곧 떠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아마 재판의 결과를 이미 정한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내가 증인이 되리라는 나의 서약(誓約)이 있다. 그 일이 바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몸집이 큼직하고, 제법 교양이 있게 보이고, 콩코디아 정복차림을 한 (당시 만주지방에 흔하게 볼 수 있던 정복) 일본인이 비로드 상보를 씌운 원형 탁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의자는 통통하게 속을 채운 안락의자이다. 똑같은 콩코디아 정복차림을 한 한국인 통역관이 또 다른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로 하여금 셋째 안락의자에 앉도록 눈짓을 한 다음 간수는 방에서 나가버렸다.

첫 번째로 받은 일본인의 질문은 나로 하여금 뒤로 넘어질 번 하게 하였다.

"미국으로 돌아가시길 원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물론 그러시겠지만, 당신이 그렇게 될지는 우리가 장담을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꼭 가겠다고 원하시면 말입니다. 미국에 가시겠습니까?"

미국으로 가도록 권유를 받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우리가 살던 한국 마을에 선교사로 있던 Lowe박사와 Otto de Camp란 두 젊은이들은 지난 이월 달에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창피를 당한 일이 있다. 말하자면 법정에 갈 때 바구니를 머리에 씌운다던가, 맨발로 거리를 걸어가게 한다던가, 죄수의 복장을 억지로 입게 하는 일 등 이었다. 이 선교회는 마침내 일본 변호사를 채용하였지만 재판 결과 그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고, 한국을 떠나야 한다는 것으로 집행유예(執行猶豫)를 받았다. 그들은 조건을 받아드리고 드디어 한국을 떠나고 말았다. 사실상 그들에게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일이 유일한 결론이었다. 지금 나는 그들과 동일한 제안을 받은 것이다. 내 마음은 무엇인가를 서두르고 있었다. 문밖에 보이는 매트리스가 내 마음을 흔들고 있다. 미국으로 갈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저 매트리스를 안고 감방으로 돌아가 정함이 없는 나날을 기다리며 살아야 하겠는가. 이 순간 태양 빛이 별로 찬란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경사진 햇살이 아직도 방안을 비취고 있었다. 싸늘하고 불안한 생각이 내 위장을 점령(占領)했다. 그리고 나서 내가 말을 하고 있지만 내 목소리는 실상과는 거리가 먼 이상하게 들리는 소리가 되었다. 그렇지만 내 마음에 단단한 결심을 한 것이다.

"만일 내 자신의 평안을 생각한다면", 나는 말을 시작했다. 내 마음도 안정이 되고 쉽게 말문이 터졌다.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선교사로서 이 나라에 보내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기를 원합니다. 우선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통역관이 나를 짜려 본 다음 통역을 시작했다. 일본인은 좀 속이 상한 모양이며, 화가 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당신이 지금까지 설교했듯이 '이 세상에는 한 하나님밖에 없다'는 설교를 계속하면서 이 나라에 머물러 있을 수 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천황(天皇)이 신(神)이심을 믿으며, 이 나라도 아마대라스 오미까미가 세운 것을 믿습니다". 그는 빠른 어조로 강조하듯 말했다. 한국인 통역관은 눈치가 좀 불쾌한 듯 보였지만 내게 일본인의 말을 다 전해 주었다.

"당신의 생각과 다른 점을 용서하십시오" 나는 조용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내가 이 나라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시고, 또 전과 같이 선교하기를 원하신다면 당신이 나를 강제로 내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앞에 서서 하신 말씀을 말해 주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아니하셨다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라" 그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마치 그러한 얘기는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표정이며, 얼뜨기 같고 바보 같은 얘기를 하지 말라는 시늉을 하고있다. 그러나 그는 몹시 속이 상했고 무엇인가 참아 보려고 노력하는 표정을 하다가, 갑자기 딱 잘라 말대꾸를 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그런 식으로 여기서 설교를 못한단 말이요! 그것이 사실이니 미국에 가길 원하지요?"

