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뉴스레터        

12-10-2005년

여러분께 드립니다.

2005년의 한해도 저물어 갑니다. 특히 저희들 복음회를 도와주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퇴직을 했으니까 시간의 여유도 있고 복음회를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할 것으로 기대를 했지만, 여러 가지 예상치 않았던 일이 생겨 계획했던 일을 미루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아직 저희들이 건강한 몸으로 이해에 성취하지 못한 일을 2006년도에는 성취할 계획입니다.

이 사업이 곧 "교회시대의 끝"과 "곡식과 가라지"에 대한 책을 출판하는 일입니다. 책의 원고가 완성되었고, 여러분 중 몇 분에게 교정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책 교정을 맡아 주시기로 자원하시는 분에게 원고를 Print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전화를 주시거나, (803-233-4402), E-mail(dlee793091@ alittlemaid.org)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책을 출판하는 이유는 복음회의 영리를 위한 것도 아니고, 복음회의 업적을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이 진리를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는 사명감 때문입니다.

출판사를 찾는 일에도 여러분의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지난 수년간 저희들 복음회의 책을 출판해준 기독교 출판사가 둘이 있습니다만, 그 출판사의 사정을 우선 알아보고 다시 의논을 드리겠습니다.

2005년에는 세상에 여러 가지 천재지변을 우리가 경험했습니다. 특히 Katrina 태풍은 미국 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미국의 경제상태를 혼란시킬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지만, 오히려 예상보다 훨씬 빨리 복귀될 것이라고 보도하는 것을 듣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지상에 대한 집념이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강해졌음을 감지합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거의 모든 인간은, 우리가 노력하면 21세기의 과학적 문화문명을 발전시킴으로써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심판날을 깨닫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흥미로운 새로운 화재의 보도를 듣습니다. 미국 연방정부는 200년 이상 역사적으로 Christmas를 국가의 공휴일로 지켜왔고 매년 12월초에는 각 청사 앞에 Christmas 나무를 장식하는 것이 유래이며, 큰 행사였습니다. 그런데 금년에는 이 장식을 Christmas Tree라고 부르지 못하고 Holyday Tree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물론 미국의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제시하지만, 민속의 전통을 지키는 것은 헌법과 연관이 안 된다는 주장도 하고 있습니다. Christmas Tree를 Holyday Tree로 부르도록 만든 사람들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가지고 미국에 이민 온 수백만의 제 2 국민이 제창 한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본토 백이 중 소이 자유주의 자들의 농간입니다. 미국의 자유주의 신봉자들의 인구는 늘어만 가며, 이러한 자들을 많이 뽑아 미국 국회에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Christmas Tree를 장식해 본적이 없는 저희들로서는 그 Christmas Tree에 관심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미국 사람들에 관심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에 흥미를 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말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의 맘 문을 여시고, 현실화되는 말세를 보게 하시고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긴박한 현실을 절실하게 깨닫는 길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것을 믿고, 오는 새해에는 그의 말씀인 성경을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결심을 여러분과 함께 갖고 싶습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하면서,

형제, 자매가 된

이대우가족 드림,

2005년 12월 10일

8 나는 어떻게 할까?

1. 순종이 그렇게 중요한가?

a.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하겠는가?

신실해 보이는 교회와 회중을 떠나는 일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말씀에 진실한 교회를 발견하거나, 혹은 그런 교회에 속해있다면, 그 교회 안에 남아있어도 되는지요? 가르치는 모든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한 교회를 만일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문제를 고려하면서,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파괴했을 때 하나님께서 고대 이스라엘에게 하신 명령들을 다시 살펴보기로 합니다. 아무도 예루살렘에 남아있지 말라는 명령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29장에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16-19절을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위에 앉은 왕과 이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되어 가지 아니한 너희 형제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로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 같게 하겠고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 보낸 열방중에서 저줏거리와 놀램과 치소와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그들이 나 여호와 말을 듣지 아니하며 듣지아니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을 을 찌니라"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가기를 거부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분명하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 때에 실제로 남은 자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살해당했습니다. 이 사건에 잇따라 애굽으로 내려간 소수의 남은 자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를 받는 오직 한 가지 길은, 사단의 나라를 상징하는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가서, 그들 치하에 있게 되었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사용하여,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간 자들을 보호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아무런 도움이나 인도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가복음 21장 20-22절에 다음과 같이 신중하게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싸이는 것을 "경험하면" 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은 것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나, 유대는 신약시대의 모든 교회와 교단을 대표합니다. 사단이 전 세계에 걸쳐 있는 교회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그곳에서 떠나야 합니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는 말씀의 문맥을 보면서, 누가복음 17장 31절에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신 말씀을 봅시다.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것이니라"

