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바라보자

"Seeing Jesus" by Peter Barnes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을 반대하는 입장

피터 반스(Peter Barnes)저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바로 전 주에, 헬라인 몇이 유월절 예배에 참석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왔던 기록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하나인 필립을 만나서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라고 간청했다(요 12:20-21).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들 헬라인들을 만나 보시겠다는 답변은 하시지 않고, 자신의 죽음과 또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죽으셔야 된다는 설명을 하셨다(요 12:24). 오늘날 이와 같은 헬라인들의 요청이 늘어나고 있으며, 또 이러한 요청들은 무의미한 것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라는 질문에 대한 주님께서 주신 답변을 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심지어 영적으로 개혁의 전통을 물려받은 교회들도 그리스도를 묘사한 그림을 받아들이는 관습이 널리 퍼지고 있다. 그리스도를 묘사한 영화가 나왔고, 그리스도의 초상화가 나왔고, 책마다 그리스도의 그림을 그리는 등,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그림들이 범람하고 있다.

문제점이 무엇인가?

이러한 상황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하여 제일 먼저, 그리스도의 그림을 반대해야 할 기본적인 문제점을 결정지어야 한다. 예수님의 그림에 대한 문제가 성경에 나타나는 질문 중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는 것들 중의 하나인가? 말하자면 우리 신앙생활에 예수님의 그림이 어느 정도 필요하고, 또 도움이 되는가 하는 질문을 해 보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사진을 사용하는 것이 어떠한 편리를 위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성경 원리에 위반됨으로 제외되어야 한다는 입장에 당면하게 되었는가? 사실 이상과 같은 질문과 논의에 대하여 가장 타당하고 명료한 진리를 성경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십계명중에서 알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4-6; 신 5:8-10참조)

성경 여러 곳에는 거짓 신들의 우상뿐 아니라, 진실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형상을 만들지 말도록 단호한 명령을 내리셨다(레 26:1, 시 115:1-8, 사 2:8, 40:18-20, 41:21-24, 46:5-7, 호 13:2, 암 5:26-27, 행 17: 24-25, 29, 롬 1:22-25, 요일 5:21 참조). 선지자들의 이스라엘을 향한 가장 엄중한 비난이, 그들이 나무를 잘라 일부를 음식을 만들거나 데우기 위하여 불을 피우는데 쓰면서, 동시에 그 나무의 다른 부분은 신의 모양을 조각하여 섬기는 일이었다(사 44:9-20).

이러한 형상들이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다른 물체에다 동여매야 하며, 그 형상들은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또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리고 그 형상들은 또한 어떤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행할 수도 없다(렘 10:1-5). 이와 반면에 진실하신 하나님을 어떤 눈에 보이는 모양으로 나타낼 수가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며(요 4:24), 또한 보이지 않으시는 분(딤전 1:17)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물질적인 상태로 표시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모세가 이스라엘에 대해 경고한 이유이며, 신명기 4장 15-18절에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위의 구절에서 아버지의 형상도 만들지 말고, 아들의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한 성령에 대한 형상도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십계명의 제 2 계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리며, 또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성자이신 예수님의 사진을 인정하는 것은, 그가 인신(人身)이 되시어 세상에 오셨고, 인간으로서 우리를 대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는 나중에 다시 논의하기로 한다. 이러한 생각이 잘못 인도된 것이 아니며, 예수님의 사진이나 그림에 대한 문제점이 절대적으로 없다고 믿는 자들은 이것을 진지하게 믿고 있다. 그리고 또한 복음전도에 열성을 가지고,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들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동료인 그리스도인들의 영화를 비평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는 성경말씀에 입각해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왜 그리스도의 그림이나 사진을 가질 수 없는가?

1. 그리스도를 그린 모든 그림은 부정확하며, 작자의 상상을 그린 것 뿐이다.

성경말씀의 한가지 특별한 특징은, 신약과 구약을 막론하고 그리스도의 본질을 표명하지만(요 5:39), 그리스도의 육체의 모양은 설명하지는 않는다. 성경에 단 두 구절이 그리스도의 육체적 모양에 대하여 약간 설명한다. 첫 번째 구절은 장차 오실 (주님의 초림) 예수님에 대한 이사야 53장 2절의 예언이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나신 그리스도의 육체적 모양이 지극히 장엄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미약한 것을 상상하게 된다.