나는 완강(頑剛)하게 고집을 부리면서 앞서 말한 것을 되풀이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을 전도(傳道)할 것이며, 만주에서 떠나지 않겠다는 표명(表明)을 했다. 나는 내가 만주에 와서 하는 선교사업이 선한 사업이며, 만주 주민들에게 상당한 이익을 끼치는 것임을 애써 보여 주려고 했다. "아닙니다". "나는 만주에서 떠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내가 이 나라에 체류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한 여기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는 몹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하며 조서 서류철을 턱 덮은 다음 가방 속에 던져 넣었다. "좋습니다". 그는 나와의 면접을 끝내는 것이다. 통역관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수를 부르고, 나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친절하고, 똑똑하게 생겼고, 눈언저리에는 무엇인가 생각에 잠긴 것 같은 인상의 감옥소 소장은 간수에게 손짓을 하며 무엇인가 나지막한 소리로 명령하는 듯 했다. 우리가 소장실을 나갔을 때 간수는 한 수행자에게 손짓하여 내 매트리스를 내 방으로 나르게 했다.

내가 감방에 들어오고 문이 닫히자 나는 매트리스 위에 넙적 누었다. 소장과의 면접으로 나는 상당한 신경을 쓴 모양이다. 이 수 십분(十分)동안에 평생을 살아온 것 같이 느껴진다. 나는 감방에 되돌아 왔고 아마도 여기가 상당히 오랫동안 내 집이 될 것이다! 최근에 나는 그들이 우리를 전혀 석방할 의도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최한지는 석방되었고, 우리의 성경을 돌려주었고, 내 아내와 편지를 주고받았고, 또 일본인 감옥소 관리들의 친절한 시늉을 보자하니, 이것들이 다 나에게 무엇인가 희망을 갖도록 노력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하지 못한 일, 그리고 불가능한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닌가?

나는 한국 추석날, 11월 첫 주에, 집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큰 잔치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추석날은 그냥 지나고 말았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아직 다가오고 있다. 우리가 집에서 그 추수감사절을 지킬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야 그야말로 감사절이 되겠지! 그러나 그 날이 왔지만 그 날도 아무런 소식이 없이 지나가고 말았다. 언젠가 낭하에서 벼이삭이 아직도 달려있는 지푸라기를 발견한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을 주워다 식탁(손수건을 깔고 만든)에 얹고 흡족한 추수 절을 장식했다. 나는 이 추수감사절의 식탁을 위하여 감옥소 매점에 사과 하나를 주문했지만 이주(二週)동안이나 그 매점에는 사과와 우유가 품절(品切)되어 있었다. 나는 내 예금장부에 돈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여분으로 몇 번 물건을 산 적이 있다. 추수감사절 식탁에 사과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실망이다, 그러나 나는 중국 국수를 한 사발 살수 있었고, 이것이야말로 옥수수떡만 차리는 감방 식탁에 큰 축전(祝典)이 될 것이다.

최근에 와서 나는 내 소망을 크리스마스날에 두고 꿈을 꾸고 있다. 그러나 내가 면접한 날짜가 1941년 12월 5일 이니, 이날도 가망이 없는 듯하다. 나는 성탄절을 이 감옥에서 지낼 모양이다. 그렇지만 감사할 일이 있지 않는가, 난방이 된 감방에서 성탄절을 맞이한다는 말이다. 나는 주문해서 만든 식탁보(손수건)를 꺼내어 깔고, 따듯하게 불로 데워진 벽에 기대어 앉았다.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간수는 내 공상(空想)의 시간을 방해했다.

"또 무슨 일인가?" 하고 생각했다.

"당신을 감찰실에 출두하라고 합니다"고 투덜거렸다.