집은 교회를 상징하며, '지붕 위'라는 말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심판이 교회에 내릴 때에는, 참 믿는자는 교회 밖에 머물면서 복음을 세상에 전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슬픈 상황을 이사야 3장 6-8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혹시 사람이 그 아비의 집에서 그 형제를 붙잡고 말하기를 너는 의복이 오히려 있으니 우리 관장이 되어 이 멸망을 네 수하에 두라 할 것이면 그 날에 그가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않겠노라 내 집에는 양식도 없고 의복도 없으니 너희는 나로 백성의 관장을 삼지 말라 하리라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려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스려서 그 영광의 눈을 촉범하였음이라"

b. 예루살렘에 남은 소수에게는 영적인 귀를 주시지 않았다

큰 환난기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령이 분명했지만 그들에게 영적인 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모든 자들에게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갈 것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레미야 38장 2절을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의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같이 살리라"

그러나 바벨론은 가난한 자들을 유대 땅에 남도록 허락하였습니다(렘 39:10).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그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지 않을 때에 일어날 일이었으며, 결국은 그들 중 몇 사람들이 살해를 당했습니다. 그 다음 아직도 살아남은 자들이 예레미야에게 와서,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께로부터 답을 얻게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를 원치 않았고, 안전을 위해 유대에 남아 있든지, 아니면 애굽으로 피신하기를 원했습니다.

어떠한 성경구절도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이해 할 수 없음을 먼저 명심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름다운 우주를 단 한마디의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을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시어, 수많은 배역한 인간들을 구원하실 수 있었던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어떤 가르침도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하려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는 단순히 순종해야 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만일 순종치 않으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이 마지막 시험에 실패한 것이 분명합니다.

c.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례적(儀禮的)인 율법을 폐하셨다

우리가 신약 성경에서 여러 번 발견하는 "오실 때까지"라고 한 구절을, 교회가 세상 끝까지 계속되는 것임을 증명 하고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찬식에 관하여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고 한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오실 때까지"라는 구절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때, 마지막 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이 의식을 준수하도록 계획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 기록하신 말씀과 병행하는 상황을 찾아봐야 합니다. 예를 들면, 레위기 6장 12-13절에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지며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매일 드리는 제사와, 향로의 매일 타는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구약성경의 많은 명령과 비슷합니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모든 의례적인 율법의 완성으로서 이러한 제사는 오실 때까지 계속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더 이상 이런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고 멈춘 시기가 왔었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계명을 준수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위반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 계명에 순종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 자신이 587 BC에 예루살렘과 성전을 완전히 멸망시키심으로써, 성전 예식을 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멸하신 것은, 유다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 심판은 그들이 산당(山堂:high places)을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d. 물로 받는 세례와 성찬식은 하나님의 의례적인 율법이다

구약시대에 있었던 할례는 마치 인간의 죄가 단절되는 것을 가리키는 의례적인 율법이었음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물로 주는 세례도 역시 우리의 죄를 씻어야 할 필요성을 가리키는 의례적인 율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유월절, 번제(燔祭), 그리고 희생제(犧牲祭) 등, 구약시대의 의례적인 계명은, 희생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을 가리키는 그림자였습니다. 또한, 성찬식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영생을 얻고, 우리 구원이 완성되는 상징이며, 어린양과 신부(新婦)와의 혼인 잔치를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교회는 이 예식을 "성찬식(sacraments)"이라고 칭하고 지켜야 할 예법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것을 산당(high place)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성찬식(sacrament)"이라는 단어는, 이 예식을 실제(實際)로 실행하는 사람의 삶 속에 어떤 영적인 일이 행하여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 행사는, 자신들의 구원을 은혜로 받았으나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참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e. 하나님께서 떠나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곳을 떠나야 한다

우리가 역사적인 관점에서 지금의 큰 환난을 볼 때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믿는자들에게 그들이 속한 땅에서 떠나라고 명령하신 점입니다.

창세기 45장 9절을 보면, 요셉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아버지 야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그리고 또한 창세기 46장 3절에 하나님께서 직접 야곱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이와 마찬가지로, 유다와 예루살렘의 거민들에게도 바벨론으로 갈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예레미야 21장 9절에서 읽어봅시다.

