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獄中) 수기(手記), 나의 간증(干證)

For A Testimony

저자: Bruce Hunt, Missionary in Korea

옮긴이: 이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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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군소리

머리말

제 1장 체포되었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제 2장 한 죄수만 들어가게 만든 감방

제 3장 벽에 쓴 글

제 4장 숫자 "22"

제 5장 새 노래

제 6장 기도와 금식

제 7장 목욕과 이발

제 8장 내가 여기에 있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한

제 9장 나는 부활에 대하여 심문을 받았다

제 10장 석방은 되었으나 자유는 없다

제 11장 늦었다, 전쟁이 선포되었다

제 12장 음침한 골짜기에 다시 들어가다

제 13장 약할 때 생기는 큰 힘

제 14장 강제수용소와 인물 교환

 

옮긴이의 군소리

오늘은 우연한 기회로 친구가 보내준 소책자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소책자의 얘기는 이차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미국 선교사 부루스 헌트 (Bruce Hunt) 목사가 만주 할빈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 격은 옥중 수기입니다. 이 목사님의 신앙이 너무도 확실하고, 목숨을 내 걸고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간증을 혼자만 읽을 수 없어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합니다. 이 목사님의 수기는 그 내용이 아주 실감이 있을 뿐 아니라, 그 분의 평생을 두고 한 선교 활동이 한국과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것을 알게될 때, 이 책은 외국인의 얘기가 아니고, 내가 당한 일을 회상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국인을 사랑한 헌트 목사에게 친근감을 느낍니다. 또한 이 헌트 목사님이 저희들이 속해있는 Orthodox 장로교회의 선교사라는 일로 더욱 더 친근감을 느낍니다.

감리교회의 교리와 Arminianism에 대하여 편지를 쓰기로 한 계획을 다음으로 미루고 앞으로 얼마동안을 이 책을 번역하는데 노력하겠습니다,

이대우 드림, 3/30/97

소책자를 소개하는 표지의 글

이 책은 한국사람들과 같이 살면서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 장로교의 선교사 부루스 헌트(Bruce Hunt)가 이차대전 당시 만주를 침입하고 점령한 일본인들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에 당한 일을 쓴 옥중 수기이다.

학대를 받고, 굶주리고, 고문을 당하고, 석방을 받은 후 며칠이 못되어 다시 체포당했지만,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므로 살아났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게 된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존경을 품게 하는 것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아끼지 않고 고난을 받을 때 저자는 그 무거운 짐을 같이 지고 나갔다는 사실이다. 학대(虐待)를 받으면서도 꾸준하게 신앙을 지켜나가는 그의 수기는 선교 사업에 몸을 바친 사람들에게 크나 큰 용기를 준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Edward J. Young교수의 말: 헌트 목사는 Orthodox장로 교단이 크게 존경하는 선교사이다. 그는 한국에서 출생했고, 우리가 다 찾아낼 수 없이 풍성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그는 일생을 한국에서 헌신했다. 그가 걸어온 헌신적인 선교사업은 하나님의 큰 축복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이 소책자를 구성한 페이지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빛을 내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기대하는 보통의 책이 아니다. 어려운 시험 중에서도 주님께 충성을 다한 놀라운 기록이다. 이 책은 모든 그리스도인 들이 읽어야 하며, 만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그리스도인 생활의 오묘한 비밀을 알게될 것이다.

책 첫 페이지에 아래와 같이 썼습니다.

"내 아내 캐씨(Kathy)의 부모님과 내 부모님에게 이 책자를 바칩니다. 그들은 40년이 넘도록 일생동안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복음의 씨를 한국에 뿌렸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여러 교회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옥중(獄中) 수기(手記), 나의 간증(干證)

머리말

감옥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이십 년이 넘은 내 편지에는 나(I)라는 대명사를 수 없이 쓰고 있다. 이 편지를 지금에 와서 보내고자 한다. 내가 어떤 특이한 일을 했었다는 것은 아니며,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입장에 있었든 것을 나는 안다. 또한 나는 내가 특별히 용감했거나 대담했었다는 것도 아니고, 보통 이상의 고난을 당했다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몹시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했고, 수년 동안을 감옥에서 살았다. 내가 지금에 와서 편지를 보내는 이유 중의 하나는 옥중에서 기도 중에 하나님께 맹서(盟誓)한 것을 시행하는 것이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시142:7)

한국이 해방된 후 1946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알게 된 것은, 내가 속해 있던 70명의 죄수 중 3명이 목숨을 바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간증을 인봉(印封) 하였다. 그 세 사람은 안용애와 김윤섭과 김신복이다. 김신복은 아주 젊은 여인으로서 심한 고문을 견디고도 살아 남아 해방을 마지 했지만 결국 후유증(後遺症)으로 곧 죽고 말았다고 한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모두가 석방 되였고, 그후 꽤 많은 형제들이 북한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북한에 남아 있어야할 이유는 그들이 거느리는 양떼를 뒤에 두고 자신들만이 남한으로 도망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 여러 사람들은 UN이 북한을 공산 국가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말하기는 시간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믿었으며, 하나님께서 천황(天皇)을 신으로 섬기게 하는 일본 독재로부터 한국을 해방하셨으니, 무신론자인 공산당의 손에서도 해방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지금까지 공산당의 손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졌다. 남한에 있는 우리는 북한에서 사는 우리 형제들로부터 소식을 들을 길이 없다. 축의 장막이며 철의 장막이라고도 할 수 있는 38선을 빠져 넘어 온 형제는 최한지 전도사의 소식을 전했다. 최 전도사는 옥에서 석방된 후 마을과 마을을 전전(轉轉)하면서 복음 전도 집회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도 지금은 공산당 손에 죽었으리라고 생각된다.