감찰실에서 갈색 마분지로 싼 두 개의 커다란 소포를 내게 넘겨주었다. 이것들은 집에서 내게 보낸 소포이다. 내가 바닥에 깔고 잘 수 있는 두툼한 누빈 요와, 큼직한 양털 담요와, 몇 개의 비누 쪽과, 화장지 등이다. 사람을 아주 편안하게 해 줄 물건들이 아닌가! Kathy는 이것을 준비하느라 심려(心慮)가 많았고 또 고생도 많이 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애쓴 과정을 차례 차례로 상상해 보았다. 그녀는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 의논했을 것이며, 많은 한국 여인들이 와서 Kathy의 얘기를 듣고 또 의견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내가 이 물품을 받자 또 다른 생각이 지금 즐기고 있는 즐거운 마음을 앗아가 벼렸다. "아마도 나는 이러한 물품을 마지막으로 받는다"는 생각이다. 이 소포가 도착된 지 상당한 시일이 지났지만 지금에 와서 나에게 전해주지 않았던가! 매트리스의 경우도 그러하다. 훨씬 전에 그 매트리스를 내게 줄 수 있었던 것을 지금에 와서 주지 않았던가! 내가 이 감방에 오래 있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물품을 가장 유용하게 써 보잣구나!. 오랫동안 이러한 것을 다시 보기란 힘들 것이다. 아마도 미국 영사는 Kathy에게 미국으로 돌아 갈 것을 권유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여기에 장기간 구류(拘留)될 것을 알면 Kathy가 내게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가도록 결심할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아니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사실상 생활비가 전해올 근원이 끊어졌으니 그녀도 더 이상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무거운 가슴을 안고 감방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나는 풍성하다. 내 감방은 집에서 온 물건들로 가득 찼고 나는 그것을 보며, 마음에 만족을 느끼면서 내 영혼을 소생시켰다. 그 밝은 색깔의 누비 요는 찬란하게 빛나며, 이 밤에는 훈훈한 열이 내 몸을 둘러싸 아늑하다.

이대우 드림, 8월 30일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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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나는 부활(復活)에 대하여 심문을 받았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라 하니라"(행 26:29)

 

저녁 해가 지면 나는 매일 감방 창살에 기대어 저녁에 처음으로 번쩍이는 별을 쳐다보거나, 떠오르는 아름다운 달빛을 바라본다. 언제 보나 그들은 아름답고 내게 흐뭇한 생각을 주기는 하지만, 그 맑고 아름다움이 가끔 나로 하여금 "그리움 때문에 내 정신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잠기게 한다. 바로 이 청명한 별과 달빛이 할빈에 있는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비취는 것이 아닌가! 정신없이 쳐다보다 눈은 지치고 몸도 피곤해져서 나는 마침내 잠자리를 만든다.

집에서 소포를 받은 날 밤부터 나는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장기간(長期間)의 징역(懲役)을 생각하는 일은 나의 즐거운 생각을 아예 빼앗아 가고 말았지만, 모든 일을 하나님 손길에 맡기고 말았다. 나는 심문관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만주땅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시는 한 나는 여기에 있기를 원한다"고 일러주지 않았던가. 이 사건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인 것이다. 나는 잠자리에 들어가기 전에 감방에서 부르는 노래를 불렀다. "감사를 돌리세! 여호와께 감사를 돌리세. 그는 만 왕의 왕이시로다." 나는 경솔하게 사건을 처리했을 지도 모르는 처지임에도 불고하고 평안한 마음을 안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매트리스를 방구석에 제쳐놓았다. 별로 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딱딱한 마루바닥 보다는 낫지 않은가. 어떻든 간에 모처럼 처음으로 밤새도록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나는 매트리스를 좀 더 편편하게 만들 궁리를 했다. 그리고 또 나는 장기간의 징역을 생각하는 집념이 내 머리에서 떠나가도록 아침행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재판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정상적 일 수는 없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순서대로 건강체조를 하고 있을 때 간수가 방문을 열쇠로 열고 빨리 신을 신도록 재촉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Roy를 데리러 갔다. 이상하게도 Roy와 나를 같이 불러내는 일은 별로 없었든 탓으로 일이 퍽 궁금해졌다. Roy와 나에게 서로 수갑을 채운다음 감찰실로 끌고 갔다. Roy의 부인 Bertha도 끌려와 우리와 함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다 함께 법원으로 수송되었다. 이번에는 우리를 지하실로 데려가질 않고 본관 뒤에 최근에 새로 건축된 조그마한 건물로 끌고 갔다. 사실상 건물 안에는 페인트 냄새가 아직 풍기고 있고, 윤이 나는 새 마루바닥은 사람들이 밟고 간 흔적이 없다.