두 번째 예수님에 대한 설명을 요한복음 8장 56절-57절에서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대화하신 내용에서 나타난다. 우리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선언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하셨고, 57절에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고 대답하였다. 누가복음 3장 23절 기록에 의하면, 이때 그리스도의 나이가 30세를 좀 넘은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마 8:20)을 생각하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하여 애쓰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나이를 50정도로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된다(막 3:20-21, 6:31-34).

여하튼 간에 위에서 말한 두 가지 경우가 있지마는, 그리스도의 육체의 모양을 설명한다고 말하기에는 미약하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감동시켜 주님의 육체적 모양을 설명하는 기사를 쓰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사도 베드로도, 일세기 신자들이 보지 못한 그리스도를 믿었음을 기록하였다(벧전 1:8). 그러고 이러한 관점은 아직도 존재한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지만, 그가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성령께서도 그리스도께서 키가 작은 지, 큰 지, 또 살이 쪘는지, 말랐는지, 파란 눈을 가졌는지 혹은 갈색의 눈을 가졌는지, 검정 머리를 가졌는지 또는 연한 색의 머리를 가졌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데 있어 이상에 관한 예수님의 모양이 관계되지 않으며,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데 있어 필요한 지혜를 얻는 것과도 전혀 상관이 없다.

숱하게 많은 예수님의 사진을 한 곳에 전시한다면 어떤 것이 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모든 그림은 예수님을 나타내는데 부정확하다. 유명한 화가, 엘 그레고(El Greco)가 그린 그림 중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는 광경의 그림은, 어떻게 생각하면 주님의 사역을 현명하게 묘사한 것 같고, 예수님의 복음의 목적과 능력을 잘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사진이 어느 정도 믿을 만 한가? 어느 정도 사실인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현대에 와서도 어떤 사람의 품성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최근에 와서 캐서린 린스크우그(Kathryn Lindskoog)의 '그늘진 땅'(Shadowlands)이라는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불평을 하였으며, 그 불평인즉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를 부드럽고, 파란 눈을 가진, 모호한 신앙을 소유한 할아버지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 영화에서 조이 데이비드맨(Joy Davidman)은 뛰어나게 아름답고, 말할 나위 없이 밝은 민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을 또한 불평한 것이다. 이 영화가 시 에스 루이스가 죽은 후 겨우 23년째인 1986년에 미국 텔레비전에 상영된 것이다. 하물며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고,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고 한다. 또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림이 정확하고 부정확한 것에 관계없이 그릴 수도 있다'라고 한다. 그렇지만 어떤 가정주부가 남편이 여행 중이어서 없는 동안에 집에서 어떤 딴 남자의 사진을 걸어 놓고 이 것이 내 남편이라고 계속하여 바라보고, 또 말하기를 '내 남편의 사진은 아니지만 이 사진을 바라봄으로써 내 남편을 생각한다'라고 한다면, 사실상 그녀가 남편을 생각하는 것인가?

대 교황 그레고리(Gregory: 540-604AD)와 다마스쿠스 존(John of Damascus: 675-749 AD)은 두 사람이 다 예수님의 사진에 대하여 긍정적이다. 그는 말하기를 '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글을 가르치며, 그림은 글이 아니다. 그림은 눈에게 말하며, 말은 귀에게 말한다. 이러한 것이 연결되어 우리에게 이해를 가지고 온다.' 이와 같은 비슷한 이유를 가지고 예수님의 초상화나 영화를 옹호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질문해야 할 문제는, 이러한 사실이 아닌 것을 보고 무엇인가를 믿게 하는 것이 진리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인가?