70명중에 한 사람이던 천봉선 전도사를 나는 가끔 만난다. 그는 그때 12년의 징역 언도를 받았고, 같은 때 15년 징역 언도를 받은 김윤섭 전도사에 대한 얘기를 나에게 전해 주었다. 김전도사는 감옥에서 15개월 동안 심한 고초를 받은 나머지 마침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보내면서 책이 출판되도록 만든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우선적으로 그 어렵던 나날을 나와 같이 함께 지낸 내 아내 캐씨와 아이들에게 이며, 그 다음으로 Van Gundy부부에게 이다. Van Gundy부부는 National City, California에서 우리가 Paradise Hill Orthodox 장로교회에 다닐 때 원고를 쓰도록 권유해 주었고, 원고를 타자 치고, 교정하고, 또 여러 가지 일을 맡아 준 분들이다. 또한 나는 일리노이주에 있는 Weaton대학의 동창이었든 Miss O. Muriel Fuller에게 감사하는 것은 그가 많은 출판 경험을 가진 분으로 책을 출판하도록 격려하고 도와준 일이다. 그 후 원고를 거의 망각하고 있을 때, 젊은 학생 Danny Foster가 그의 관심을 전해 준 것이다. 우리가 원고를 New Jersey에 있는 갈보리 Orthodox 장로 교회 다락에다 임시로 보관했던 것을 그가 발견했고, 그 원고를 친구들과 돌려 읽어본 다음에, 원고를 다시 편집하여 출판하도록 나에게 권유해온 것이다.

나는 또 특별히 우리 사위인 John J. Mitchell목사에게 감사하는 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교정을 보고 출판할 수 있도록 정리해 준 것이다. 출판을 주선해 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인 Edward J. Young박사에게 또한 감사한다.

나는 기도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소책자를 보내며, 그들이 어려움에 처할지라도 크신 능력의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게되는 큰 용기를 주시기를 바란다.

1966년 3월 29일, 부루스 F.헌트, 한국 부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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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체포되었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1941년 10월 22일이었다. 하와이 진주만 폭격이 있던 한달 반 전이다. 만주 할빈에는 벌써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우리 집 다이닝룸(dining room)은 아늑했다. 우리 딸들 셋은 늘 얘기듣기를 좋아했으며, 내가 막 방문하고 돌아온 개척교회의 얘기를 해 달라고 졸라댄다. 식탁 건너편에 자리잡은 내 아내, 캐씨는 어린 아들 David에게 아침을 먹이려고 애를 쓰고있었고, 나는 David의 쌍둥이 누이 Mary 에게 아침을 먹도록 타이르고 있었다.

갑자기 초인종이 울리자 러시아 시녀가 문간으로 나갔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던 것은 경찰들이 우리 집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약 6-7명으로 보였으며, 3명의 일본인과 중국인과 한국인들이며, 일본인이 지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그들을 현관 안으로 들어오도록 권했다. 한국인 박 순경이 소환장을 낭독하였다. 그와는 그전에도 앞면이 있는 사이였다. 나는 소환장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소환장은 나에 대한 체포령(逮捕令)이며, 나는 평화롭게 응할 것이며, 그렇지 않을 때에는 강제로 체포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영장이야말로 나를 놀라게 하였으며,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나는 1936년 후 한국사람들을 상대로 미국 Orthodox 장로교단이 파송(派送)한 선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 후 특히 1938년부터 나는 일본 정부가 교회를 통치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일본 천황을 숭배하도록 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반대해 온 것이다. 나는 이전에 두 번 경찰서에 소환되어 오랜 시간의 심문을 당한 적이 있으며, 그 처음 소환은 약 1년 전이었으며, 둘째 번은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그 때 경관이 나를 체포할 것이라고 협박한 것을 기억한다. 그들은 비밀리에, 혹은 경우에 따라 공개적으로 나를 뒤 좇아 다녔든 것이다. 정부의 통제하에 있는 신문은 내가 하고 있는 사역(使役)에 대하여 반대하는 기사를 게재(揭載)한 적이 있다. 지난 일년동안 나의 한국인 동역자들이 투옥되었다. 최근에 전 북녘(北域) 만주에 있는 상당한 수의 교회에서 70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투옥된 것이다. 꼭 십일 전에 아주 젊은 학생 이준호가 바로 우리 집 현관에서 이 박 순경의 손으로 체포된 것이다. 사실상 너무도 많은 한국 친구들이 체포되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된 것이 아버지는 감옥에 가지 않나요?"라고 묻기까지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차례가 온 것이다. 경찰대를 지휘하는 우두머리 경찰관이 "감옥에 갈 준비를 하시오"라고 내게 명령하였다. 내가 침실에서 짐을 꾸리기 시작할 때 순경 한 명이 내 뒤를 따라와 나를 감시하였다. 같은 때에 다른 경찰들은 건너편 집에 살고 있는 장로교 외국선교회 독립협회(Independent Board for Presbyterians Foreign Missions)의 Roy Byran의사 내외에게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Byran의사 내외는 우리와 같이 한국인 선교의 동역자들이며, 우리가 천황 숭배를 반대하는데 같은 신앙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내 캐씨((Kathy)는 자동적으로 나를 따라 침실로 온 후 기계적으로 내가 필요한 옷들을 챙겨주었다. 그에게는 이러한 경험이 처음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번 내가 경찰에서 심문을 받았을 때 캐씨는 만일을 알 수 없어 옷을 챙겨둔 적이 있다. 캐씨는 아주 두터운 두벌의 내의와, 털 양말과, 털장갑과, 오버코트와, 모자와, 신을 꺼내어 주었다. 나는 캐씨의 빈틈없는 깊은 사려(思慮)에 대하여 여러 번 감사한다.