간수들과 죄수들은 다같이 막 싱싱하게 피워진 난로 주변에 둘러서서 불을 쬐기 시작했다. 우리의 수갑을 풀었다. Bertha는 양가죽으로 된 갈색 오버코트가 찢어진 것을 감방에서 지어 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Roy는 자기가 갈대로 만든 바늘을 자랑스럽게 보여 주었다. 깨어진 유리조각을 이용하여 귀까지 있는 바늘을 만든 것이다. Bertha의 스타킹은 구멍이 여러 곳에 나 있고 그녀의 머리는 평상시에 볼 수 있는 머리가 아니다. Roy와 나는 수염을 쳐다보며 이상한 모양을 서로가 흠잡기 지적했다.

갑자기 간수가 모두에게 차례 자세를 호령했다. 검정 정복 차림을 하고 이상하게 생긴 조그마한 건(巾)을 쓴 일곱 명의 법관들이 들어와 방 입구 상위에 놓인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은 얼마 전 오후에 나를 심문하던 사람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 법관은 Bertha를 처음부터 끝까지 심문한 사람 이였다고 한다. 나는 정말 다행한 사람이었든 것이 아닌가!

좀 나이가 들었고, 친절하고, 순하게 보이는 법관이 강단 중앙에 자리잡고 앉았다. 그 법관 왼쪽에 높이가 한자도 더 되는 서류 더미가 놓여졌다. 나는 그 서류들이 심문 결과를 기록한 공적인 문서임을 알아차렸다. 우리 모두가 열흘을 걸쳐 심문을 받은 기록이니 상당한 내용이 쌓인 것이다. 우리를 극히 놀라게 한 것은 그 높이 쌓인 서류 옆에 일본어 성경이 놓여진 것이다. 우리를 심문할 때마다 (감방에서 아직도 우리의 성경을 전해 주기 전 두 번의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 자신이 소유한 성경을 사용했던 것이다. 우리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할 때마다 개인의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성경말씀에 근본을 두고 말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기야 여러 번 성경을 제쳐두고 우리 자진의 말로 답변하도록 그들은 요구한 적이 있다.

우리가 아직도 체포당하기 전에 Bertha가 경찰서에 연행되고 이 점에 대하여 순경들과 신강이를 한 일이 있다. 그녀는 솔직하게 그녀의 생활 표준이 성경말씀이니 죄과가 있다면 성경말씀에 비취어 말하자는 것이었다. 경찰이 그녀의 말에 수긍치 않을 때 Bertha에게는 아주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응답을 거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경찰들은 이 일을 문젯거리로 삼지 않았다. 오늘도 평소와 같이 잘 익혀진 성경말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사실상 법관들은 수없이 많이 들어온 성경 얘기에 흔들리지 않기 위하여 준비하고 온 것이다.

나머지 법관들이 제자리를 찾고 서자 자리에 앉도록 눈짓을 했다. 각 법관들은 방을 가로 질은 넓은 책상 위에 그들에게 속한 서류를 내 놓고 손을 책상 위에 얹고 앉았다. 제법 법정 옷차림을 한 한국인 통역관이 그 중앙에 앉은 법관의 지시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의자는 우리와 같은 높이에 있고 우리를 직면하였고, 법관들의 오른편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는 다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가련하게 생긴 삼인조(三人組)인가 몸을 오버코트로 휘둘러 싸고, 머리는 온통 흩어지고, Roy와 나는 40일 동안 자라난 수염이 흘러내리고, 긴 양말을 신고 서있지 않은가! 키가 여섯 자 두 치가 되는 후리후리한 Roy는 오른쪽에 서고, 중간에는 키가 작고 뚱뚱하게 생긴 Bertha가 서고, 다섯 자 하고 열 치가 되는 나는 왼쪽에 자리잡고 섰다.

법관은 우리 이름을 다 불렀다.