2. 그리스도의 초상화는 모두가 부정확할 뿐 아니라, 그 초상들은 참 그리스도를 가르치는데 오류의 근원이 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초상을 그린다는 것은, 그 초상화를 그리는 작가의 상상을 그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아돌프 본하낵(Adolf VonHarnack)이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초자연적인 기록을 빼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유주의(自由主義)적 신교사상(新敎思想)이 생겼고, 심지어 카톨릭교회의 조지 티이렐(George Tyrrell)은 본하낵을 비평하여 말하기를, '본하낵이 보는 그리스도는 마치 19세기 카톨릭 교회사의 암흑시대를 더듬는 것 같이, 깊은 샘물의 밑바닥을 들어다보는 자유주의 신교사상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티이렐도 같은 종류의 오류를 범했다. 진리를 그림으로 묘사하려고 할 때 위험이 따르는 것이 사실이며, 그 진리를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스도를 그린 모든 그림은 화가 자신의 상상과, 화가 자신의 문화 배경이 반영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잔틴(Byzantine)의 그리스도, 앵글로색슨의 그리스도, 아프리카인의 그리스도, 히피족의 그리스도 등 한없이 많은 종류가 있다. 그러나 그 중에 어느 한 그림도 진실한 그리스도를 나타내지는 못한다. 홀맨 헌트(Holman Hunt)의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작품이다.

3. 그리스도의 사진은 그리스도를 욕되게 한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표시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가?'하는 질문에 우리는 답변해야 하는 입장에 도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진은 그리스도를 욕되게 한다. 우리는 둘째 계명을 다시 생각해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 형상을 우리가 만들지만, 그 형상을 섬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의 신앙심을 돕게 한다'거나, '이해력을 준다'거나, '예배 시에 쓰는 것이 아니고 가르치는데 쓴다'고 할지는 몰라도 십계명의 제 2 계명은 형상을 만들어 거기에 경배하지 말도록 명하신 것 뿐 아니라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진실하게 나타내는데 있어 어떤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지 말도록 절대적으로 명령하신 이유는, 그 형상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경우도 동일하다. 예술가들이 그리스도를 묘사하는데 있어 그의 신성을 묘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인간성을 나타내기를 힘쓴다. 그들은 결국 천국을 묘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그림을 지상에다 한정할 수 밖에 없다. 다메섹 노상에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리스도의 고귀한 영광 때문에 장님이 된 것이나, 고귀한 영광 때문에 사도 요한이 엎드러져 죽은 것 같이 된 사실은(행9:3-9, 계 1:17) 그들의 생각에서 제쳐 놓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성품을 인간의 형태로 극한하여 묘사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이해하는데 있어, 그의 두 가지 성품을 나누어 생각하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신 기간에도 그는 하나님 자신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구주가 되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내는 사람들은 토마스 와손(Thomas Wasson)이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절반을 그려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를 인간으로만 우리가 안다면, 그 놀라운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의 중심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성으로 감추어진 신성을 보라

육체를 갖게된 하나님을 찬양하라

성경에 의하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리스도의 모양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성 만으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신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리스도를 제자들은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영광을 보았노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 그리스도의 영광은 지금 세상이 볼 수 없게 숨겨져 있으나, 참 믿는 자들에게는 보여지는 것이다.(요 14:19).