아이들은 너무 어려서 영문을 모르고 흥분만 하고 있다. 우리 큰 아이와 시간을 맞춰 같이 공부를 하는 유대인 아이 Ida Rappaport가 막 들어왔다. 그 아이와 같이 공부하는 여덟살 짜리 우리 맏딸 Lois는 그에게 아주 소중한 초콜렛 두 개를 종이에 싸서 내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사실은 밤이 되어 내가 감방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 초콜렛이 유일한 저녁 식사였다. 짐을 다 꾸리고 난 다음에 현관으로 갔다. 현관에는 두 경찰이 무뚝뚝하게 앉아 있었다. Byran 내외를 체포하러 간 경찰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아내 캐시는 내 곁에 바짝 앉아 있고, 큰딸들 셋은 나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우리 쌍둥이들은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그들의 작은 푸른색 의자를 끌고 다니면서 순경들의 무뚝뚝한 모습을 못 마땅히 여기는 듯하였다.

나는 우리의 서재(書齋)이며 사무실인 현관방을 둘러보았다. 양쪽 벽으로 책들을 진열해 둔 이 방은 아늑하고 아담하다. 놋쇠로 만든 한국산 촛대가 윤을 내면서 책장 위에 장식된 나비 공작품을 멋있게 반사한다. 맞은 편에는 골동품인 고려자기 화병이 장식되어 있고, 또 다른 쪽에 눈을 돌리면 동양 미술품과 서양 미술품이 섞여 진열되어있다. 이러한 미술품은 대개가 우리의 결혼 선물이며, 상당한 감상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방을 늘 즐겨왔는데, 이방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찹찹하다. 우리는 아직도 아침 기도회를 가지기 전이였기 때문에 나는 순경들의 승낙을 얻어 아이들이 성경과 시편을 가져오게 하였다. 우리는 시편 46편을 공부해 왔으며, 모두 목소리를 같이하여 이 시편의 찬송을 불렀다. 아내 캐씨는 나와 마찬가지로 얽혀 솟아 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곡조를 잘 맞춰 노래를 시작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찬송이 끝나고 내가 성경 한 구절을 읽은 다음 식구가 차례대로 기도를 하였다. 순경들에게는 아주 흥미 있는 구경거리였음이 분명했지만 그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Byran 내외는 기다리고 있는 차로 갔다. 내가 식구들을 막 떠나면서 그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우리를 실은 차가 집 앞을 떠날 때 아내 캐씨와 세 딸아이들이 현관에 서서 손을 흔들며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고, 어린 쌍둥이는 러시아 시녀와 같이 창문에 서서 코를 유리창에 눌러대며 내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유난히 빛났고, 가끔 손을 흔드는 것은 아빠가 타고 가는 차가 신기하고, 시야(視野)에서 없어지는 것에 실망한 탓인 듯 하다.

경관들은 우리를 시내에 있는 검찰관 사무소로 데려갔다. 경찰들의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우리 한국 교인 둘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그 중 한 명은 Byran의사 진료소의 간호원이며, 그를 대려온 경찰이 그를 우리와 나란히 서게 하였다. 또 다른 교인은 다섯 명의 아이들을 가진 부지런한 어머니며, 그의 얼굴은 아주 평범하게 생겼다. 그는 혼자서 검찰관 실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며칠 전에 다른 교인들과 같은 때에 체포되었으며, 막내 아이를 감옥에 대려 올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고, 또 다른 아이를 해산할 날이 곧 임박한 것으로 알고 있다. 며칠 전에 그녀는 우리에게 사정을 실토한 바가 있다. 경찰의 심한 협박을 받은 불신자인 남편이 그에게 아주 심한 꾸중을 했고, 아이들이 울어대는 바람에 진술서에다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그 진술서는 "신사(神社) 참배(參拜)를 할 수 있다"라는 고백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왜 그녀가 여기에 다시 왔는지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진술서에 다시 도장을 찍으라고 호출을 받았어요" 언제나 신실하게만 보이는 장신애 여인의 얼굴상은 아주 화가 나서 흥분한 것처럼 보였고, "나는 사는(*죽는) 것만도 못해요"라고 하소연하듯 진정서에 도장 찍은 것을 후회하는 눈치다. *원문에 저자는 "Sa nun gut man do mot hay yo"라고 했으나 "죽는 것만도 못해요"라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경찰은 그녀에게 무엇인가 중얼댔지만 그녀를 때리지는 않았다. 대개 내가 본 경험으로는 일본순경들은 사소한 일에 성을 잘 낸다. 경찰은 그녀에게 "집에 가시요. 아이를 놓은 다음에 우리가 가서 다시 당신을 만나 보겠소"라고 소리질렀다. 우리는 신애 여인이 건물에서 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신앙과 앞으로 낳게될 아이가 건강하기를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를 바랐다. 이렇게 신도들의 경험을 듣고, 보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인가! 지금은 우리 차례가 돌아왔고 시험을 받을 때가 된 것이다. 얼마쯤 있다 순경들이 우리를 유치장으로 대리고 갔다. 그들은 우리를 벽 아래 놓인 긴 나무 걸상에 나란히 같은 간격을 두고 앉도록 명령하였다. 우리는 서로 얘기를 못하도록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남은 여가는 성경을 읽으면서, 심문을 받을 때 인용할 성경 구절들을 찾아 두었다. 유치장 감방(監房) 중앙에 놓인 간수 책상 너머로 창살을 박은 큰 감방이 보인다. 그 감방은 일반 죄수들을 수용하며, 순경들이 몇 명의 죄수들을 대리고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며칠 동안 내가 심문을 받는 동안에 나는 그 감방에서 기다렸다. 그 감방에 있는 동안 좌수들이 순경과 숙은 거리는 것을 들었고, 그들은 석방되기 위하여 흥정을 하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죄수의 친척이 감방밖에 와서 머리로 창살을 치며, 울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잡아넣게 한 법을 원망하기도 했다. 우리는 석방을 위하여 흥정을 하지 않았으며, 우리를 유치한 정당한 법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여하간 감옥 안의 관경(觀境)들이 모두 슬픈 일들이다.

마침내 약 열 한시 경에 우리를 이층으로 데려가서, 검찰관이 개개인을 상대로 심문을 시작했다. 열두시 경에 우리는 경찰실로 내려와 중국 국수와 사과를 사 먹도록 허락을 받았다. 오후에는 심문이 또 계속되었다.