"이 성에 거주하는 자는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운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의 생명은 노략한 것같이 얻으리라"

이 말씀은 예레미야 24장 5절에 되풀이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보아 좋게 할 것이라"

또한, 예레미야 29장 16-18절과 38장 2절에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위에 앉은 왕과 이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되어 가지 아니한 너희 형제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로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 같게 하겠고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 보낸 열방 중에서 저줏거리와 놀램과 치소와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 (렘 29:16-18)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의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같이 살리라" (렘 38:2)

마태복음 24장 15-16절은 하나님께서 오늘 날 교회와 회중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누가복음 21장 20, 21절에서 같은 경고를 하십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에서 음녀, 큰 바벨론을 가리켜 그녀가 무너졌다고 말했습니다. 본 공부에서 우리는 이 음녀가 조직체인 지방교회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이들이 큰 환난기간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처한다는 것을 배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 18장 4절에 다음과 같이 경고하십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f. 누가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교회 안에 진심으로 믿는자가 아직도 있을 것이다라고 하신 것 같은 구절이, 예레미야 39장 10절에 있습니다. 그 구절을 읽어봅시다.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두고 그 날에 포도원과 밭을 그들에게 주었더라"

위의 상항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열왕기하 25장 12절과, 예레미야 52장 16절을 다시 읽어봐야 합니다. 이 구절들에 나오는 빈민들이 참 믿는자들이 아닌가? 그리고 그들이 예루살렘에 남을 수 있는 권리를 받지 않았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비록 예루살렘에서 도망하라는 명령을 되풀이 하셨을 지라도, 참으로 믿는자들이 여전히 지역 교회 안에 남아서 여전히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지 않습니까?

예레미야 40장 7절에, 바벨론의 왕이 아하감의 아들인 그다랴를 세워 예루살렘에 남아 있은 자들을 다스리게 한 것을 읽습니다. 예레미야 40장 11-13절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압과 암몬 자손 중과 에돔과 모든 지방에 있는 유다인도 바벨론 왕이 유다에 사람을 남겨둔 것과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그들의 위에 세웠다 함을 듣고 그 모든 유다인이 쫓겨났던 각처에서 돌아와 유다 땅 미스바 그다랴에게 이르러 포도주와 여름 실과를 심히 많이 모으니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들에 있던 군대장관들이 미스바 그다랴에게 이르러"

그 다음에 예레미야 41장 2절과 3절을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와 함께한 열 사람이 일어나서 바벨론 왕의 그 땅 총독으로 세운바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칼로 쳐죽였고 이스마엘이 또 미스바에서 그다랴와 함께한 모든 유다인과 거기 있는 갈대아 군사를 죽였더라"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면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가 유대인들에게 이미 현실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가레아의 아들인 요하난이라는 자의 지휘 아래 어느 정도의 빈민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g. 그 날을 감(減)하실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21절에 하나님께서 큰 환난의 기간에 대하여 간단 명료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우리가 이 구절의 말씀을 더욱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에 우리가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을 발견합니다. 그 구절을 읽어봅시다.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큰 환난을 겪는 자들에 관하여 21절에 말씀하신 것을 요약해 보아야 합니다. 큰 환난에 대하여 실제로 충격을 받는 세 가지종류의 사람들을 들 수 있습니다.

1. 교회 안의 참으로 믿는자들

2. 구원받지 못한 교회 회원들

3. 교회 밖에 있는 세상

참으로 믿는자들은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서 말한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며, 고린도전서 3장 12절에서 금, 은, 보석입니다. 그들은 요한계시록 11장에 죽임을 당하는 두 증인이며, 교회로부터 출회를 당하거나, 자진해서 나오도록 명령을 받아, 큰 환난을 겪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들의 구원이 안전함을 알며, 교회가 아무 것도 제공할 수 없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두 번째 부류에 속한 자들은 지역 교회의 회원들로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며, 갈라디아서 4장 25절에서 말하는 "지금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들은 고린도전서 3장 12절에 나무, 풀, 짚으로 표현됩니다. 그들의 신앙에서 오는 영적인 안정은 지역 교회에 있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지역 교회는 참 믿는자들의 집단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성령께서 더 이상 그 회중 안에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시지 않으며, 사실상 사단이 그들의 지역교회를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세 번째 부류(部類)의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 많은 자들이, 아직 구원받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에 속한 자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들은 사단이 자신들의 교회를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큰 환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들의 지역 교회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 머물기를 더 고집할수록, 그들의 눈은 더 어두워질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하나님께서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 하게 하사 거짓을 믿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경고를 기억하십시오.

