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뉴스레터                       

여러분께 드립니다.

다니엘 1장 공부:

Kentucky에 사시는 Wilson자매님이 Dr. Vaught 목사님이 가르친 다니엘서의 주석을 참고하도록 보내 주셨습니다. 제가 가끔 참고하는 Matthew Henry의 것과 비교해서 보았습니다. 그 내용이 현저하게 차이가 있으며, 성경을 공부하는 방향이 다른 것도 발견했습니다. Vaught 박사의 가르침은 히브리 소년들의 놀라운 역사적인 기록을 공부하므로써 현재의 10대 소년들이 받아야할 교훈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네 명의 10대 소년들이 끝까지 본국에서 배운 신앙을 지켰고, 그 중 하나가(다니엘) 군중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우리들의 10대 소년들이 짐승 떼들처럼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 배우고 있지 않는가! 한 아이가 차를 사서 몰면 모두가 차를 사기 원하며, 또 하나가 오토바이를 사면 나도 그것을 살려고 하고, 하나가 Jean을 입으면 너도나도 Jean을 입고, ----하나가 머리를 길게 기르면 모두가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사실은 위대한 사람이 생각하는 과정이 아니다. 한가지 미국의 교육제도가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은, 우리가 젊은 아이들을 가루로 만들어 어떤 틀에 같은 모양의 인격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Matthew Henry 주석을 한 구절 번역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을 환관(宦官)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단 1:9)것과 같이 요셉은 감옥의 청지기였고 하나님이 그를 극진히 사랑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요셉과 같이 다니엘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청렴함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자신이 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인정해야 하며, 모든 일에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한다".

이상의 두 주석을 비교하면 두 사람이 성경을 다르게 해석한다기보다는, 두 사람의 관심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두 사람이 다 지나간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사실에서 우리 신앙생활의 지침을 찾고 있는 점입니다. Matthew Henry는 그의 주석을 통하여 은혜의 교리를 찾고 있으며, Dr. Vaught목사는 인간에게 주신 인간의 의지를 성경말씀에 적용하여 행동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부를 시작한 다니엘서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는 정도의 책일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다니엘서도 하나님의 감동으로 다니엘이 쓴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손을 빌리셨을 뿐, 사실은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책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는 천지를 창조하셨고 또 운영하고 계시며, 영원한 신천지를 창조하시고 운영하실 바로 그 분이십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다니엘서를 공부하도록 암시하신 것은 지금까지 인봉(印封)해 두신 큰 환난시기의 사건에 대하여 우리에게 맘씀 하시고 계심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당할 큰 환난을 야곱이 당한 환난(슬프다 그 날이여 비할데 없이 크니 이는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마는 그가 이에서 구하여냄을 얻으리로다[렘 30:7])과,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당한 환난과 같은 맥락으로 비교하신 것을 알 때, 다니엘이 겪은 경험은 바로 교회시대가 끝나고 교회에서 출회를 당했거나, 교회를 떠난 사람들의 마지막 큰 환난의 경험과 일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 사건들 이면에 숨겨진 영적인 뜻을 찾는데 성경말씀들을 비교해야 합니다.

다니엘서 제 1장의 얘기 줄거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609 BC에 유다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점령되었고, 606 BC에 제 1차로 3023명의 바빌론 왕의 포로(렘 52:28)가 바벨론으로 옮겨졌으며, 다니엘이 3023명중에 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 2차의 포로가 832명, 제 3차가 745명으로, 도합 4600명임을 예레미야는 기록했습니다(렘 52:28-30). 이 숫자의 뜻이 있음이 분명하며, 환난과 관계가 되며 또 구원받은 자들을 상징합니다.

이 포로 중에 유다 왕 여호야김이 있는 것처럼 알게됩니다. 이 가정(假定)을 믿게 만드는 것은 역대하 36장 6절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치고 저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가고"라고 한 오역(誤譯)입니다. "잡아가고"는 "to carry him to Babylon"이며, 바른 번역은 "집아 가려고"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27장에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가야만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8-9절에는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는 국민이나 그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은 내가 그의 손으로 진멸 시키기까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벌하리라 너희는 너희 선지자나 너희 복술이나 너희 꿈꾸는 자나 너희 술사나 너희 요술객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아니하리라 하여도 듣지 말라" 고 하셨고, 11절은 "오직 그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기는 나라는 내가 그들을 그 땅에 머물러서 밭을 갈며 거기 거하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구절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은 구원받은 자들을 상징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여호야김이 그 중에 한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하는 성경 구절은 열왕기하 24장 1절에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년을 섬기다가 돌이켜 저를 배반하였더니"라고 함으로 그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계속하여 통치하였음을 말합니다.