날이 어둡게 되자 우리를 차에 집어 싣고 시내에 있는 붉은 벽돌 감옥으로 이전하였다. 그 감옥은 우리 수많은 한국 형제 교인들이 고난을 당한 곳이다. 이 감옥은 우리 집에서 겨우 세 부락쯤 떨어져 있지만 우리 세계와는 상거(相距)가 있는 곳이다. 감옥에 들어가는 문간에서 우리는 조사를 받았다. 허리띠, 넥타이, 시계, 만년필, 보석 같은 것을 빼앗은 다음 빼앗긴 소지품의 목록 표를 만들었다. 그리고 난 다음 우리를 감옥 속으로 대려 들어갔다.

감옥은 여러 개의 감방들이 나란히 된 두 개의 긴 건물을 서로 등을 데고 붙여서 만든 것이다. 두 건물을 연결한 뒤의 높은 벽은 시멘트 콘크리트로 되어 있고, 건물 앞에는 시멘트 바닥의 통로를 두고 있다. 감방 사이의 칸막이는 시멘트로 되어 있고 각 감방 전면은 나무 창살이 천장까지 닫게 박혀 있었다. 나는 많은 죄수들이 들어있는 몇 감방을 지나가 간수가 기다리고 있는 감방에 이르렀다. 그는 신을 벗으라고 명하였고, 석자밖에 안되는 감방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라고 눈짓을 했다. 나는 작은 감방 문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허리를 굽혀야 했다. 이 방은 네모난 길쭉한 방으로 깊이가 20자 쯤 넓이 10자 쯤이며, 3면이 콘크리트 벽이며, 앞면은 나무 창살로 되어있다. 나는 들어가자 감방 바닥에 수 없이 많은 사람들로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 24명의 죄수들이 한쪽에 12명씩 머리를 벽 쪽에 두고 두 줄로 나란히 누어 있었고, 그들의 다리는 방 중앙에서 서로 맞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서서 있을 곳도 찾기가 어려웠고 앉아보거나 누워볼 생각은 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 자리를 얻기를 바라면서, 감방 중앙을 향해 발을 디뎌볼 양으로 좌우를 번갈아 살펴보았다. 그러나 빈자리가 없었다. 마침내 나는 감방 뒷벽에 겨우 기대어 서 있게 되었다. 밤새도록 내가 이렇게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가 찰 일이었다. 나는 더 이상 자유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 아님을 알았고, 이러한 사정을 얘기할 만 한 상대가 없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어쨌든 최선의 결과를 찾기 위하여 감방 마지막 자리에 누어있는 사람의 두 다리를 번쩍 들어 내 다리 위에 얹고 등을 시멘트 콘크리트 벽에 대고 앉아 밤을 새웠다.

감방 마루는 나무로 되어있었고, 24명의 죄수들이 앉고, 눕고 하며 비비적거리니 마루바닥은 윤이 나게 반짝였다. 내가 앉아 있는 곳에서 뒷간에 손이 닿고 또 만져 볼 수 있었다. 통풍이 전혀 없는 감방은 이 뒷간 뚜껑을 닫아두어도 냄새가 흉악하다. 그러나 그 뚜껑을 밤낮 없이 열고 닫을 때는 그 냄새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래도 뒷간에서 좀 떨어진 자리는 공기가 맑은 샘인데, 내 자리는 바로 그 뒷간 옆이란 말이다. 내가 자리에 앉자 간수는 가버리고, 내 새로운 감방 동반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질문을 시작했다. 단순한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이러한 곳에 들어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을 그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일본 천황(天皇) 숭배(崇拜)와 일본 정부가 교회를 통치하는 일에 반대했다는 얘기를 했을 때, 어떤 죄수들의 얼굴에는 존경한다는 표시를 보여주었다. 어떤 죄수는 다음 감방에 젊은 한국 교인을 알고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해 주기도 했다. 바로 그 젊은 교인이 17세가 된 이준호 이며, 그는 10일 전에 우리 집에서 체포되었다. 그들은 이준호 청년을 볼 수는 없지만, 감옥소 안에 있는 비밀 정보망을 통하여 알고 있다. 이준호 청년이야말로 자신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참 즐거움을 죄를 짓고 감옥사리를 하는 죄수들에게 전해 준 것이다.

나는 내가 온갖 잡종의 죄수들과 같은 방에 감금된 것을 알았다. 감방에는 세 사람의 러시아인들과, 일본인 한 사람과, 그리고 20명의 중국인 죄수들이 있었다. 일본인은 전직 순경이며 정부의 돈을 횡령한 죄로 감금되었고, 한 러시아인은 돈이 많은 부자이며 외환을 교환하는데 투기한 죄로 잡혀왔다. 그는 거의 일년을 이 감옥에서 살고 있다. 어떤 죄수는 감옥 안에 발진티푸스 전염병이 나돌 때 들어와 죽을 번 했고, 그 탓으로 아직도 재판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미국에 가 본적이 있어 제법 영어를 하며, 그는 우리의 감방을 국제 호텔이라고 불렀고, 현대식 문명의 이기로 장식된 곳이라고 익살을 떨었다. 내가 바로 그 문명의 이기(뒷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잡은 것을 다 알고있지 않은가!

또 한 젊은 사람의 자초지정을 들으면 자기는 무죄하며, 그는 단순히 자기부모가 아직도 살고 있는 러시아에 갈려고 여권을 신청한 일로 잡혀왔다고 한다. 그는 공산당과 함께 있었다는 죄목을 받고, 아무도 밖에서는 그를 옹호(擁護)해 줄 친구가 없어 그의 형은 종신징역을 받은 것 같다. 세째 러시아인은 아편중독자이며, 떠돌아다니던 거지이며, 중국인 아편 중독자와 똑 같이 더러운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에는 이가 득실대고, 옷 거죽에도 이가 슬슬 기어다니었다.