로오이 에무 비라무(Roy M. Byram)

바사 스단누리 비라무(Bertha Stanley Byram)

부르스 에후 한도(Bruce F. Hunt)

법관은 이렇게 이름을 부르면서 이름의 주인공을 식별하고 눈이 맞을 때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댔다. 처음으로 그는 우리의 출생지와, 나이와, 주소와, 교회 관계와 그리고 우리 선교회 본부에 대한 질문을 했다. 이러한 일반적인 질문이 끝나고 난 다음 "진짜 심문관"이 일어서서 길고 긴 문장의 고소 내용을 낭독했고, 한국인 통역관은 그 내용을 한국어로 반복했다. 내가 40일 동안 수감되어 왔고, 그들에게 누차에 걸쳐 내 입장을 설득한바 있지만, 아직까지도 내가 피고인(被告人) 인지 증인(證人)으로 구속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우리가 아는 한, 우리를 위하여 변호사를 지정한 적도 없고, 우리가 미국인 변호인을 찾는 일을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를 고소한 이유들을 일일이 적어서 답변할 준비를 하기 위하여 연필과 종이를 준 적도 없다. 그들이 우리를 고발하는 내용이 숫하게 많기 때문에 내 머리 속에서 답변을 정리해 볼 여유가 없다. 몇몇 고발에 대해서는 답변의 가치도 없고, 몇몇 중요한 일에 대하여만 답변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내가 어떤 고발에 대하여 답변할 말을 생각하고 있을 때 또 엉뚱한 다른 내용의 고발의 말을 퍼붓고는 하였다. 그런 결과로 나는 몹시 혼란에 빠지고 아무런 고발의 내용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그들이 하나씩 차례로 질문을 해 주기를 바랐고, 그렇게 되면 나는 모든 대답을 분명히 했을 것이나, 그렇게 되지를 못했다.

판사는 나에게 대변인이 되기를 요구했다. 나는 우리 서로가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차이가 있을 태니 상대방의 승낙이 없이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Roy와 Bertha는 내가 모든 죄수들의 대변인이 되는 일에 반대하지 않았다. 한가지 일에 대하여는 각자의 의견이 있을 것을 나는 생각했고, 그 일에 대하여서만 각자의 의견을 묻기로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 "진짜 심문관"이 자리에 앉자 판사는 옆에 높이 쌓인 서류를 조심성 있게 지적하면서 조용히 나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그의 질문은 본래에 우리를 고발한 내용과는 엉뚱한 내용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하여 능력 것 답변을 하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올무를 씌우기 위하여 내가 모든 답변을 충분하고 분명하게 못하도록 계략(計略)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증인이 되는 기회가 온 것이다.

제일 처음의 질문이야말로 우리가 고발된 내용과는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은 에덴 동산에서 하와가 뱀에게 유혹을 받았다고 믿습니까?" "예,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리고 나는 인간이 책임을 져야할 무거운 죄과에 대한 것이 그 얘기 속에 설명되고 있음을 말했다. 하지만 도대체 왜 이러한 질문을 한다는 말인가,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는 대학에서 교육을 받을 때, 소위 기독교인이라는 교수로부터 "기독교 신앙이 초자연(超自然)을 믿는 것은 지당한 일이 못된다"는 가르침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가 배운 내용을 생각하면서 그는 아주 이상한 경우에 직면한 것이다. 자기가 재판을 할 무리들은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이며, 대학출신과 무식한 사람들이며, 젊은 사람과 나이 많은 사람들로 가지각색의 무리가 모였는데, 모두 거리낌없이, 한결같이 성경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나 그들의 증언을 본다면 모두가 동일하고, 시종일관(始終一貫)한 점이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의 질문은 예비 질문의 내용과 비슷했고, 순서 없이 닥치는 대로 내 답변을 받아서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냈다.

오전에 판사는 두 개의 주제(主題)를 다루었다. 천황숭배를 거절함으로서 "종교를 단속하는 법"을 위법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말씀이 어떤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금지할 뿐 아니라, 사람이나, 장식품이나, 우상이나, 사람을 위하여 짓고 사람이 사는 신사 건물에 절 할 수 없으므로 천황 숭배는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많은 기독교인이 신사 참배를 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우리가 그 슬픈 일을 알고 있습니다마는, 그들이 한다고 해서 신사참배가 바른 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답변했다. "그리스도인들의 표준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성경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들과 우리가 어느 편이 성경에 기준을 두고 진실한 가를 판단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나는 이에 관련된 수 없는 성경구절들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청했다. Roy와 Bertha는 자세히 내 말을 들으면서 내가 인용한 성경구절들은 성경에서 집적 가리키며, 그 외에도 이 사실을 가르치는 성경구절들을 판사 앞에 제시하기를 권했다.