다니엘과 젊은 소년 세 사람이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배우도록 선정되었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마시도록 지시를 받았으나, 히브리 소년들 4명은 이 음식을 거절하고 물과 채식(菜食)을 받게됩니다. 이 소년들은 채소와 물을 먹으면서 얼굴이 윤택해 졌으며, 그들의 지혜와 지식이 갈대와 박수들 보다 10배나 나아져서, 느부갓네살 왕의 인정을 받고 왕궁에서 왕을 보좌 하게됩니다.

다니엘 1장 1-7절: "유다 왕 여호야김이 위에 있은지 삼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것을 에워쌌더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기구 얼마를 그의 손에 붙이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의 묘에 이르러 그 신의 보고에 두었더라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명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의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게 하였고 또 왕이 지정하여 자기의 진미와 자기의 마시는 포도주에서 그들의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이는 그 후에 그들로 왕의 앞에 모셔 서게 하려함이었더라 그들 중에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유다 왕 여호야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징하고 하나님께서 선민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시대가 시작하면서 그 왕국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백성이 교회와 교인이 된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읽을 수 있는 모든 역사적인 기록은 교회시대에 일어날 것을 미리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 중에 왕들이 하나님을 거역한 기록이 그것이며, 그 왕국이 적국 바벨론에 의하여 점령된 것은, 교회가 더 이상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못하고 사단에게 팔린바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아주 특이한 해석이 아닌가? 라고 반문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 구약 성경이 역사적인 사실을 통하여 우리 신앙 생활에 교훈을 받는 것 밖에 없다면 성경이 성경일 수 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쓰셨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그 뜻이 깊고 오묘합니다. 성경을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딤후 3:16)라고 하셨고, 또 "은혜의 해와 우리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사 61:2)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목적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 뿐 아니라, "책망"의 말씀이며, "은혜의 해"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해"와 그 "날"에 대하여 초점을 두고 쓰셨기 때문에 교훈만을 찾는 성경 독자들에게는 사람들이 쓴 역사책이나 교양서적과 다름이 없게됩니다.

여호야김을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잠아 가려고 하던 연유는 그의 부친, 선한 왕 요시야가 전사(戰死)한 기록에서 시작해야합니다. 요시야는 하나님 말씀을 철저하게 믿고 그 명령에 순종한 왕이었습니다. 역대하 35장 18절에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열왕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거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라고 했을 만큼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인도한 선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애굽 왕 느고와 므깃도 골짜기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것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원인이었습니다.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활 쏘는 자가 요시야왕을 쏜지라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하였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대하 35:22-23)

요시야가 전사한 후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올랐으나 석달 후에 애굽 왕 느고가 그의 형 여호야김을 왕으로 삼았습니다(대하 36:4). 여호야김은 부왕 요시야와 같이 선한 왕이 아니었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대하 36:5)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다 왕 여호야김은 애굽 왕 느고 치하에 있었고,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뒷전에 두고 세상 풍조에 따라 교파와 교회를 운영하고 있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애굽 왕을 섬기다가 할 수 없이 바벨론 왕을 섬기게 되었으며, 그가 다스리던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거나 다 살해를 당한 것입니다. 여호야김은 역대 유대 왕 중에 특히 악한 왕이었으며, 선지자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던 왕입니다(렘 26:20). 성경책을 불살랐으며,(렘 36:28) 그가 저주를 받고 죽었음을 하나님께서 확실히 말씀하셨으며(렘 22:18), 또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고 (렘 22:19) 하심으로, 교회에 지도자이면서도 성경이 정의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상징했습니다. 나귀는 부정한 동물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상징합니다.