중국인들은 가지 각층의 사람들이었다. 몇몇 중국인은 시내에서 사는 갑부로서 경호원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또 몇몇 중국인들은 도시 사람들과 달리 세상물정을 모르는 농사 군들이다. 내 바로 옆자리의 중국인은 두 다리에 쇠고랑을 찾는데 감방의 모든 죄수 중에 다리에 쇠고랑을 찬 죄수는 이 중국인밖에 없었다. 그는 체격이 아주 건장하게 생겼지만 감방 죄수들 중에서는 가장 소망이 없는 궁지에 빠져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산적(山賊)이며, 일본인들을 여럿 죽인 일로 체포되었지만 감방의 죄수 동지들은 그를 애국자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살인자의 진상이, 이 죄수의 생명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 덜 중요하다고는 할 수 없지 않는가? 이렇게 잔인한 발 쇠고랑때문에 그의 발목이 붓고, 상하게 하였고 염증이 생기게 만들었다. 또 다른 죄수 하나는 그에게 소매를 걷고 다른 상처를 보여주라고 하였다. 이 화상은 경찰이 그의 공범자(共犯者)를 알아내려고 신문지에 불을 질러서 한 고문(拷問)의 결과라고 한다. 그의 상처를 전혀 본체만체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더러운 신문지를 아픈 상처에 대고, 흙이 잔뜩 묻은 겉옷에 상처가 스치지 않게 한다고 한다.

내가 앉은 자세가 거북하고 옹크려야 했지만 첫날밤은 그런 대로 잠을 잘 수 있었다. 체포되었을 때 신경을 너무도 썼기 때문에 아주 피곤했던 모양이다. 간수가 아침이 되었다고 소리를 질렀다. 천장에 매달린 전등은 밤낮없이 켜져 있지만 떠오른 해는 그 햇살을 감방 안으로는 보내지 않는다. 간수가 명령하는 대로 우리 25명은 모두 일어서 방안을 돌기 시작했다. 뒷간 앞에 줄을 세우며 나란히 섰다. 용무를 마치고는 제자리로 돌아가 웅크리고 앉거나, 양쪽 벽에 등을 기대며 앉는다. 영어를 할 줄 아는 러시아 친구가 앞뒤로 설렁대다가 군중을 뚫고 지나가 감방 중앙으로 걸어갔다. 일본인 죄수와 반반하게 생긴 중국인죄수 둘이 러시아 친구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간다. 나도 그 사람들 뒤를 따라 걸었지만, 20쌍이 넘는 눈초리가 항상 내게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고 좀 수줍어졌다. 공산당원으로 지목된 젊은 러시아 청년은 창살에 얼굴을 대고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어마신다. 그는 속내의 바람으로 서 있기 때문에 다른 죄수들이 부러워하듯 쳐다보고 있다. 그는 바지를 벗어 접어 두고 확실치는 못하지만 조만간(早晩間)에 출옥할 때 입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방안을 설렁대고 있을 때 간수가 손으로 말아서 만든 골련 둘을 제가 좋아하는 죄수에게 슬쩍 쥐어준다. 나머지 죄수들은 마치 굶주린 짐승들이 음식 부스러기를 찾는 것처럼 몰려 한번만 골연을 빨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런데 일단 골연을 입술에 대면, 그 한번이 너무 오래가기 때문에 다음 사람이 한번 빨기 위해 잡아챈다.

지금 막 간수는 뒷간을 씻어 내릴 한 물통의 물을 가져왔다. 물을 뒷간에 부어 쏟는 동안 모두 벌떼처럼 모여들어 그 물로 손과 얼굴을 적시기를 애썼다. 둘째 물통의 물이 왔을 때 나머지 죄수들이 또 모여들었다. 나도 그들과 어울려서 내 손과 얼굴을 적셔 볼까? 그렇지 않으면 그냥 내 자리에 앉아서 모양이 어떻든, 손이 더럽든 신경을 쓰지 말고 보고만 있을 것인가? 나는 다른 죄수들처럼 애를 쓰지 않고도 물을 손에 받을 수가 있었다. 간수는 밖에 서서 빨리 물을 뒷간에 부어 버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난 다음 아침 식사가 들어왔다. 러시아인들과, 일본인과, 내 아침밥은 쌀밥에 콩이 몇 알 섞인 것이었다. 중국인들의 아침은 까실 까실 한 수수밥에 콩이 좀 들어있었다. 이러한 차별대우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쌀밥을 받은 죄수들은 수수밥을 먹는 중국인들과 조금씩 교환하였다. 나는 살인 죄수와, 또 밥을 더 먹으려고 무척 애쓰는 중국인에게 나누어주었다. 밥을 먹기 위하여 간수가 마루바닥에 던져 넣는 절까락들 중에서 깨끗한 쌍을 서로가 집으려고 애를 썼다. 식사가 끝나면 절까락을 회수해 가며, 그 절까락을 씻지도 않고 그냥 다시 가져와 마루바닥에 던져둔다. 절까락에 음식이 아직 묻어 있는 것을 본다. 감옥에서 이질병으로 죽는 죄수가 숫하게 많은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절까락을 집을 때 누가 쓰던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 있겠는가? 밥을 다 먹고 밥그릇이 비워지면 뜨뜻한 물을 담아주고, 그 물을 다 마신 다음에는 밥그릇과 절까락이 회수된다.