"그렇지만 우리 일본사람은 천황이 신(神) 인 것을 믿습니다. 왜 우리까지도 당신이 섬기는 서양의 신을 믿겠습니까?" 라고 답변했다.

"그는 서양의 하나님뿐 아니라 그분은 온 세상의 하나님입니다" 라고 답변했다. 나는 일반적으로 많은 종교인들이 우주의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 사실을 나는 성경말씀 뿐 아니라, 미국과, 한국, 중국 그리고 일본에서 얻은 경험을 들어 설명했다.

그는 빈정거리는 말로 "당신은 일본의 천황도 예수를 믿어야 된다고 하는 말이요?"라고 하는 그 태도가 평소의 거동과는 조화가 되지를 않았다.

그가 내게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가 법정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주기 위해서 이거나, 혹 그가 큰 호기심을 가졌거나, 그렇지 않으면 나를 철저하게 심문하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의 동기가 어떻든 간에 나 만은 진실을 말해야 되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내가 굳게 믿고 있는 사실을 대답할 뿐이다.

"예, 사실 그렇습니다. 일본 천황도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예수를 믿어야만 합니다. 성경을 보면 천황도 단순히 사람이며, 그가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판사는 아주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짜려보며 마치 "네가 정말 정신이 있어 말하는 거냐!"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좌우에 자리잡은 다른 법관들도 적의에 가득 찬 눈초리로 나를 짜려보았다. 그 "진짜 심문관"은 제 콧등을 내려다보며 마치 "이 재판의 판결이 벌써 다 끝난 거야! 왜 이런 바보 같은 인간의 말을 듣고 있어"라고 나 하는 듯한 시늉을 했다. 여하간에 판사는 흥미 진지하게, "그렇다면 당신은 일본 천황을 대적(對敵)하는 것이 아니요!"라고 추궁했다.

"아닙니다.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라고 빨리 답변했다. "우리가 이 나라에 와서 전도하는 이유는 이 나라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천황과 그 국민들에게 예수를 믿음으로서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나는 내 조상들이 왕들에게 "하나님이여 왕을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외치면서 단두대(斷頭臺)에서 처형당한 얘기를 했다. 이런 얘기는 그 왕이 악한 사람이었으며 그는 다른 사람 보다 더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 왕의 구원을 비는 것은 한가지 말버릇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법관은 끈덕지게 "그렇지만 당신이 한말은 우리 나라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 기독교가 당신의 나라를 반대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단순히 그 성경의 기독교를 전할뿐입니다. 지금껏 당신에게 거듭 이것을 성경 말씀에서 보여준 것이 아닙니까?" 나는 이렇게 반문하였다.

"만일 이러한 가르침이 일본을 반대하는 것이라면 왜 일본 정부는 성경을 출판하고 배부하는 일을 허락 하였겠습니까? 사실상 일본정부는 기독교를 불교와 신도(神道)와 같이 하나의 공인된 종교라고 발표했습니다. 결코 우리는 천황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신도교(神道敎)의 천황 숭배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라고 답변을 계속했다.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당신들은 '종교 단속법' 지키기를 거절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예. 판사님, 그것은 사실입니다."라고 답변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당신은 외국인으로 이 나라에 살면서 이 나라의 법을 억일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는 마치 말썽꾸러기 아이를 나무라는 학교 선생님처럼 나에게 질문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이 나라의 법을 지키기를 원하며, 그것은 또한 우리의 의무인 것을 믿습니다."라고 또 대답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법을 위반하고, 법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성경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음이 없나니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럼으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는 일본어 성경을 열고 이렇게 읽으면서 자기의 입장을 성경 말씀으로 방어하려고 시도했다.