유대 왕이 어떻게 기독교 목사나 신부를 상징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왕의 직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벧전 2:9). 믿는자들은 왕이며 또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전 기구 얼마를 그(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시매"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포기하셨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쓰는 기구를 어떻게 만들 것을 일일이 지적하셨고(출 27:), 일단 명령하신 것을 모두 하나님의 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이방인에게 준다는 것은 심판을 유다에게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국법을 어기면 이에 대한 형벌을 받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법을 어길 때 그에 대한 형벌이 정해져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내가 믿고 영접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법인 성경말씀을 다 믿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을 내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점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법인 성경을 얼마나 존중히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전 기구를 옮겨간 곳이 "시날"에 있는 이방신(雜神)들의 보고(寶庫)입니다. 이방신을 숭배하는 가증한 곳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할 때 쓰던 기구들이 운반되었습니다. 귀하게 쓰이든 그릇이 천하고 가증한 일에 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귀한 그릇으로 상징하시지 않았습니까?(롬 9:21) "시날"이 어디입니까? 시날은 평지(平地)이며, 평지는 인간의 문화문명의 발원(發源)지입니다. 창세기 11장에는 그 시날 평지에서 벽돌을 구어 바벨탑을 쌓던 기록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시날은 사람의 생각이 번창하는 곳이며,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곳이며, 각각 열국들이 모여 자신들의 방언을 말하는 곳입니다. 각기 다른 방언(교리)을 말하는 현대교회를 상징합니다. 천국의 방언은 하나밖에 없음으로, 하나님께서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성경을 완성하셨지마는, 각 교파들은 자기들의 지어낸 방언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왕이 이스라엘 포로 중에서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한 소년들을 선택했습니다. 선택된 소년들은 3년 동안 훈련을 받을 것이며, 그 후에 바벨론 왕을 섬기도록 계획한 것입니다. 세상 적으로 볼 때 바벨론 왕은 이스라엘 민족을 자신의 통치하에 두겠다는 장기적인 계획이었습니다. 갈대아 교육을 받는 이스라엘 소년들이 조국 이스라엘을 완전히 잊어버리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소년들을 생각한다면, 무서운 전쟁의 와중에서 궁전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분에 넘치는 혜택이었습니다. 성경에서 3의 숫자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칩니다.

4명의 히브리 소년들에게 새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한국사람들이 다 개명을 한 역사를 상기시킵니다. 한국인들이 다 일본인처럼 변화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바벨론 왕도 4명의 이스라엘 소년들이 조국을 다 버리고 바벨론 사람들로 변화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새로 주어진 이름이 바벨론이 숭배하는 태양신과 관계가 되는 이름들입니다.

다니엘 1장 8-10절: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동무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로 보시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까닭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하게 되리라 하니라"

이 구절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쇠뇌 공작이 실패로 돌아간 기록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그들이 사는 환경이 어떻든 간에 그들은 성경이 정의한 신앙을 지킵니다.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는 궁전에서 매일 같이 먹게되는 양식을 말합니다.

생명의 떡: 이 구절은 요한복음 6장 35절에 예수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고 하신 말씀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라고 말씀하셨고(요 6:31-40),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이 생명의 떡을 먹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네 소년들이 채식을 했다는 기록은 곧 그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양식을 먹고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 포도주: 포도주에 대해서도 같은 뜻이 있으며, 특히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것은 (요 19:29, 막 15:36) 택하신 자기의 백성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신 것을 상징합니다.

사실상 히브리 소년들이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실제로 먹는다는 것의 그 영적인 뜻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성경말씀) 지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 생명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왕의 진미"는 바벨론의 진미이며, 세상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범죄와 연관이 됩니다. 왕의 포도주가 물로 대신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포도주는 진노의 포도주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14장 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계 14:8)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2-5)

그러므로 바벨론 왕이 주는 포도주가 "진노의 포도주"임을 히브리 소년들은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면서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겠다고 자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 전부를 지적합니다. 내 뜻대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받는 줄 알고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왕의 포도주 대신에 물을 마시게된 히브리 소년들의 뜻을 생각합니다.