이러한 중에 식료품 상자가 영어를 할 줄 아는 러시아 사람과, 부유한 두 중국인들에게 들어왔다. 식료품 상자 속에는 치즈, 쏘새지, 과자, 우유와, 과일 등이다. 그들은 나머지 감방 죄수들이 부럽게 쳐다보는 중에서 열심히 먹었다. 음식을 깨물 때마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따라다니며, 군침을 흘린다. 그들은 식료품을 좀 남겨서 친하게 지내는 동요 죄수들과, 발목을 묶인 살인범 죄수와, 중 환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들도 우리가 쳐다보고 있는 동안 그러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몹시 어색한 것처럼 보인다. 그 식료품 상자가 들어 올 때마다 식료품을 싼 종이를 소중히 손바닥만 한 크기로 찢어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준다. 이러한 사역(使役)은 뒷간에서 쓸 종이가 없기 때문에 매일 일어나는 중요한 일과로 변해 버렸다. 나는 나흘을 이 감방에 있었으며, 아침이 되면 밥을 먹자마자 호출을 받아 검찰관의 심문을 받으러 나갔다. 24시간의 하루를 이렇게 혼잡한 감방에서 죄수들과 인생을 두고두고 살아야 된다고 생각해 본다. 사실은 우리 믿는 형제,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경험을 해왔고, 어떤 형제는 일년 혹은 일년 반을 변함없이 따분한 감옥생활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감옥살이가 그들의 건강에 지장을 크게 준 것도 알고 있으며, 그 후환(後患)으로 죽은 사람도 알고 있다.

지난 나흘동안 온 종일 심문을 받고 밤이 어두워지면 우리는 감옥에 돌아왔다. 내가 감방에 돌아오면 여러 사람이 싸늘하게 식은 내 몫의 밥그릇을 둘러싸고 나를 위하여 지키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만일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들은 좋다구나 하고 내 밥을 먹어버릴 참이다. 이 사람들이 얼마동안을 기다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감방에 들어간다. 내 밥은 언제나 제 자리에 있게 마련이다.

첫날 밤 후에 한사람이 감방에서 옮겨졌을 때 나는 즉시 그 빈자리를 알아 낼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죄수들이 내가 첫날밤에 자리 잡은 곳에 그대로 가 있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 둘째 번 저녁은 뒷간 옆에서 자고, 셋째 밤에는 뒷간 뚜껑 위에서 자고, 넷째 날 밤에는 뒷간 맞은 편에서 잠을 잣다. 나는 매일 심문을 받는데 너무도 피곤했기 때문에, 밤중에 뒷간을 쓰기 위하여 나를 깨울 때는 몹시 원망스러웠다.

나는 감방 건너편 쪽 죄수들의 다리들을 어떻게 할 수 없어, 내 다리를 마음대로 펴지 못했고, 내 양쪽 옆에 누어 자는 죄수들이 있어 무릎을 굽히기가 힘들었다. 사람들이 밀접하게 얽혀있어 한 사람이 움직이면 여러 사람들이 그 영향을 받는다. 가끔 가다 한사람이 움직임으로 한 밤중에 말다툼 소리를 내며 싸움이 일어났고 마침내 간수의 호령을 듣고서야 조용하게 된다. 내 바로 옆 죄수는 두 발목에 수갑을 차고 있다. 잠결에 나는 그의 상한 팔의 상처를 문질러 잠을 깨운 적이 있다. 그 죄수의 팔의 상처를 내가 조심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다 보면 마음을 턱 놓고 잠을 잘 수가 없다.

내가 체포된 날이 수요일 이였다. 일요일 아침 Byran부부와, 나와, Byran의료원의 간호원인 김태경이와 그리고 또 한 명의 한국여인이 경찰실로 인도되었다. 뚱뚱하고 좀 거추장스럽게 생긴 사복 차림의 한 중국인 경관이 Byran의사와 나를 나란히 서게 한 다음 우리 둘에게 한 수갑을 채웠다. 그의 코에 상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 상처는 싸움판에서 상대방을 때려눕힌 승자의 표시로 가지고 있는 듯 하다. 혹시 그는 죄수들을 뚜들겨 심문을 하기 위하여 채용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된다. Byran부인과 태경이(우리는 그 간호원을 "태경이"라고 불렀다)는 우리처럼 서로 수갑을 차고, 또 한 여인은 수갑 없이, 모두를 기차역으로 데려갔다. 역에서 경관 둘이 왔으며, 그 중 한 경관은 바로 내게 영장을 읽어 주고 나를 체포한 박 순경이었다.

우리는 만주 벌판을 달려가는 민간인 기차 속에서 이 일요일을 손목에 수갑을 찬 그대로 지냈다. 다섯 명의 죄수들이 다 손에 성경책을 들고 가끔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를 지키고 있는 경관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 관경(觀境)이야 말로 아주 색다른 일이었음이 틀림이 없다. 기차가 연착함으로, 만주의 수도였던 신경에서 안동으로 가는 기차와 연결이 안된 것이다. 우리는 그 지방 감옥에 끌려갔고, 기나 긴 밤을 남방시설도 없고, 찬바람이 들어오는 감방에서 수갑으로 연결된 다섯 명이 떨며 밤을 새웠다. 다음날 압록강을 건너서 있는 한국과 만주의 접경에 있는 안동으로 우리는 수갑을 찬 체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다. 안동 역에서 우리를 체포 할 때에 지휘관이었던 일본인 경관과 만났다. 그는 우리를 러시아 식당으로 데려가 음식을 주문했다. 이렇게 음식으로 선대(善待)를 받아 기분이 꾀 좋아졌는데, 몹시 딱딱한 경관들에게 우리를 넘겨주자 우리는 다시 마음이 찹찹하게 되었다.