예술가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제외하고 그림이나 조각을 만든다면, 그 결과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던 때와, 지금 영광을 누리시는 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는 무한정하게 다른 형상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사실상 예술가들은 십계명의 제 2 계명은 제외하고 그리스도를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진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손상시킨다. 사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나타내는 것인가?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신가? 언젠가 에이미 카마이클 (Amy Carmichael)이 인도에 도나버(Dohnavur)에 있는 고아원에서, 그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사진이 잘못된 것을 자신이 어떻게 배웠는가를 말하면서, 인도에서 전도생활을 하는 선교사들 간에는 예수님의 사진이 거의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지만, 그 고아원에서는 예수님의 사진을 걷어치웠다고 한다. 또한 말하기를,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가 될 때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진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특별한 설명을 해 주기 전에는, 그들이 예수님의 사진을 소유해도 좋은 것으로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진 없이 자라온 여러분은 성령께서 보여주시는 그리스도가 사진에서 보는 그리스도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을 알고 있다. 언젠가 여러분 중에 한 분이 성전에 서 있는 어린 주님의 사진을 받고 얼마나 실망했던 것을 나는 잊어버릴 수 없다. 소포를 열고 상자 속에서 그 사진을 꺼낸 그는 실망의 눈물을 흘렸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예수님께서 이 그림보다 더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했거든요'라고 하였다. 우리가 말하는 상대에게 하나님의 역사로 성령의 감동을 남겨놓는다면 그들에게 사진보다도 더 아름다운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존 오웬(John Owen)은 신학적인 용어를 써서 우리가 믿는 것과 같은 입장을 설명한 바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하여 긴 강연의 결론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은 어떤 피조물이 지닐 수 있는 것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차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진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이 헛된 것이며, 또 우상을 숭배하는 것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나무와 돌을 깎아 사람의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색깔과 찬란한 예술을 통하여 그것을 찬양하며, 미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영광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도록 인도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그림이나 조각을 만든 다음에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장색에게 주는 것"(사 46:6)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마치 선지자들이 말한바 영광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흡사한 형상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그 그림 속에 존경할만한 것이 있는가? 어떠한 근사한 것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없다. 이러한 형상은 사람의 생각을 진리와 사실에서 떠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겠는가? 이 형상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르치는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그림과 조각으로 된 형상은 참된 생각을 다 말살하게 한다. 형상을 통하여 하나님께 제공되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지니고 있는 영광스러운 신성에 대한 본질을 사람이 만든 형상들로 선포할 수 있는가? 믿음으로 살아야 함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형상들이 잠시동안의 즐거움이 될지 몰라도, 그 형상들이 주는 혼돈은 그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신앙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실천하여야 할 더 영광스러운 목표가 있다.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제 2 계명이 말씀하시는 자체가 형상에 대한 논쟁의 충분한 결론이 된다. 그러나 그림이 교육자료가 될 수 있다는 왜곡된 생각이 가져오는 심각한 문제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오류는 상당한 고집을 가지고 있다. 어떤 신자가 그리스도의 그림을 집안에나, 예배드리는 곳에 가지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그 그림이 보여주는 이상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 그 그림이 그를 돕지 못하고 있으며, 신앙을 돈독하게 하거나 이해하는 일을 돕지 못하고, 그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 그림은 없애 버려야 한다.

교회의 간증

슬픈 일이지만, 우리가 지금 의논하고 있는 이 과제에 대하여 교회가 가지고 있는 견해가 명료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배울 수 있다. 제일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사진이 등장한 것이 라이온스(Lyons)의 감독이었던 이레니오스(Irenaeus: 130~200AD)라고 짐작한다. 이레니오스는 사도 요한을 알고 있던 서머나의 폴리카프(Polycarp of Smyrna: 69~155AD)와 친지였으므로 그의 작품들이 사도들이 가르치는 것과 별로 거리가 먼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 중에 '이단을 대항함(Against Heresies)'을 보고 알게 되는 것은, 이레니오스는 신비주의(Gnostic)와 대결하여 싸웠다. 그의 작품에는, '신비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들고 있으며, 그 작품들은 그림이거나, 물질을 서로 연결하여 만든 공예품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모양을 지닌 그림의 하나는,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시던 당시 빌라도(Pilate)가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초상들은 그것이 그려졌거나 조각되었든 간에 신비주의의 냄새가 나며, 이교(異敎)적 영향을 받고 있다.

다음에 살펴보아야 할 작품은 잘 알려진 그리스도인 씨아사리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0~340AD)의 것이다. 콘스탄틴 황제에게 누이가 있었고, 그 이름은 콘스탄티어이고, 그녀는 유세비우스에게 그리스도의 초상을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유세비우스는 아주 신랄한 어조로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을 했다. '어떤 교회나 어떤 개인이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당신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러한 초상화는 세상에서 없어졌으며, 교회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거절하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초상화가 교회에서 금지된 것은 상식이 아닌가?'라고 했다. 그후 유세비우스는 어떤 여인이 지니고 있던 그림(바울과 그리스도가 같이 서 있는)을 빼앗아 그것을 찢어 버렸다.

유세비우스의 처사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유세비우스가 불분명한 사실을 가지고 황제를 대하던 태도는 참으로 존경을 받을만 하였다. 그는 콘스탄틴의 초상화를 니케아 공의회(Councel of Nicaea)에서 그렸고, 그 제목을 '하늘에서 보내온 하나님의 사자'라고 하였다. 유세비우스가 황제의 누이가 요청한 예수님의 초상화를 거절할 용기가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확실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세비우스가 거절할 이유를 잘 설명하고 적합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초대 교회가 가지고 있던 신앙의 반영임을 짐작한다. 이 사실을 예술 역사가 마이클 고우(Michael Gough)가 말한 바, '초대 교회시대 이전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엮은 일화나, 수난 당하신 얘기나, 십자가의 수난에 대한 얘기를 초상화 하는 것은 전적으로 제외되었었다'라고 한 것으로 증명한다.