몇 개월 전에 캘리포니아에 사시는 공 자매님으로부터 병을 물로 치료할 수 있다는 어떤 의사의 말을 믿게되었습니다. 우리 신체의 75%가 물로 구성되었고, 특히 인간의 뇌는 85%가 물이라고 합니다. 우리 신체에는 수천 가지의 기능이 있는데, 그 여러 가지 기능이 전부 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의사의 결론은, 사람이 병에 걸린다는 것은 신체의 어떤 기능에 물이 공급되지 못한 까닭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창조를 생각할 때 영적인 뜻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믿게됩니다.

성경에 물이라는 단어를 약 800번 사용 하셨으며, 우리의 생명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물을 나뉘게 하셨다(창 1:6)는 뜻을 확실히 알 수 는 없지만, 지구 표면의 75%가 물이라는 것도 창조의 오묘한 현상입니다. 과학자들이 우주의 어떤 별을 연구하면서, 그 별에 물이 있을 것이라는 증거를 찾고있습니다. 물은 우리의 생명을 말하며, 히브리 소년들은 이 물의 엄청난 가치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고 한 것은 요셉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典獄)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창 39:21)라고 하신 것과 일치합니다. 소년들이 은혜의 긍휼을 얻은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계획하신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내가 그리스도인답게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실을 저울에 달아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완벽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창세 전에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정하신 날에 나게 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일어나는 사건들을 완전히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날짜에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로봇(robot)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로봇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를 창조하신 선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그가 원하시는 대로 나를 쓰신다면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죄를 짓는 자유의지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나는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저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에 내가 채소를 먹고 생명수를 마시게 하신 것입니다.

바벨론 왕실에서 육식을 했으리라는 생각은 당연합니다. 진미를 만들기 위해서는 짐승들의 고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소년들이 육식을 거절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법이 먹을 수 있는 짐승의 고기를 한정 하셨기 때문입니다. 소년들이 왕실 주방에서 요리하는 고기의 내용을 알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육식에 대하여 성경 말씀을 생각하면, 노아가 홍수 후 방주에서 나오기 전에는 인간들이 채식을 했고, 육식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후 (창 9:3)인간의 수명이 급속도로 감해졌습니다.

10절에 환관장이 말하기를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하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환관장은 자기의 목숨을 내 걸고 히브리 소년들의 요구를 들어준 것입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생명을 바쳐 높은 영광스러운 보좌를 떠나시고 세상에 오시어 내 생명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니엘 1장 11-16절: "환관장이 세워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하매 그가 그들의 말을 좇아 열흘을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이러므로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분정된 진미와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채소를 먹고 물을 마시는 것을 10일 동안 시험해보고, 육식을 하는 자들의 얼굴과 비교해 주기를 다니엘이 환관장에게 청했습니다. 숫자 10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기 전에 10가지 재앙을 내렸던 일을 생각하게 합니다. 성경에 10의 숫자를 여러 번 사용하셨고, 10은 완성을 말하며, 또 완전함을 가르칩니다. 히브리 소년들이 경험한 10일에 대해서는 야곱의 아들 요셉이 경험한 사건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얘기, 주일학교에서 여러 번 듣던 얘기입니다.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을 때 야곱이 열(10) 아들을 식량을 구하러 애굽에 보냈습니다. 그 결과 요셉은 열 형들을 만나고, 아버지 요셉을 애굽으로 초청했습니다. 야곱이 가나안을 떠난 것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점령을 당하고 마침내 성전이 파괴된 사건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 두 사건을 큰 환난으로 정의 하셨기 때문입니다.(행 7:10-11, 렘 25:11, 마 24:21)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신 땅이며 자손들에게 영원히 물려주도록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3:15. 26:3-5, 28:13-14, 신 34:4). 정들은 아버지 이삭과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무덤이 있는 땅을 뒤에 두고, 무할례자 들의 땅 애굽으로 가야만 했던 야곱에게는 큰 환난이었습니다. 창세기 45장은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초청하는 과정의 얘기입니다. 야곱을 애굽에 초청한 것은 요셉이 아니고 애굽 왕 바로 이었습니다. 애굽 왕은 야곱이 가나안을 떠나서 애굽에 올 때까지의 양식을 싣고 가도록 명하였고(창 45:23), 그 양식을 실은 짐승은 암 나귀 10필이었습니다(창 45:23). 야곱이 근 2년간 가나안에서 흉년을 겪으며 고생하다가, 7년 흉년의 나머지 5년을 애굽에서 요셉의 보호를 받고 편안하게 지냈습니다. 그 과도기에 가나안을 떠나서 애굽까지 올 때에 먹을 양식이 10필의 암 나귀에 실려진 것입니다.