h. 큰 환난에 대한 하나님의 시간표

야곱 시대에 있었던 기근은,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도록 명령받았던 해로부터 두 해 전에 시작되었습니다(창 45:6). 기근의 시작은 1879 BC이었습니다. 그러므로 1879 BC가 큰 환난의 시작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1877 BC에 환난은 극도에 도달하였고, 야곱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갈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완전한 몰락과 함께 큰 환난은 587 BC에 절정에 달했고, 사실상 22년 전인, 609 BC에 시작되었습니다. 큰 환난이 시작한 609 BC에, 유다를 통치한 마지막 선한 왕이 전장에서 예기치 못한 전사(戰死)를 당했습니다. 그 때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이 유다에 내리기 시작하여 마침내, 587 BC에는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 해가 바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유(占有)한 기간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 해가 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큰 환난도 사실상 몇 년 일찍이 시작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바와 같이, 1994년은 교회시대가 끝이 나고, 늦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 해로서 지적됩니다. 이것은 다니엘서 9장의 2300번의 주야가 끝나는 시기와 일치합니다. 그것은 또한 요한계시록 11장의 마흔 두 달의 끝남과, 요한계시록 11장의 삼 년 반의 기간이 끝나는 시점과도 일치하며, 또한 늦은 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큰 환난의 기간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것은, 예레미야의 70년 환난 기간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공부한바와 같이, 70년의 첫 부분은 요시야왕이 죽은 609 BC로부터 시작되어 587 BC에 끝이 났고, 이 때에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그 후, 두 번째 부분인 48년의 기간은 587 BC로부터 시작되어 539 BC에 바벨론이 메데와 바사에게 점령당함으로써 끝이 났습니다. 메데와 바사에 의하여 바벨론이 정복당하는 것은 세상 끝의 심판 날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야곱 시대에 있었던 큰 환난 역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첫 부분은 2년 동안의 기간이었으며, 둘째 부분은 5년간의 기간입니다. 이 둘째 기간을 다른 의미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1447 BC까지 480년 동안 체류한 기간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큰 환난 기간의 두 번째 부분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이며, 그 기간이 얼마나 될 것입니까?

야곱의 환난과 이스라엘이 겪은 환난기간은 오늘날의 환난 기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사실상 하나님께서 이 기간을, 오늘날의 큰 환난의 기간을 지적하는 데 사용하신 점을 알게 됩니다.

i. 외형적인 기성교회가 성경이 말하는 유다나 예루살렘인가?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읽는 바와 같이, 도망해 나와야하는 예루살렘과 유다는 과연 누구이며, 또 무엇을 지적하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21장 20절과 21절에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그 곳을 나와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며, 또 거기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 명령은, 과연 누구를 지적하여 하신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조직체인 지역교회는,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함께 포함한 고대 유다나 이스라엘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들을 유대인이라고 칭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2장 28-29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갈라디아서 3장 29절에도 다시 선포되어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에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육신적인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받은 후손들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참으로 믿는자들이며, 바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갈 6:16).

갈라디아서 4장에, 두 가지 다른 예루살렘에 관하여 말씀하셨고, 우리의 생각을 잘 정립시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라 곧 우리 어머니라"

이 구절이 말하는 예루살렘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즉 이것은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자들로 구성된 집단이며(엡 2:6), 참 믿는자들입니다. 구원을 받는 순간부터 우리는 영원히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속하게 되며, 절대로 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곳은 결국 새 예루살렘이며, 그리스도의 신부(新婦)가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시대 때에, 성전에서 금, 은, 그리고 보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4장은 또 다른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지금 있는 예루살렘이며(갈 4:25),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과 유다에 있는 자들은 도망하여 그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경고하시는 성경말씀(눅 21:20, 21)의 중요한 문맥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세상 마지막에 가까운 시기를 지적합니다. 누가복음 21장 24절은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힌다고 지적합니다. 27절 말씀에 그 때는, 인자(그리스도)가 구름 속에 오심을 그들이 보기 바로 직전이 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것은 물론 마지막 때에 매우 가까워서 일어날 사건임이 분명합니다.

인류역사를 놓고 볼 때, 마지막 날에 매우 가까와 있고, 이미 큰 환난기간에 살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습니다.