이 성경구절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경찰들이 이 구절을 한국인 우리 친구 그리스도인들에게 여러 번 말했고, 우리에게도 여러 번 지적한 적이 있다. 그가 성경 구절을 다 읽기 전에 나는 답변을 이미 준비했다. 우리의 성경을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하였기 때문에, 나는 성경을 펴고 또 그에게 성경을 펴 로마서 13장 3절, 즉 그가 이미 읽은 두 구절 다음절을 읽어 달라고 요청했다.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라고 그는 읽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판사님, 이 구절은 만일 우리가 선을 행한다면 우리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결국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무엇이 선행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사람의 양심을 항상 우리의 인도자(引導者)로 삼을 수 있습니까? 사람의 나이가 많아지면 다 죽여 버려야 된다고 생각한 그 섬사람들의 양심이 어떻게 선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는 내 말에 답변 없이 곰곰이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 나라의 법을 다 믿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당신들 일본은 공산주의의 법이 잘못 된 것을 믿고, 독일과 이탈리아 국은 반(反)공산주의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라고 계속했다.

"우리가 세계 법정의 한 판결을 믿을 수 있습니까? 당신들 일본은 국제연맹(國際聯盟)이 불공평하다고 믿고 거기에서 탈퇴(脫退)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조화로 된 성경 말씀만이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나는 그에게 증명해 보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고, 다만 내 신앙을 간증한 것 뿐이었다.

나는 계속하여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인간에게 전도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모이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성경은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 단속법"은 "누구든지 전도할 때는 우선 허가를 받아야하고, 집회를 할 때도 허가를 받아야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법은 하나님의 명령을 금지하는 잘못된 법인 것을 나는 믿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이 나라의 법을 경멸(輕蔑)한 것이 아닙니까! 당신은 계속하여 이 법을 무시하고 지키기를 거절하지 않았습니까!"라고 열을 올렸다.

"그 차이점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받아 넘겼다. "우리가 이 나라의 법을 얼마나 존중하는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처음 이 법이 제안(提案)되었을 때 우리 열두 명의 선교사들이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 중의 소수에 지나지 않음이 사실입니다 마는) 일본 정부에게 반대의사를 전했고 그 진정서에는 반대하는 이유를 아주 상세히 적어 보냈습니다. 우리는 일본 정부에게 그 법령을 통과하지 말기를 탄원했고, 그 법이 통과되는 경우 우리가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설명을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아무런 탄원서도 없이 법령에 무관심했었고, 또 그 법을 지키지 않았다면 우리가 법을 불경(不敬)한 이유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마는, 우리는 그러한 경우가 아닙니다. 일본 정부에게 사전에 이와 같이 통보한 것은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도 받을 것이라는 각오를 표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법에 불경한대 대한 형벌을 필요하다면 받을 것이지만, 원하는 바는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법을 일본 정부는 통과시켜달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질문을 하였고, 마침내 점심시간이 되어 법정은 휴정을 선언하였다. 우리를 그 전에 여러 번 출입한 적이 있는 법정 건물 지하실에 끌고 갔고, 거기서 싸늘한 옥수수떡과 따뜻한 물 한잔을 받았다. 간수들은 난로 주변에 둘러앉아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열고 젓가락으로 밥을 입에다 퍼 넣었다. 물을 훌쩍훌쩍 마시는 소리와 짭짭거리며 밥 먹는 소리를 들었다.

한시간 후에 우리는 법정에 돌아왔다. 법정에서는 피고인들이 서서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판사는 우리를 의자에 앉도록 명령한 것은 재판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 없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판사는 나에게 호된 징계를 내렸다. "판사들 앞에서 책상다리를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라고 호령했다. 그 후로는 항상 두 발을 마루바닥에 대고 의자에 앉았다. 그 판사가 내게 화를 낸 것은 처음이며, 내가 생각 없이 정중하지 못했던 일을 후회했다. 사실상 나는 나 자신의 변호인이 되었고, 내가 죄수라는 생각을 전혀 잊어버리고 있었다.

오후에 질문들은 이상한 것들이었다. 판사는 세상의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왕국과, 유대인들이 불레셋 땅에 귀환하는 일등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그 판사의 동기를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 것인가? 나는 생각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본인의 박해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의 징조임을 믿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신앙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운 박해를 견디어 나가는데 도움을 준다.

동양인들의 야릇한 생각에서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것이 서양의 어떤 세력이 세상을 점령한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지?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일본에서 구세군의 선교 활동이 금지된 것은 바로 그 사용되는 언어들이 군대 조직을 말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치의 독일인들이 유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