히브리 소년들도 무서운 전쟁 후에 또 포로가 되어 끌려왔다가, 편안한 궁전 생활을 할 수 있을 때까지의 과도기가 바로 그 10일간이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이 시기에 살아남도록 식량을 보내 보호한 것과 같이, 히브리 소년들도 하나님께서 이 과도기의 고비를 극복하도록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야곱의 환난 7년과 이스라엘의 큰 환난 70년, 또 우리가 겪는 마지막 큰 환난 23년이 1대 1로 비교가 되는 것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큰 환난을 당한 우리가 겪는 과도기는 교회에서 나오는 과정입니다. 온 몸을 받쳐 봉사하고 또 진실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삶에 대하여 대화하던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을 다 뒤에 두고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은 그의 긍휼과 자비로 인도하시어, 정착시키시며, 그 정착된 곳에는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며, 위안과, 즐거움과 또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다니엘 1장 17-21절: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왕의 명한바 그들을 불러 들일 기한이 찼으므로 환관장이 그들을 데리고 느부갓네살 앞으로 들어갔더니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 없으므로 그들로 왕 앞에 모시게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배나 나은줄을 아니라 다니엘은 고레스왕 원년까지 있으니라"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라는 기록은 물론 히브리 네 소년이 갈대아의 문화와 문명을 배우는 학문을 습득했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소년들이 월등하게 현명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가 더해진 것을 또 믿게 됩니다. 에스겔은 다니엘을 노아와 욥과 같은 의인이라고 정의했습니다(겔 14:14).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서야 어떻게 의인이 되겠습니까? 믿는자라고 하면서도 성경에 대한 지식을 과학이나 사회학의 지식보다 낮은 위치에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학이나 사회학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법칙을 발견하고 적용하는 학습이지만, 성경의 지식은 창조의 원 뜻과, 또 새로운 창조와 인간의 장래에 대한 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얻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모든 이상과 몽조(夢兆)를 깨달아 알더라"라고 하신 것은 다니엘의 마음이 순결하여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다니엘은 말세, 큰 환난시기에 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며, 이에 대하여 요엘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28)

이 구절에 "그 후에"를 "말세에"라고 사도행전에(행 2:17) 번역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입니까? 말세에 사는 저희들은 다니엘에게 보여주신 것보다도 100배나 더 되는 이상과 꿈을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통하여 주십니다.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術客)보다 십배나 나은줄을 아니라"고 하신 것은 히브리 소년들의 지혜와 총명은 누구의 것과도 비교가 되지 못함을 말하며, 사실상 구원받은 자들의 지식은 세상의 어떤 지식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믿는자들의 지식은 영원한 것이며, 세상의 지식은 세상과 그 수명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지식도 페하리라"(고전 13:8)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박수와 술객들"은 영문 KJV에 "magicians와 astrologers"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세계를 다스리는 대왕이 "요술사(妖術士)"와 "하늘을 살피는 자(astrologers: 점성술[占星術]을 하는 자)"들의 조언을 받아 정치를 한다는 것은, 그가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요행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요술사에 대한 얘기는 바로 왕이 7년 흉년과 7년 풍년에 대한 꿈을 꾸었을 때와,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10재앙을 애굽 왕에게 내릴 때, 바로 왕이 의뢰하던 사람들입니다. "하늘을 살피는 자"들은 말세에 불로 심판을 받아 멸망될 자들임을 이사야 48장 13-14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요술사와 하늘을 살펴보는 자들의 지식이 구원받은 자들의 지식과 어떻게 비교가 되겠습니까? 10배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곡절을 겪은 후 다니엘은 바벨론 왕 궁전에서 67년간을 살았고, 바벨론의 포로 되었던 자들은 고레스 왕이 해방(解放)시킵니다. 이 이스라엘의 해방은 큰 환난시기가 끝에 도달했음을 상징합니다. 큰 환난시기가 끝나면 그리스도와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세상의 종말이 옵니다.

이대우 가족 드림, 8/10/2007

문서의 처음으로 가기