오늘날 현재 이스라엘 땅에 있는 실제적 예루살렘에는 그리스도를 믿는자들이 거의 없습니다. 실제적으로 그 도시는 전 세계적으로 관련된 큰 환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루살렘은 오직 영적인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영적인 예루살렘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 "지금 있는 예루살렘"으로 다시 나누어집니다.

j. 우리는 계속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함께 모일 수 있는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경우는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어떻게 히브리서 10장 25절에서 명령하신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이 구절을 읽어봅시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이라는 구절은 세상이 끝나는 마지막 심판의 날, 즉 마지막 시간까지, 믿 자들이 행하여야 할 명령임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지역 교회에서 모이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들이 이 명령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히브리서 10장 25절에서 "모이기(assembling)"로 번역된 희랍어 episunagoge는, 데살로니가후서 2장 1절에 "그 앞에 모임(gathering together)"으로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 희랍어 단어 episunagoge는 성경에서 위의 두 구절에만 씌어 졌습니다. 이 모임은 참 믿는자들만으로 구성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그 앞에 모임(gathering together unto him)"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교회 안에서는 참으로 믿는자들을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쓰시던 기관으로서의 시대가 끝이 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명령에 특별히 순종해야할 날을 현저하게 정하여 주셨습니다. 그 날이 바로 일요일입니다. 이 날은 주님의 날이며, 이날은 우리 자신의 오락을 위하여 지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사 58:13)이라는 말씀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이 날은 이 세상의 염려를 잊어버리고, 우리의 생각을 주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일요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날 하루 전체를, 그를 섬기는 일에만 자유로이 쓸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비록 우리와 같이 모이는 자들이,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인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성경을 읽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성경에서 읽을 수 있는 신앙의 성도들과 모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주님께 기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성경을 읽고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중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에는, 내가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긴밀한 친교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2. 왜 교인들을 놀라게 하는가?

그렇게 많은 목사와 교회 회원들이, 교회시대의 종말이 온 것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왜 꺼려하겠습니까? 종교개혁을 치르고 세워진 개혁교회, 루터교회, 그리고 장로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시 까지 존속할 것이라는 것은,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과 같은 교리입니다. 그와 반면, 알미니안 교리의 교회들은, 본래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를 이어받지는 않았으나, 그들 또한 교회가 세상 끝날 까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이 문제를 가르치게 된 네 가지 구절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 구절을 수많은 교회가 잘못 해석해 왔기 때문에, 목사들과 회중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거대한 영적인 권위를 발전시켰습니다. 우리는 이 네 가지의 구절이 주로 어떻게 해석되었는지를 알기 위하여 각각의 구절을 조사해 볼 것입니다.

우리가 조사할 첫째 구절은 디모데전서 3장 15절의 말씀입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이 구절에서 생기는 중요한 질문은,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한 것이 "교회"를 지적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지적하는지에 있습니다. 보통, "교회"를 지적한다고 가르쳐 왔기 때문에 지역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은 교회가 위대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입시켜줍니다.

이 해석은 다음에 오는 두 번째 구절, 마태복음 16장 19절을 뒷받침해주고, 그 뒷받침을 받아왔습니다. 즉 장래에 있을 모든 목사들과 사도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에게, 그리스도께서 천국의 열쇠를 주셨다는 해석입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여기서 말한 열쇠는 먼저, 지식의 열쇠(눅 11:52)로 이해됩니다. 이 지식은 성경의 지식이며, 구원을 위하여 열린 문입니다. 둘째로 이 열쇠는, 천국의 문을 닫는 열쇠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구원받았다고 생각되는 자들에게는 이 열쇠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고, 또 구원받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자들에게는 천국의 문을 닫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활동의 결과에서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활동을 옹호하시고, 하나님의 법으로써 인정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즉 무엇이든지 그들이 땅에서 매거나 풀면 하늘에서도 매고 풀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해는,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요 터라는 믿음이 전적으로 부합됩니다.

교회가 거대한 영적 권위를 가졌다는 개념을 발전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세째 구절은 에베소서 2장 20절에 있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이 구절은 사도와 선지자들로 시작된 교회의 지도자들이 지역 교회의 영적 기초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위의 구절은,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이며,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는 개념에 전적으로 부합됩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는 개념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권위를 말한 네째 구절은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구절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는 음부의 권세가 사단의 나라라고 한 점입니다. 그러므로 지역 교회는 절대로 사단의 행동에 의하여 넘어지지 않는다는 견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문의 여지가 없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 세상 마지막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네 가지 구절이 지금까지 말한 대로 이해된다면, 지역 교회 목사들과 장로들, 그리고 집사들에게 막강한 영적인 권위가 주어집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따라야 할 몇 가지의 규칙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물로 주는 세례이고, 교회의 모든 교리에 대한 순종과, 그리고 신앙 고백을 믿어야한다는 규칙들입니다. 이러한 규칙들이 교회 회원들이 신실하게 실천된다면, 그 개인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외형적으로 눈에 보이는 지역 교회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교회와 필연적으로 동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회원들이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일 때에만 이러한 가정이 성립됩니다.