그러나 초대교회 이전에 가졌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오래 가지를 못했다. 4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외가 없이 누구나 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아니다. 키프로스(Cyprus)에 있던 살라미스(Salamis)의 감독 에피파니오스(Epiphanius)는 주 후 393년에 쓴 편지에서 불레셋을 여행하면서 일어났던 일을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내가 아나부라사(Anablatha)에 도착했을 때 등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곳이 교회임을 발견하고, 기도하기 위하여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문에 걸려있는 각가지 색실을 써서 수놓은 커튼이었다. 이 커튼에는 그리스도이거나 성자들 중의 하나인 사람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으나, 누구의 그림인지는 바르게 분간할 수는 없었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이러한 형상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또 그것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며, 성경에 위반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이 형상을 찢은 후, 교회 관리인에게 주면서, 그 천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 그들이 옷을 만들어 입도록 지시했다.'

그 후 에피파니오스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잘못된 것을 지적하여, 그의 동료들과, 황제 씨오도우시오스 1세에게 세 번 편지를 쓴 적이 있다. 그의 탄원은 전적으로 성공되지 못했으나, 그가 남긴 유서와 서약서에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였다.

'누구든지 신성하시고, 말씀이시고, 성자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지상에 있는 채색을 써서 그리고 그것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놀라운 것은 그후 에피파니오스는 로마교회에 의하여 성인으로 추앙되었고, 그의 기념일은 5월 12일이다.

그 다음으로는, 주 후 725년부터 843년 사이에 동방 교회가 성상(우상)파괴논쟁

(Iconoclastic Controversy) 혼란에 빠진 것이다. 주 후 725년 제왕 리오 3세(Leo III)는 국가의 시정으로 형상 숭배를 금지했으며, 그의 정책은 콘스단틴 5세 때까지 집행되었다. 그러나 그 논쟁은 대단히 활발하였고, 주후 753년에 히에리아 공의회(Council of Hieria)는 '성상파괴'의 정책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주후 787년에 가서 나시아 의회(Council of Niceea)는 이 정책을 전복하였다. 그리고 나서 주후 815년에 산크다 소피아(Sancta Sophia) 감독회의에서 성상파괴'의 정책을 다시 채택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수도원의 승려들은 형상을 지지하였고, 그들의 대변인은 다마스쿠스 존(John of Damascus)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황제들은 형상은 유대인이나 회교도들이 개종하는데 있어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에 있어 미신이 판을 치고 있고, 이 미신의 형상을 옹호하는 아이코노달스(Iconodules: 형상의 사용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어떤 형상은 그 근원이 하나님께서 오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고도 주장하였다. 그들이 또한 믿기를, 사도 누가는 데오빌로(Thephilus)각하에게 복음서를 보냈을 뿐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의 초상과,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그린 그림을 가지고 갔다고 믿는다. 그 당시의 황제들 특히 콘스탄틴 5세는 그들이 잔인하고 비도덕적인 '성화 파괴'를 정책으로 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방교회의 경우, 주후 843년에 과부가 된 데오빌로의 아내 디어도라(Theodora)가 다시 그리스도의 형상을 쓸 수 있도록 정책을 세웠다.

동방과 서방의 중세 교회는 점차로 기독교를 소개하는데 있어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을 제시하기 시작했고, 이 문제를 종교개혁 시에 논쟁하였고, 원래(元來) 초대교회와 같이 형상을 부정하며 설교하는 일에 도전하게 되었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사진으로 제시하는 것을 거절하였으며, 그의 견해는 17세기 청교도들에 의하여 승인되었다. 이에 대한 청교도들의 신조는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대교리문답, 제 109항에 공식화하고, 그 제목을 '제 이 계명에서 금지된 죄가 무엇인가?'라고 했으며, 그 해답은 대단히 포괄적이다.