경관들은 우리를 안동 교외에 있는 유치장으로 데려갔다. 아주 어두운 밤이 되었고, 유치장 대문을 차가 지나고 난 다음, 그 대문을 닫아 잠그는 소리를 들었다. 가끔 가다 밝은 전등불이 빛이고, 높은 벽돌 건물과 파수대가 보였다. 앙상하게 생긴 경관이 우리를 인계 받았다. 그는 우리를 완전히 내의(內衣)까지 벗게 하였다. 또 여자 경관은 여자들을 커튼으로 막은 방에 데려가 몸을 조사했다. 처음에 우리가 수감될 때 처럼 우리의 시계, 허리띠, 넥타이, 그리고 다른 물건들을 빼앗아 갔다. 그리고 나서 얼마 있다가 그 경관은 내 손수건과, 작은 타월과, 칫솔과, 치약과, 비누를 돌려주었다. 우리가 간절히 애원한 끝에 감옥의 법을 억이고 우리의 안경은 돌려주었지만 성경책은 돌려주지 않았다. 사복 차림의 중국인 호위경관이 떠나고, 검정색 정복을 입은 경찰이, 여자들은 뒤에 두고 Roy(Byran의사의 아명)와 나를 데려갔다. 우리는 감옥의 뜰을 지나고 여러 개의 작은 건물들을 지난 다음, 유치장 사무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다. 이 감방은 양철지붕의 나지막한 건물이며, 벽은 하얀 회로 되었고 침침한 전등불이 들어와 있었다. 간수가 문을 열었다. 우리는 이 크고 길쭉한 감방 중앙에 들어갔고, 20명 넘는 죄수들이 마루바닥에 누어있는 것을 보았다. 당직 간수(看守)가 우리를 데리고 감방 왼쪽으로 있는 낭하를 지나서, 여러 개의 감방 문을 지나갔다. 감방 문은 두툼한 나무로 된 문이었다. Roy를 한 방에 집어넣은 다음, 나를 낭하 끝 마지막 감방에 집어넣었다. 문을 열쇠로 열자 신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간수가 전등을 켜라 했으나 전구가 나갔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이 감방을 쓰지 않았던 모양이다. 방에는 남방시설도 없고, 아무런 세간도 없고, 침구도 없었다. 나는 실망을 했지만, 무엇인가 든든한 마음이 생겨, 오버코트를 덮고 딱딱한 마루바닥에 누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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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한 죄수만 들어가게 만든 감방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욥 35:10)

아침이 되자 나는 감방(監房)을 살펴 볼 수 있었다. 회반죽으로 된 열자나 되는 흰 벽이 천장에 닫고 있다. 발을 피고 누우면 감방의 길이가 내 키보다 서너 자 정도 더 길다. 내가 서서 양쪽 팔을 펴면 양쪽 손이 양쪽 벽에 동시에 닫는다. 감옥에 들어가는 문 건너편에는 창살을 박은 창문이 있고 이 나지막한 창문 너머로 추수가 다 끝난 배추밭을 내다본다. 그 배추밭 너머로는 감옥소의 벽돌로 된 높은 벽이 어렴풋이 보인다.

감방의 마루바닥은 갈대를 가늘게 쪼개서 엮은 얄팍한 자리로 깔려있다. 감방으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갈대 자리가 낡아 부서진 것으로 보아 그 자리가 이방에 깔려 진지 오래되었으며, 내가 이 감방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죄수가 아님을 알게된다. 이 감방을 내가 처음으로 방문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다른 증명은 사람이 앉은키 높이에 때가 꼬질 꼬질 묻은 줄이 벽에 남아 있다. 이 줄은 죄수들의 머리가 벽에 닿아서 때가 묻은 줄이다. 내가 늘 앉는 뒤편에는 나무문이 있고, 내 허리정도 높이에 밖에서 창살을 박은 창문이 있다.

간수(看守)들이 이 창문으로 가끔 감방을 들여다보고 또 나에게 얘기를 했다. 나는 허리를 좀 꾸부려야 얘기를 할 수 있었다. 문짝과 창문 살은 군함의 색깔인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읽을 수 있는 책도 없고 무엇을 쓸 수 있는 자료도 없이 하루 종일을 아무도 없는 감방에서 홀로 지낸다는 것을, 여러분이 경험한 일이 없는 한 상상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체포되어 감금된 일은 하나님의 어떤 목적이 있다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나날을 견디게 하고, 또 이 나날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내고자 하는 생각에 잠기게 된다.

우리가 서로 수갑을 찬 체 기차여행을 하는 동안 할빈 감옥에서 처음 나흘 밤 동안에 일어난 경험담을 나눈 적이 있다. Roy는 자기 감방 벽에 한국어로 성경 구절이 씌어진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가 감방에 들어가기 전에 필경 우리 형제 중 하나가 그 감방에 있었든 모양이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어떤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만일 내가 감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다음에 이 감방에 들어 올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남겨주어 그로 하여금 생각 할 수 있게 하자. 그렇지만 무엇을 가지고 쓴다는 말인가? 부서진 갈 때 조각을 내가 쓸 수 있을 까? 하지만 회 벽은 너무도 단단하게 생기지 않았는가? 내가 손톱을 가지고도 벽에다 자국을 낼 수 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내 신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보통 죄수들은 신을 감방밖에 벗어 두고 양말만 신고 감방에 들어가도록 명령을 받는다. 나에게는 신을 벗으라고 명령을 했지만 그 신을 방안에 두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구두끈 끝에 달려 있는 금속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도구가 되지 않겠는가! 구두끈 하나가 끊어져 다시 묶어서 연결한 것을 나는 발견했고, 구두끈을 다 풀지 않아도 쇠로 된 구두 끈 한쪽을 풀은 다음, 두 손가락으로 쇠붙이 끝을 잡은 다음 감방 문 옆에 한국말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를 새겼다. 손가락에 상당한 힘을 주어야 했고 어떤 글자는 두세 번씩 긁어야 했다. 그러나 그 작은 쇠붙이를 쥐고 눌러서 벽에 글을 새겨 쓰는 일에 성공했다. 그리고 한 발 물러서서 내 손재주를 만족한 느낌으로 감상하게 되었다. 벽에 깊이 파서 색인 글씨들이 두고두고 그 감방에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 글을 쓰는 작업이 막 끝났을 때 간수가 와서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다 챙겨 들으라고 명하였다. 그는 나를 대리고 Roy가 있는 감방 다음으로 내려가도록 했다. 감방의 크기나 생김새가 내가 막 나온 감방과 꼭 일치하다. 사실은 내가 알지 못하고 끌려 왔지만 이 감방이 줄곧 내 거처가 되었다. 사실상 내 감옥 생활을 쓸모 있는 기간으로 만들 수 있는 궁리를 하면서, 같은 감방에 매일 들어온다면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했다. 만일 나를 매일 다른 감방으로 옮겨 놓는다면, 방마다 나는 성경 구절을 새겨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유일한 일을 찾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벽에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다시 새겨 쓰게되었다. 얼마 후에는 로마서 6장 23절을 벽에 새겼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나는 또 십계명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내 손가락이 아파 쑤시고 쥐가 나기 때문에 하루쯤 쉬었다 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그 쉬는 날을 정할 결을이 없었다.