동시에 교회의 회원들은 그 교회의 신앙고백이나 교리들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실한 것으로 믿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결국 이렇게 될 때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이 구절들을 이렇게 이해함으로써, 교회의 회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안전하다는 큰 확신이 주어집니다. 그 지역 교회의 규칙을 신실하게 따르는 한,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확신을 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얻습니다.

이 구절들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교회시대가 끝나고 믿는자들은 그 교회들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말에 대하여 오늘날의 교회가 공포에 휩싸였음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그들에게는 교회를 나온다는 것이 마치 영적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더욱이 어떤 목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영적 권위를 입증하기 위하여 동료 목사로부터 안수를 받고도, 이 거대한 영적 권위를 순순히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겠습니까?

a.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인가?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인가?

이제 우리가 이러한 네 가지의 구절을 다시 살펴보면서, 이 구절들이 진실로 가르치는 뜻을 발견하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첫째 구절인, 디모데전서 3장 15절을 다시 살펴봅시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까? 만일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면, 어떻게 한 교회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고, 또 다른 교회는 오직 택한 백성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한 교회가 침례를 주장하고, 다른 교회는 물을 뿌림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 옳다고 가르칩니까?

교회가 믿는 것에 따른 차이점은, 성경말씀이 아니고 그들이 정의한 많은 교리에 달려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기초가 되셔야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서 명백하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시대 때에는 믿는자들이 성전(교회들)의 산돌 들이었음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성전 안에 영원한 기둥이라고 불리기까지도 한 자들입니다(계 3:12). 그러나 결코 교회가 진리의 기초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만이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될 수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들의 집회가, 하나님께서 아직 성경을 쓰고 계실 당시에 마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오해하지 않도록 확실히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도행전 15장 28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셨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사도들의 모임을 성령이 이끌어주셨고, 그 모임에서 나오는 결론이 하나님의 말씀의 한 부분이 될 수 있게 하신 것을, 이 구절에서 우리가 알게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 즉 거룩한 사람들이 하나님이신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결코 교회 목사들의 엄숙한 모임에서 나온 결론이며, 성경에 신실하다는 제안을 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목사라 할지라도 로마서 3장 4절에,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하신 원칙을 언제나 마음에 간직하여야만 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수많은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묵과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다스리는 권위자들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가 결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즉 기둥과 터가 되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는 말씀이시며, 또한 그가 진리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바로 진리입니다. 어떤 성직자들이 엄숙한 모임을 가진다고 해서 어떻게 결점이 많은 죄인인 인간이 진리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이 근거가 없는 결론은, 교회가 자신들의 신앙고백이나, 교회의 특별한 교리들이 신성불가침이라고 믿기 시작하는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교리와 신앙고백을 신실하게 선포하는 한, 자신들이 만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정확하다고 믿게됩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어지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슬프고 불행하게도, 이러한 믿음은 무서운 교만과 자부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교회에 내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하여 진노를 내리시는 일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하셨을까?"라고 의아할 따름입니다.

b. 하나님께서 교회를 시험하시고 계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만들어 놓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시험을 받았습니다. 아브람 역시 그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있는 40일 동안 시험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직후 그는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시험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인류를 다스리시는 일에 있어, 중요한 일면이 됩니다.

이와 동일한 시험이 베드로전서 5장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러나 4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이 구절이 가르치는 것이 과연, 목자들이 회중을 돌보아 온 일에 대한 보상으로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까? 모든 믿는자들이 영광의 의(義)(딤후 4:8)의 면류관을 받으며, 또 생명의 면류관(약 1:12)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으며, 이 구절은 특별히 회중의 영적 감독자들인, 장로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것은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서 말씀하신 바 다음과 같은 뜻이 아니겠습니까?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참으로, 목사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자들로 보입니다.

그러나이 목자들은 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따라야 할 가장 훌륭하고 믿을만한 본은 그리스도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c. 얼마나 말씀에 신실한가?