 

"제 2 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이 가지각색으로 나타났으며, 권장되고, 명령되고, 사용되고, 현명한 척 이 죄를 인정을 하고 있지만, 어떠한 종교 예식에서 사람이 만든 형상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허락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거짓 종교와 타협하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또 그중 한 분을 나타내고 표시하는데 있어, 우리의 마음 속으로나, 외형적으로 만든 어떠한 사람의 형상이나, 짐승의 모양 등, 어떠한 것도 우리가 만드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이들에게 경배하고 예배하거나 하나님께서 그 속에 있다거나, 하나님께서 만드셨다고 해서는 안된다. 어떠한 것을 신으로 가정하여 그것을 경배하고, 그 것에 봉사해서는 안된다. 모든 미신적인 물건이나, 하나님께 예배함을 더럽히는 것이나, 이러한 것을 예배에다 더하거나, 그것으로부터 예배형식을 취해서는 안되며, 이러한 것을 우리가 발명했다 하더라도, 또한 다른 사람의 전통을 물러 받았다 할지라도, 고색의 이름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습관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할지라도, 또한 착한 의도가 있다 할지라도, 그 외 어떤 주장이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물건을 예배하거나 경배해서는 안된다. 성물(聖物)을 매매해서는 안되며, 신성한 것을 더럽혀서는 안되며, 모든 것을 등한히 해서는 안되며, 체면손상을 해서는 안되며, 방해를 해선 안되며, 또한 예배를 반대하거나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안수하심을 반대해서는 안된다."

이상 지적한 바에서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진을 사용하여 그에게 말씀하셨다고 믿는 사람이 있었다'라고 한다면, 18세기 모리비안의 교희 지도자 진센돌프(Zinzendorf)가 말한 것을 인용할 수 있다. 진센돌프는 십자가상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그림에서 뜻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고, 또 그것을 다음과 같은 말을 찬송으로 부르게 하였다.

'나는 너를 위하여 이것을(십자가에 돌아가심)하였는데,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느냐?'

진센돌프의 영적인 경험에 대한 사실에는 부정할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 순간 십자가에 대한 그의 눈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그림을 인정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이 진센돌프의 일화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우리가 비록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모르고 행동할 때도, 경우에 따라 그것을 떠나 하나님의 바른길로 찾아가도록 축복하신다는 것이다. 또 다른 비슷한 경우는, 부흥사들이 결심한 사람들을 강단 앞으로 불러내는 경우이다. 부흥사의 이러한 방법은 성경적이 아니지만, 많은 경우 그리스도의 간증을 들으면, 그들이 강단 앞으로 걸어 나오는 순간에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예를 가지고 진리를 왜곡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전파되어야 하며, 다른 방법으로 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성경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못 깨닫고, 그리스도인은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는 예술인이 될 수 없다거나, 종교적인 그림이나 조각을 만들 수 없다고 잘못 이해해서는 안된다. 모세가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게 하신"(출 25:18-20) 것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예술을 인정하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이 소책자에도 예술을 인정함에는 변화가 없다. 역사가 피터 브라운(Peter Brown)이 진술한 것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그는 말하기를,

'암흑시대에 있어 예술에 큰 조화를 가졌던 두 사람이 있는데, 그 두 사람은 황제 디오필로스(Theophilus)와 오리언스의 감독 디오돌프(Theodurf)이다. 그들은 '성상파괴파'(Iconoclast)이거나 성화를 반대하는 자들(anti-Iconodult)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예술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사람들이었다. 16세기에 칼빈은 '조각과 그림을 그리는 재주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선물이다'라고 하였다.