고독감이 나를 엄습(掩襲)하고 나를 또 놀라게 하였다. 나는 온갖 생각을 다하여 이 주어진 내 시간을 효과 적으로 보낼 계획을 했다. 명상의 시간을 여러 번 가져보았다. 잠이 깨자마자 나는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나는 정식으로 일과 시간을 짜 보자는 것이다. 마치 이것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행동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나는 온갖 노력을 다하여 암송할 수 있고, 마음속으로 노래할 수 있는 찬송구절들을 찾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기억하는 몇 가지밖에 없는 찬송구절에 실증이 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난 다음 나는 찬송(暗誦)할 수 있는 성경구절들을 생각하기에 노력했다. 그러면서 암송할 수 있는 찬송가의 가사나 성경구절이 더 있으면 하고 얼마나 애석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없다. 그 다음 나는 식구들의 이름을 한 사람씩 들어가며 기도했다. 그리고 친구들과 세상에 흩어져있는 믿는 형제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과 시간은 항상 생각보다는 일찍 끝나고, 항상 기나긴 아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도수 체조를 좀 해 보았다. 그 중에 한가지 운동을 매일 같이 계속했다. 그 운동은 무릎을 서서히 꾸부리면서 쪼그리고 앉은 다음 양쪽 팔을 활짝 펴 보는 동작이다. 이 동작은 내가 스케이트를 타면서 해 보기를 원 했으며, 그래도 소망을 가지고 감옥 사리를 하는, 비단 그 소망이 경우로 보아서 하잘 것 없는 소망이 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상쾌한 동작의 운동이다. 나는 감옥에 있는 동안 내 체격을 제대로 유지하겠다는 결심을 단단히 했다.

아침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물이 담긴 대야가 들어 왔다. 이 물을 가지고 뒷간에서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고 또 손수건 둘을 세탁하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난 다음 내 옷에서 자라고 있는 벌레를 조사했다. 그 다음에는 창문에 다가서서 햇볕이 내 얼굴과 옆구리를 비치도록 옷을 벗어 본다. 이 감방에 인색(吝嗇)한 점심이 배달되는 정오가 다가오는 것은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리며, 기나긴 오후를 지내야 하는 생활은 고역이다. 나는 오전에 하는 일정을 오후에 또 반복하였다. 이러한 무미건조한 생활의 반복이 나를 멍청한 사람으로 만들 것이 아닌가? 저녁밥은 일찌감치 배달되고 저녁시간은 여전히 같은 재주를 부려보는 수밖에 없다.

혼자만 들어가는 이 감방에서 제일 첫날 경험한 일들은 나로 하여금 지치게 하였고, 내 마음을 몹시 쓸쓸하게 만들었다. 내 영혼이 침침한 골짝 바닥에 도달했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뛰어 오르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이러한 느낌은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감방 앞뒤를 거닐었다. 세 발자국 걷고 허리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세 발자국 걷고 허리를 왼쪽으로 돌리면서 한참동안 체조가 계속된다. 나는 내 기분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 체조(體操)에 맞추어서 휘파람을 불렀다. 특별히 곡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학에 다닐 때 친구들끼리 불러보던 노래의 곡조다. 나는 가사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내 체조는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감사를 드리세"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세" 차차 나는 가사를 붙여 가며 곡조를 가사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머지 않아 내 행진곡의 제 일 절이 완성되었다.

 

"감사를 드리세,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세

그는 만 왕의 왕이 아니신가

모든 나라와, 민족과, 국가와 족속들이

그에게 찬양을 드리세

그는 세상을 권능과 의로 다스리시니

바다의 노도라할지라도 그의 뜻에 복종하는 도다

감사를 드리세,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세

당신의 기쁘고 즐거움으로 찬양하세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밤중에 노래하게 하셨다!" 내가 지은 가사들이 내 생각과, 내가 처한 환경에서 온 것이 결코 아니었다. "감사를 드리세!" 나는 좁은 감방을 앞뒤로 서성거리면서 소리를 크게 지를 번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공포(恐怖)가 나를 엄습했다. 나는 내가 노래한 구절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온갖 힘을 다 했지만 내가 기억력을 너무도 상실하여 아침이 되면 가사를 다 외우지 못했다. 곡조에 맞추어야 될 단어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내 마음을 들뜨게 하였다. 어디에다 이 가사를 적어 둘 수 있을까? 무엇을 가지고 쓴단 말인가? 아침에 나는 구두끈을 가지고 벽에 가사를 써 보려고 노력했지만 벽은 너무도 단단했다. 그리고 충분한 시간도 없지만, 높은 감방 천장에 달린 전등 빛을 가지고는 벽에 쓸 글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주 성급해졌다. 내가 지어낸 노래를 기록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내 손가락이 주머니 구석에 쳐박혀 있는 동전에 손이 닿았다. 이 동전은 중앙에 구멍이 뚫린 중국돈 오전이다. 이 동전은 내 오버코트 주머니 깊이 숨어 있어 내가 감옥에 들어 올 때 몸수색을 한 간수가 발견치 못했던 모양이다. 나는 이 동전을 손가락으로 단단히 잡은 다음에 용감하게 힘을 내어 벽에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감사를 드리세!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세!" 나는 구절을 다 쓰고 말았다. 날은 이미 저물어가 내가 벽에다 긁어 쓴 가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