사실상 문제는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한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심각합니다. 우리가 목사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놓고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신실하게 말씀을 전달하는 임무를 가졌습니다. 그가 회중 앞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말할 때에는, 정확히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말해야 됩니다. 만일 그릇되게 가르쳤을 때에, 그는 자신이 나온 신학교나, 동료 목사나, 혹은 장로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습니다. 그가 신실하게 양들을 치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이 양들을 그가 영적으로 감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판단해야할 두렵고 슬픈 사실은, 수많은 목사들 중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없으며, 있어도 아주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1장 16절에 경고하신 바, 그의 진노를 그 목자들과 그들 교회에게 쏟으실 것이 당연합니다.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성경만이 그리고 성경 전체가 항상 신성한 권위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지역 교회가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d. 은혜로써만 받는 구원

구원의 본질에 대하여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이해하는 것의 다음으로 중요한 사항이 됩니다. 이것은 성경말씀의 한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이루어짐을 강조합니다. 어느 경우에도 아무리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행위가 우리 구원에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가장 신실하다고 하는 교회에서 입으로는 은혜의 교리를 가르치며 예배를 드린다고 하지만, 그것들과는 상반되는 교리를 믿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들 수 있습니다.

1. 믿음은 하나님께서 구원 계획을 시행하시는 도구로써 쓰신다.

2. 우리가 구원받기에 앞서, 물로 세례를 받아야한다.

3.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해야만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4.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전 세계 만민(萬民)의 죄를 위하여 마련되었다.

5. 구원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한다.

6. 구원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7. 우리가 교회 회중의 한 부분이 될 때에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8. 우리가 구원받기에 앞서, 대중 앞에서 믿음에 대한 간증을 해야만 한다.

9. 우리가 특정한 기도를 함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

10.우리가 만일 교회에 결석을 하게 되면, 이것은 구원받지 못했다는 표시이다.

사실상 현재 거의 많은 교회는 이러한 잘못된 교리 중에 최소한 몇 가지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항은 우리가 무엇을 행할 때에만 비로소 구원을 얻게 된다는 교리입니다.

e. 구원을 받기 전에는 영적으로 모든 인간은 죽어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어라, 회개하라, 하나님을 찾아라,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신 명령은 마치 우리가 이러한 일을 행하여야하며, 또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액면 그대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그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에게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읽는 바, 육신적으로 죽었던 나사로와 같이 우리도 영적으로 죽어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적으로 죽은 나사로를 불러 나오게 하신 것처럼, 그가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믿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심을 그들은 결코 깨닫지 못합니다. 나사로는 앞으로 나아오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무덤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육신적인 생명과 함께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권위와 구원의 본질에 대한 두 가지 큰 문제는, 우리가 교회시대의 끝에 와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우리를 네 번째 구절로 이끌어줍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음부의 권세라는 것은 사단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사단은 영원히 지옥에서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지옥에 갈 사람들을 조종합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지옥에 갈 자들을 통제하십니다. 슬픈 사실은, 음부(지옥)의 권세가 모든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내린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음부의 권세가 그들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들은 믿는자들의 집단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교회의 회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가 없어진 것처럼, 어느 교회나, 또는 모든 교회가 없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외면으로는 그들이 여전히 세상에 끝날 까지 존재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회당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하나의 기관으로서 이른 비가 내리는 계절에 있었고, 그 회당은 지금까지도 존재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지막에 가까워지면서, 회당이나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계획에 아무런 부분도 되지 않습니다. 바로 음부(지옥)의 권세가 이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f. 각 기성교회의 회중이 그리스도의 신부인가?

불행하게도 수많은 사람들은 지역적인 외형 교회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교회와의 차이점에 관한 아무런 구별도 하지 않습니다. 사실 많은 교회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교회의 회원이 되며, 정규적으로 성찬식에 참여하는 자들을 참으로 구원받았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전 회중이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을 새 피조물로 만드시는 일로서, 100%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그가 각 개인에게 새로이 부활한 영혼을 주시고, 구원받은 개인은 그 영혼 안에서 다시는 죄 짓지 않기를 원합니다. 사실, 구원받은 자는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알게 됩니다. 요한일서 2장 3절이 우리에게 확신을 줍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러므로 진실로 구원받은 자는 그가 가진 모든 교리가 성경에 신실한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는 교회의 교리나 신앙고백들이 결코 진리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구원받은 자는 벨직 신앙고백의 제 7장을 쓴 저자의 마음을 간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신앙고백과 교회의 교리가 가져야할 성격을 정확히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제 7 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벨직신앙고백 제 7장: 성경은 유일한 믿음의 법으로서 완전하고 충분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를 충분히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이 구원을 받는데 요구되는 모든 것을 충분히 가르침을 우리는 믿는다. 또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예배하는 방법이 이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비록 사도라 할지라도 성경에서 가르치시는 이외의 것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마치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하늘에서 오는 천사라 할지라도, 성경과 다른 것을 가르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더하지도 못하고, 빼지도 못한다고 명령하신 것은 이 성경에 기록된 교리가 완벽하며, 모든 면으로 완성되었음이 분명함을 말한다.