시대적 급선무

시대가 요구하는 두 가지 급선무는 진실하고 건전한 신앙을 소유하는 일과, 하나님께서 소유하시는 말씀을 설교하는 일이다. 이렇게 함으로 교회는 다시 부흥할 것이다. 이러한 일이 없고서는 교회는 점점 타락하고 부패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믿음으로 살며, 보는 것으로 살지 않는다(고후 5:7) 우리는 천국을 본 일이 없고, 그리스도를 본 일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는 것처럼 바라본다(고후 3:18).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기 위하여 앞을 바라보며 나아간다. 그 이유는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우리가 볼 수 있는 일은 그가 먼저 우리에게 나타나셔야 되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는 것을 확신해 가며 살아야 한다. 17세기에 청교도 존 오웬(John Owen)은 두 가지 방법이 서로 대조가 됨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로마 교회가 말하기를 '신앙을 얻기 위하여 십자가의 형상과 또 다른 그리스도의 형상을 직접 눈으로 보며,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바라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이다'라고 믿으며, 이것이 복음에서 나타나며, 다른 곳에서는 올 수 가 없다]라고 한다. 그러나 그림이나 형상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방법이 성경에서 멀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위하여서는 그의 말씀인 성경말씀에 입각한 명료한 설교를 하는 데에서만 온다. 갈라디아서에서 징계하는 말씀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사도바울이 십자가상에 죽어 있는 그리스도의 그림을 가지고 다니면서 보임으로 사람들이 믿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반면에 바울은 성령께서 안수하심으로, 그 설교가 마치 말로 된 그림처럼 된다는 것이다. 마틴 루터가 비유로 말하기를 '내가 설교의 말씀으로 그린 그림보다 더 선명하고 확실하게 색을 써서 그릴 그림이 없다. 여러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가장 미련하게도 그림에 매혹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설교에서 현혹되어 있는 부분이다. 강단에는 이단이 우글거리며, 미신과 막연한 얘기로 가득 차 있다. 설교에 나오는 끝없는 논쟁이 끼치는 영향을 전혀 볼 수 가 없다. 이들 설교는 마음의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또 마음을 상하게 하지도 못한다. 어떻게 보든 간에 그들의 설교가 '은혜의 복음을 그린 선명한 그림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세계는 깊은 잠을 자고 있다. 오로지 큰 경종을 울려야만 그들이 깨어날 수 있다. 타락한 교회를 소생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하늘에서 받는 감격을 가지고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름 부어 교회의 부흥을 계획하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어떤 다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없다.

참고자료 (Notes)

1. 고린도후서 1010절을 보면 사도바울도 그렇게 당당한 모습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든 것 같다.

2. 'The C. S. Lewis Hoax', K. Lindskoog, Multnomah, Oregon, 1988, P-94

3. 'Idolatry and the Early Church', Byzantine Studies and other Essays, Greenwood press, Connecticut, 1955. P-136

4. 'I Believe in the Historical Jesus', I. H. Marshall, Hodder & Stoughton, London, 1977. P-113

5. 'The Ten Commandments', Banner of Truth, Edinburgh, 1976. P-62

6. 'Amy Carmichael of Dohnavur', S. P. C. K., 1959. P-61

7. 'Works', J. Owen, Banner of Truth, Edinburgh, 1981. Vol1, P-244

8. 'Against Heresies', The Ante-Nicene Fathers, A. Robert ad J. Donaldson, Eerdmas, Vol1, 1981. I-xxv-6

9. 'op.cit' N. Baynes. P-122

10. 'The Origins of Christian Art', Praeger, New York, 1973. P-39

11. 'Letters', Jerome, th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 P. Schaff and W. Wace, Eerdmans, vol VI, 1979. P-88~89

12. 'Patrology' vol 3, Westminster, Maryland, 1986. P-391~3

13. 'ibid'. P-393

14. 'A Dark-Age Crisis: Aspects of the Iconoclastic Controversy', The English Historical Review, no CCCXLVI, 1937. P-7

15. 'ibid'. P-8

16.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xi-Iff

17. 'op. cit', P-9

18. 'Art Needs no Justification', J. Calvin, op. cid., IVP, Leicester, 1978

19. 'Art and the Bible', F. A. Schaeffer, IVP, Illinois, 1973

20. 'Works', J. Owen, vol. 1. P-393

21. 'A Commentary on St. Paul's Epistle to the Galatians', P. Watson, James Clarke & Co, Cambridge, 1972. P-196

22. 'A Chance to Die: The Life and Legacy of Amy Carmichael', E. Elliot, Fleming H. Revell Co., Ne w Jersey, 1987. P-93

23. 'George Whitefield vol 1', A. Dallimore, Banner of Truth, Edinburgh, 1975. P-400

 

이대우 번역, 8/26/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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