성경을 사람들이 쓴 기록이 있기 때문에 사람의 말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성경을 쓴 사람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거룩함을 입어서 쓴 것임으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한결같이 신성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내용이 비록 관습이나, 수많은 군중에 대한 이야기이거나, 오래 전 세대의 이야기이며, 연속되는 시간과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혹은 심문회의 이야기이며, 조서를 선포한 기록이라 할지라도 이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님의 진리와 일치되는 값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진리가 모든 세상의 진리보다 높은 데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모든 인간은 거짓말쟁이며, 진리를 지닐 수 있는 인간의 마음 무게는 입김보다 더 가볍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들이 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친바, 오류가 없는 성경의 법과 상반되는 모든 가르침을 거절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가르치는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시험한다. 따라서 어떠한 사람이 성경의 진리가 아닌 것을 가지고 당신에게 올 때는, 그를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그에게 인사도하지 말아야 한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이 훌륭한 벨직 신앙고백서 제 7장의 문맥이 변함없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 문서의 내용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신앙고백에는 수정해야할 수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신앙고백들을 수정할 때, 성경만이 그리고 성경 전체가 권위임을 더욱 더 선명하게 강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들은 이러한 신앙고백들을 그들이 처음 채택한 것과 같은 상태로 늘 받아들였습니다. 그 신앙고백들을 성경의 마지막 권위가 되는 문서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것들이 진리로서 존대를 받게 되었고, 고전(古典)으로서 신임하는 유물(遺物)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앙고백의 그릇된 가르침들은 산당(山堂)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주장하는 거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궁극적인 권위가 오직 성경에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신앙고백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자료가 될 수는 있으나, 결코 마지막 권위가 될 수는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에는 성경의 가르침과, 신앙고백에 신실한 가르침의 차이점을 인식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g. 결론을 내려보자

우리가 살펴본 네 가지의 구절들이, 외형적인 조직체, 지역교회가 진리의 기초가 된다고 그들에게 항상 이해되어 왔습니다. 즉 영적 지도자들이 교회의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역사를 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인정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실제적으로 교회가 동일체라고 믿으며, 또한 실지로 교회 회원 전체가 구원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이런 생각은 루시퍼가 범한 것과 똑같은 잘못된 생각을 길러왔습니다. 사실상 사단이 영을 다스리도록 처음 창조되었을 때(히 1:13), 그는 하나님이 되기를 원했습니다(사 14:13-14). 참으로 믿는자들은, 하나님의 겸손한 종 일 뿐임을 항상 인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된 모세에 대하여(수 1:1), 또 주님의 종이 된 여호수아(수 24:29)에 대하여 읽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겸손한 종이 되어야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공부는 모든 교회회중을 좋지 않은 모습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결론은 목사들과 교회회원들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할 것입니다. 수많은 교회 회원들이 그들의 목사가 가진 영적 권위의 신빙성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목사가 사랑이 충만한 신실한 목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시험은,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데 있지 않으며, 어느 목사나 교단이 이러한 네 가지의 구절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믿는다면, 그리고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다고 믿는자들이 참 믿는자들이라고 믿는다면, 이것은 바로 이러한 교회를 감독하는 자들이 거대한 영적 권위를 가졌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는 거리가 아주 먼 영적 권위를 선정(選定)하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시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교회가 속한 교단이 가르치는 것을 검토해야됩니다. 대개의 목사는 교단이 주장하는 교리에 전적으로 신실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수많은 산당을 가졌다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지역교회의 목사가 인자하고 겸손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불행하게도 성령께서 그 회중 안에서는 더 이상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학습에서 배웠고, 또 깨달아야만 합니다. 심지어 목사가 겸손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끊임없이 기도하며, 성경을 배우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 하여도, 믿는자들은 여전히 그 교회를 나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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